▲ 연지의 여름 풍경. 그 옛날 연지는 수련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수초인 순채가 가득해 순지라고도 불렸다. 연꽃이 피는 연지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됐다.
<동국여지승람>에 진례성(進禮城)에 대한 소개는 '서쪽 35리다' 밖에는 없다. 오히려 이학규(李學逵·1770~1835)가 시의 주에 적어 놓은 '진례성은 김해부 서쪽 3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가 그의 아들 하나를 진례성주로 삼고 왕궁(王宮)과 태자단(太子壇)과 첨성대(瞻星臺)를 세웠는데,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거주민들은 경성내(京城內)라고 부른다'라는 기록이 훨씬 상세하다. 그의 시를 보자.


가소롭구나 가야의 아들은
누가 진례군으로 삼았던가
둘레 팔 구리에
이곳도 경성이라고 하네  

可笑伽倻子(가소가야자)
誰爲進禮君(수위진례군)
方圓八九里(방원팔구리)
是亦京城云(시역경성운)

 

 
<이학규, 경성내(京城內)>  


▲ 진례성 터. 수로왕이 그의 아들 하나를 성주로 삼고 왕궁과 태자단·첨성대를 세웠으며, 경성내라고 부른 기록이 전한다.
시에서 둘레 8~9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학규가 당시에 확인한 진례성은 성벽이 둘러쳐진 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조그마한 성의 성주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으며, 경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습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북쪽을 제외하고 무릉산(武陵山)·비음산(飛音山)·용제봉(龍蹄峯) 등의 산으로 둘러싸인 진례는, 북쪽이 산으로 남쪽이 바다로 막혀 있는 김해 시내보다 요새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더욱 유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수로가 아들을 성주로 삼고 왕궁과 첨성대 등 중요 시설을 두었다면, 그가 얼마나 이곳의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였던가를 잘 알 수 있는 근거이다. 1700년대 김해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이곳을 경성 내, 즉 서울 안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곳이 오랜 세월 마치 산성처럼 서울의 안쪽 요해처(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였던 곳임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대목이다.
 
이제 다시 김해 시내로 돌아가서 옛 가야의 흔적을 찾아보자.


관해루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산밭 보리이삭 정녕 늘어졌구나
또렷이 그해 일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방죽 따라 작은 영지로구나  

觀海樓前望海時(관해루전망해시)
山田麥穗正離離(산전맥수정리리)
分朙照見當秊事(분명조견당년사)
惟有沿隄小影池(유유연제소영지)

 

 
<이학규,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  


이학규는 시에 주를 달아 '관해루(觀海樓) 및 내외(內外) 영지(影池)는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 때의 옛 것이라고 하는데, 누각 터가 부의 서쪽 2리 높은 언덕 위에 있고, 못은 누각 터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안미정 선생은 그의 논문 <이학규의 금관죽지사·금관기속시 연구번역>에서 '관해루는 지금의 김해시 봉황동에 있었던 누정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영지(小影池)는 내영지(內影池)로 봉황동에 있었다'고 하였다. 1800년대 초 <김해읍지>에는 '내영지는 부의 문 2리에 있고 둘레는 93척이며, 외영지는 부의 남쪽 5리에 있고 둘레는 146척이다'라고 하였다. 시와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시인이 이 시를 읊을 당시에 관해루는 이미 사라져 터로 추정되는 곳만 남았고, 못은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던 못 가운데 읍성 서문의 서쪽에 있었던 내영지, 즉 서영지를 읊은 허훈(許薰·1836~1907)과 이종기(李種杞·1837∼1902)의 시가 있으니 보기로 하자. 이종기는 시에 주를 달아 '군 서쪽에 유민산(流民山·임호산)이 있는데, 험악하여서 못을 파 그 그림자를 담궜다'고 하였다. 가야 시대에 이미 비보(裨補)의 의미로 못을 팠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김해 사람들의 마음에 있어 이 못은 김해를 해롭게 하는 기운을 막는 것이었음은 틀림없었다.


거울 속 푸른 산 빛 서로 어울리니
옛 서문 밖 연못이 하나
당시 왕업은 헛된 그림자 이루었고
해지는 궁궐 터 들풀이 시들었네  

鏡裏靑峯色相移(경리청봉색상이)
古西門外一方池(고서문외일방지)
當時王業成虛影(당시왕업성허영)
落照宮墟野草衰(낙조궁허야초쇠)

 

 
<허훈, 고서영지(古西影池)>  


시인은 연못 속에 비친 주변 산 그림자에서 가락국의 창업과 멸망을 파노라마처럼 보고 있다. 가락국 왕업의 영광은 연못 속에 비친 헛된 그림자 같아 이제는 그 터에 시든 영광을 기억하는 풀만 쓸쓸히 돋아 있다.
 

