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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왕자를 불가에 귀의시키소서"…"그것이 정녕 부처님의 뜻이라면 받들겠나이다"(12) 장유화상과 칠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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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4.02.11 12:08
  • 호수 160
  • 12면
  •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kkim40@hanafos.com)

   
▲ 불모산 중턱에 있는 장유사 전경.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왕후와 함께 가락국으로 건너온 장유화상이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1
때는 서기 97년의 어느 봄날. 수로왕이 구야라는 땅에 대가락국을 세운지도 벌써 오십년의 세월이 흐른 날이었다.
 
가락국에서 서쪽으로 백 리도 넘는 길에 웅장하게 솟은 산이 하나 있었으니, 이름하여 지리산이었다. 그 지리산 자락 아래에 작은 궁궐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궁궐은 누군가의 임시 거처인양 급하게 만든 흔적이 역력했다.
 
궁궐 한쪽에 마련된 호젓한 마당.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여인이 귀티 나는 품새로 마당가를 서성거렸다. 고개를 숙인 여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두 귀에 달린 옥색 귀고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허왕후는 가끔 고개를 들어 궁궐 남쪽에 자리 잡은 웅장한 산을 쳐다보았다. 가끔 종달새가 포르르 날갯짓을 하며 풀숲에서 날아올랐다. 꽃다운 나이에 인연의 강을 건너 아유타국에서 온 여인. 어느덧 왕비는 열 명의 자녀를 둔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가끔 지리산에서 따듯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따라 벚꽃과 복사꽃이 하얗고 붉은 꽃잎을 마당에 뿌렸다. 왕비는 옆에 선 시녀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추향은 아직 소식이 없는가?"
 
허왕후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추향이 숨을 헐떡이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와, 왕비마마, 다녀왔나이다."
"그래, 내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저. 그, 그게."
"왜 그리 망설이는가? 그럼 오늘도 내 아들들을 볼 수 없다고 하던가?"
"장유화상께서는 아직 때가 안 되었다고…."

순간, 허왕후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기다리라고? 또 뭘 기다리란 말인가? 여태껏 기다렸으면 됐지."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수정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당황한 추향은 얼른 비단보를 꺼내 옥루(玉淚)를 받아내었다.

"왕비, 과히 염려치 마시오."

마당 한쪽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식을 들었는지 수로왕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섰다.

"제 심장이 타들어가나이다. 대체 오라버니께서는 왜 이러시는지."
"우리 일곱 아들들을 진정한 생불로 만들려는 의도 아니겠소?"

수로왕은 온화한 미소로 허왕후를 굽어보았다. 그러나 허왕후는 아리따운 아미에 패인 주름을 여전히 풀지 않은 채 숙연한 기운을 품고 있는 지리산을 쳐다보았다. 수로왕은 그런 허왕후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복사꽃과 벚꽃은 여전히 호젓한 마당가에 날리고 있었다.
 

#2
   
▲ 장유사 삼성각에 모셔진 장유화상 탱화.
그때가 벌써 오십년 전이었다.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수만 리 바닷길을 헤쳐 금관국에 도착한 때가. 천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허왕후는 하늘이 명한 인연을 따라 아유타국에서 기별포로 왔었다.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은 아유타국에서도 소문난 수행가였다. 원래는 아유타국의 왕위를 계승할 몸이었다. 허나 부처님의 뜻을 받들기로 결심하고 모든 세속의 욕망을 끊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유타국을 떠나기 달포 전, 장유화상은 부왕께 청을 넣어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머나먼 땅에 전하겠다는 비원을 품에 안은 것이다.
 
"허, 네 뜻이 가상하구나. 너의 동행을 허락하마."
"윤허의 높은 뜻을 새겨 불국토의 진리를 전하겠나이다."

장유화상은 메마른 몸매를 추스르며 부왕께 깊은 합장을 올렸다.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는 수도자의 세월. 몸매는 바싹 마르고 얼굴은 파리했지만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장유화상이었다.
 
두 남매가 기별포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은 가락국 사람들이 횃불로 장유화상과 허왕후의 배를 인도했다. 그들이 탄 배가 차츰 가락국의 포구로 들어설 즈음 긴 속눈썹을 가진 허왕후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미래의 낭군을 마음 속에 그렸다. 허왕후는 비달치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으로 나아갔다.
 
장유화상은 허왕후의 가마를 봉황대 궁궐로 인도했다. 연도에는 수많은 가락국 사람들이 몰려나와 장장 이만 오천 리의 머나먼 길을 건너온 두 남매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가락국에 당도한 장유화상은 본격적으로 금관국에 불법을 전파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아유타국의 문장인 쌍어문양을 봉황대 궁궐 곳곳에 새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강경을 비롯한 불교 경전을 가락국 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락국에 가람을 세우고 싶었다. 장유화상은 가락국 곳곳에 산재한 신령스런 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장유화상은 신의 물고기가 노닌다는 신어산을 가람터로 결정하였다.
 
그날 이후로 신어산 깊숙한 곳에 있는 숲속에서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장유화상의 주도 하에 금관국 최초의 가람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림사라고 명명된 가람이 세워지는 동안 허왕후는 첫째인 거등왕자를 시작으로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장유화상은 행복했다. 동생인 허왕후와 함께 머나먼 아유타국을 떠나 물설고 낯선 땅에 왔지만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비원이 하나 있었다. 대가락국이 진정한 불심의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천손의 자손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오롯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천손의 자손들이 성불하면 그 자리에 일곱 부처를 모시는 가람을 세우고자 했다. 장유화상은 땅에 꽂아둔 석장을 쑥 뽑아들고 성큼성큼 봉황대 궁궐로 걸어갔다.
 

#3
"어서 오시오, 대사. 참 오랜만에 뵈오이다."
"예. 그간 대왕께서도 평안하셨나이까?"
"참, 오라버니도. 자주 찾아오시지."
"그래, 대사께서 비원이 있다고요?"

   
▲ 장유화상 순적비와 사리탑.
허왕후는 섬섬옥수 긴 손을 비단 치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간, 장유화상은 움찔했다. 조금 있으면 저 미소가 슬픔으로 변할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가슴이 아팠다.

"저의 비원은 우리 금관국이 부처님의 나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어서 말씀해 보시오."
"대왕이시여. 부디 우리 왕비의 대가 이어지도록 둘째와 셋째 왕자로 하여금 허씨 성을 따르도록 윤허하소서."
"일전에 왕비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그리 조치하리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명의 왕자를 불가에 귀의시키소서."

갑작스런 장유화상의 말에 허왕후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해갔다.

"이제 가락국은 반석 위에 올라선 나라입니다. 이 반석을 더 튼튼히 하고 부처님의 진리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천손의 자손들이 불법에 귀의해야 합니다."
"오, 오라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우리 아들들을 출가시키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왕비시여."

장유화상은 이 말을 끝으로 긴 침묵을 지켰다. 그건 수로왕과 허왕후도 마찬가지였다. 봉황대 내전 깊숙한 곳에 서서히 어둠이 몰려왔다. 수로왕은 먼저 왕비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오라버니. 그것도 인연인가요?"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허왕후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우리 오누이가 천손의 땅에 온 것도, 제가 이 땅에 부처님의 나라를 세운 것도, 그리고 일곱 왕자가 불법에 귀의하는 것도 모두 인연이지요."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산들바람이 가볍게 불어오는 초봄의 어느 날이었다. 장유화상은 수로왕과 허왕후의 전송을 받으며 일곱 왕자와 함께 가야산으로 떠나게 되었다. 허왕후는 옥루를 흘리며 아들들의 손을 놓지 못했다. 일곱 왕자는 부처님의 진리를 이 땅에 전하겠다는 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로부터 삼 년이 흘렀다. 허왕후는 아들들이 너무나 그리워 추향을 데리고 가야산으로 찾아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아들들을 만난 허왕후는 옥루를 흘리며 아들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후, 허왕후는 자주 가야산을 찾아갔다. 허왕후는 가야산을 찾을 때마다 수많은 음식과 의복을 가져갔으며 하루나 이틀을 머물다 가곤 했다. 그러나 그를 지켜본 장유화상의 맘은 편치 않았다. 불법의 도를 닦는 데에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속세의 인연이었다. 모자지간의 정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만 허왕후가 자주 찾아오는 것은 문제였다. 결국 그는 일곱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허왕후는 장유화상의 결정이 못내 서운했지만 그 모두가 가락국을 위한 일이라 참기로 했다. 그러나 가슴 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의 정은 어쩌지 못했다.
 