연못 위 푸른 산이요 산 아래 연못
연못에 비친 산 그림자 모두가 들쑥날쑥
흥망은 산천의 일에 관계되지 않는데
공연히 뾰족한 산이 맑은 잔물결에 찍히네  

池上靑山山下池(지상청산산하지)
山光池影共參差(산광지영공참차)
興亡不係流峙事(흥망불계류치사)
枉把巑岏印淸漪(왕파찬완인청의)

 

 
<이종기, 고서영지(古西影池)>  


이종기는 그가 시의 주에서 적은 것처럼 임호산의 거센 기운을 담그기 위해 서영지를 팠다는 이야기에 충실하면서 가락국의 멸망을 노래하고 있다. 연못에 비친 산 그림자는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여도 천지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한 나라의 흥망은 인간의 일이기에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산의 기운을 못 속에 가두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제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옛날의 연지(蓮池)로 가보자. 그 옛날 연지는 순지(蓴池)라는 이름이었다. 순(蓴)은 수련(睡蓮) 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수초인 순채(蓴菜)로 연꽃이 피는 못 연지는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송이송이 연꽃이 얕은 잔물결에 솟아 
어여쁜 붉은 꽃 담백하니 서시를 취하게 하네 
오나라 궁궐 고운 수는 지금 어디에 있나 
연못은 사라져버리고 모란이 경국지색이로다   

柄柄荷花出淺漪(병병하화출천의)
嬌紅淡白醉西施(교홍담백취서시)
吳宮綺繡今安在(오궁기수금안재)
廢澤空淪國色姿(폐택공륜국색자)

 

 
<허훈, 제칠완정(題七翫亭) 순지하화(蓴池荷花)>  


▲ 1800년대 초 김해 지도. 읍성의 서문 쪽 수로왕릉 아래로 외영지(外影池), 동남쪽으로 내영지(內影池), 다시 서북쪽으로 순지(蓴池)가 보인다. 그 옆으로 유민산(流民山·임호산)이 있으니, 관해루가 있었던 위치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순지(蓴池)는 부 서북쪽 6리 지점에 있다'고 한다. 이 시는 구산동(龜山洞)과 주촌면(酒村面) 원지리(元支里) 사이에 있는 경운산(慶雲山·운점산 雲岾山)에 있던 허훈 집안의 정자 칠완정에서 읊은 것이다. 이릉양류(二陵楊柳·김수로왕과 허왕후릉의 버들), 순지하화(蓴池荷花·순지의 연꽃), 구봉낙조(龜峯落照·구지봉의 저녁놀), 고도성시(故都城市·옛 가락국성의 저자), 삼차귀범(三叉歸帆·삼차강으로 돌아오는 배), 칠점선대(七點仙臺·칠점산 신선의 대), 죽도어화(竹島漁火·죽도의 고깃배 불) 등 일곱 수다. 모두 경운산에서 가까운 김해 시내로부터 멀리 낙동강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읊은 것이다. 그 가운데 이 시는 순지를 읊은 것으로 시각적으로 보면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러니 연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눈에 쏙 들어왔던 듯 표현하였던 것이리라. 시인은 순지의 아름다움을 중국 최고의 미인 가운데 하나인 오나라의 서시(西施)가 흠뻑 취하도록 만들 정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말에는 순지가 상당히 황폐해졌던 듯 그는 그 아름답던 연꽃은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다.
 
다음은 다전리(茶田里·차밭) 쪽으로 발길을 잡는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 옛날 차밭의 추억이 남아 있고, 저 위 분산(盆山) 자락에는 차 군락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제 시를 따라 250여 년 전의 그곳으로 가보자.


열 집에 아홉은 우물 맛이 짭짜름하고 
으뜸이라 차밭만은 기미가 좋을시고 
내지는 해마다 삼월이라 가뭄 들면 
두레박으로 옛 동쪽 언덕 물을 준다오    

十家九井水如鹺(십가구정수여차)
第一茶田氣味和(제일다전기미화)
內地秊秊三月旱(내지연년삼월한)
桔槹澆滿舊東陂(길고요만구동피)

 

 
<이학규,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  


시인은 주를 달아 '다전은 부의 성 동쪽 2리에 있다. 샘이 아주 달콤하고 차다. 고을 사람들은 평평한 곳을 포지(浦地), 높은 평지를 내지(內地)라고 한다'고 하였다. 바닷가라 물은 짭짜름하여도 지금 김해의 특산품이랄 수 있는 짭짜리 토마토처럼 당시 차 맛 또한 이 물의 영향으로 일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는 김해 전통차를 한 번도 맛보지 못하여 이학규가 시에서 읊은 차의 맛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만나는 김해 사람들마다 차 자랑을 하는 통에 이제는 맛보지 않아도 그 맛을 훤히 알 듯하다. 그래도 기회가 닿으면 실제로 맛을 보고 싶기는 하다.
 
마지막으로 고조산(顧祖山)의 타고봉(打 峯)을 읊은 시를 감상해보자.


높은 봉우리가 왜놈 가로막고 
북 울린 게 어느 해였던가 
빙 두른 담엔 봄 나무가 자라고 
황폐한 대에는 저녁 안개 가렸네 
지금 산 구릉 안은 
이끼 꽃이 짙푸르게 묻었네    

高峯障東倭(고봉장동왜)
打鼓何秊歲(타고하년세)
繚垣春樹生(요원춘수생)
荒臺夕霧翳(황대석무예)
祗今山阿中(지금산아중)
苔花綠沈瘞(태화녹침예)

 

 
<이학규, 금주부성고적십이수 증이약소(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 타고봉(打鼔峯)>  


이학규는 시에 주를 달아 '타고성(打鼓城)은 고조산에 있는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다'라고 하였다. 고조산은 분산의 지맥이 힘차게 내리뻗다가 왼쪽으로 자리를 잡아 바다와 맞닿으면서 시내 쪽을 획 돌아보는 형국이다. 이곳은 고조산보다는 주로 남산(南山)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의 꼭대기는 오랜 세월 타고봉, 즉 북을 두드려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우리로 불려왔다. 그러나 시에서 보듯 이 봉우리는 이학규가 시를 읊을 당시에는 봉수대로서의 역할이 끝나고 방치되어, 잡나무가 우거지고 바위마다 이끼가 덮인 황폐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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