#4
복사꽃 날리는 마당가에서 허왕후는 여전히 서성거렸다. 범왕리 행궁에 머무른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수로왕은 가락국의 정사를 처리하기 위해 봉황대 궁궐로 돌아간 상태였다. 장유화상의 거절로 인해 아들들을 만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근심으로 지새운 그녀였다. 단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아들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일곱 왕자가 장유화상을 따라 불가에 귀의한 지도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왕비시여, 바람이 찹니다. 이만 안으로 드심이…."
"아니다. 추향아. 내 이번에는 아들들을 기어코 만나야겠다. 채비를 차려라."

   
▲ 지리산 쌍계사 인근에 있는 칠불사(암).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6년 동안 일심정진해 성불한 곳이라고 한다.
허왕후는 추향과 시종들을 거느리고 장유화상이 기거하고 있는 지리산으로 향했다. 산문 근처에는 해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산자락에서는 맑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허왕후가 산문에 도착하니 어디선가 종달새들이 날아와 지저귀고 있었다. 그녀는 예감이 좋았다. 오늘은 아들들을 만날 수 있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허왕후 일행이 산문을 지나 암자에 도착하니 이상하게도 묘한 정적이 흘렀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엄청나게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암자 입구에는 장유화상이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석장을 짚고 의연히 서 있었다. 장유화상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들들을 만나러 올 때마다 인상을 구기며 험악한 표정을 짓던 오라버니가 왜 저리 밝은 웃음을 짓는지.

"어서 오시오. 왕비시여. 내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오라버니. 오늘은 어인 일로 소녀를 홀대하지 않으십니까? 혹시…."
"허허. 이제야 모든 일이 풀렸소이다. 저 아래 천비연으로 가보시오."

이 말을 끝으로 장유화상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회색 석장만이 땅에 꽂혀 있었다. 허왕후는 급히 추향과 함께 암자 아래 천비연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연못에 당도하니 금빛 찬란한 빛깔들이 온 연못을 감싸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득한 향훈이 밀려왔고, 푸른 물안개가 연못 한 가운데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왕후와 추향은 온몸을 덮쳐오는 묘려한 기운에 잠시 몸을 떨었다. 그녀들이 연못 한 가운데를 유심히 살펴보자 연못 한 가운데서 조용히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그 파문 사이로 쌍무지개가 길게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아, 그 무지개를 타고 허왕후의 일곱 왕자가 차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모두 황금색 가사를 걸치고 얼굴 뒤로 후광을 가진 왕자들이었다. 마침내 허왕후의 일곱 왕자가 성불했던 것이다.

허왕후는 쌍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곱 왕자를 황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일곱 왕자들 역시 허왕후를 보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어머니, 저희들은 마침내 성불하였나이다. 이 모두가 어머님의 정성 때문입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셔서 후생에 저희와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허왕후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두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조용히 나무아미타불을 외기 시작했다.

허왕후와 시종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동안, 일곱 왕자는 쌍무지개 너머로 차츰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잉어 두 마리가 붉은 빛을 반짝이며 무지개를 타고 있었다.

장유화상은 멀리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흰 수염은 바람에 흩날렸다. 천손의 자손들이 성불한 곳에 일곱 부처를 모시는 칠불암을 세우게 된 것이 그는 무엇보다 기뻤다. 어디선가 복사꽃이 천비연 주변에 날리고 있었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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