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사찰에는 탱화가 걸려 있다. 탱화는 부처님과 불교신앙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일본이나 중국 등지의 사찰에서는 탱화를 보기 힘들다. 탱화와 비슷한 개념의 불화(佛畵)가 있긴 하지만, 탱화처럼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거나, 불상의 뒷벽에 거는 후불탱화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는 않는다. 탱화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불심의 표현이다. 우리나라의 탱화는 삼국시대 때부터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의 탱화는 그 기법이나 예술적 측면에서 빼어난 수준을 보였다. 봉황동에서 탱화를 그리고 있는 박영주(44) 씨의 작업공간을 찾아가 보았다.

"저는 아직 신문에 소개될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기자가 전화를 걸었을 때 박영주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아직 공부를 더 해야 하고, 모자란 점이 많다며 손사래를 치는 그를 설득한 이는 불상조각가 정봉환 씨(김해뉴스 2013년 11월 13일자 10면 보도)였다. 함께 불교미술을 하는 선배의 말에 용기를 낸 박영주를 마침내 만났다.
 

▲ 청을 그리고 있는 박영주 씨 뒤로 현재 조성 중인 먹탱화가 보인다. 검은 바탕 위에 금물로 그린 신중탱화이다.

광고회사 다니던 어느날 마주한 탱화
디자인과 통하는 부분에 이끌려 입문
그림의 차원 넘어선 종교와 마음 그려

탱화 인물 묘사 위해 수천장 그림 반복
부산·진해·청도 사찰 등에 작품 걸려
김해공예협회전에 '관음의 미소' 출품
전통불화에 현대적 감각 가미 시도 꿈


그의 작업공간은 봉황동 백조아파트 상가 건물 1층에 있다. 백조반점 옆에 간판도 없이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무리 작업중인 적탱화(붉은 바탕에 금물로 그린 탱화), 먹탱화(검은 바탕에 금물로 그린 탱화)가 벽면 두 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박영주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태어났다. 6세 때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회사를 다녔다. "광고회사와는 잘 맞지 않았어요. 힘들어하며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 탱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회사의 모집광고를 보았어요. 인연이었나 봐요."
 
사실 그에게서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절에도 자주 다녔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고백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림을 그린 적이 없어요. 절에도 가본 적이 없고요. 학창시절의 친구들은 탱화를 그리고 있는 저를 보고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답니다."
 
그는 정녕 불가와 인연이 없었던 것일까. 그는 꿈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광고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 꿈을 꾸었어요. 저는 꿈속에서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했는데, 광고회사와는 왠지 맞지 않았고, 그러던 차에  그림을 그리면서 살 수 있다는 마음을 먹는 꿈을 꾸었죠. 그 꿈을 꾼 뒤 탱화 회사의 모집광고를 보게 됐어요. 부산 범일동에서 탱화를 비롯한 불교미술작품을 만들어 사찰에 납품하는 회사였어요. 그 회사에 가서 탱화를 처음 보았는데, 굉장히 끌렸지요. 그리고 싶다,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탱화가 어떤 면에서는 디자인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처음 탱화를 시작한 것이 25세 때였어요. 10년 정도 그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역시나 인연의 실은 그의 손끝에 매어 있었던 것이다.
 

▲ '2013 김해공예협회전'에 출품했던 '관음의 미소'.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움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미술품을 납품하고 안장하는 동료직원들을 따라 강원도 횡성에 있는 한 사찰을 방문했다. "그 절이 제가 태어나서 처음 가본 절이었습니다. 절이란 곳엘 처음 가 보았으니 몸가짐을 어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몸도 마음도 너무 편안했습니다. 본래 무교였지만, 탱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불심도 깊어졌지요. 제가 비로소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탱화는 저를 살아있게 하는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10년 정도 회사를 다니는 동안 불교미술을 하는 동료들도 많이 만났다. "그분들이 주로 김해와 대동면, 부산 강서구의 대저 등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탱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김해의 한 회사로 옮겨왔어요. 그리고 3년 전쯤 독립해서 봉황동 이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매일 오전 9시면 봉황동 작업공간의 문을 연다. 향을 피우고, 초를 켜고 반야심경을 암송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힌 다음 붓을 든다. "일을 맡게 되면 끝날 때까지 예민해집니다. 온 마음과 신경이 집중되지요. 일을 맡겨준 사찰에도, 스님께도, 신자들께도 한 점 죄송스러움 없이 잘 그려야 한다는 마음밖에 없어요. 작품을 법당에 안장하고 나서도 더 열심히 그려야한다는 마음을 늘 가지면서 다음 탱화를 준비합니다."
 
그는 그 과정이 한없이 신중해지고 경건해지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일을 맡아 막 배접을 끝낸 빈 화폭을 마련한 어느 날이었어요. 탱화를 맡겨준 그 사찰을 다니는 신자 한 분이 이곳까지 찾아오셨더군요.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는지 그것만 해도 놀라웠는데, 그분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화폭을 향해 정성을 다해 절을 하시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한창 작업 중일 때 찾아오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탱화의 바탕은 서양화의 캔버스와는 많이 다르다. 목수들이 짠 목판 위에 배접지를 먼저 붙인다. 그 위에 결이 촘촘하고 고운 면을 붙이고 '아교포수'를 한다. 아교로 바탕천을 코팅하는 과정이다. 물감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아교포수가 끝나면 초안을 그린다.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한다. 채색할 때는 오방색을 사용하고, 적탱화나 먹탱화를 그릴 때는 금물로 그린다.
 
탱화는 그림의 내용에 따라 종류가 나뉘어지는데,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후불탱화後佛幀畵)와 신중탱화(神衆幀畵)이다. 후불탱화는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던 때의 광경이나 화엄경의 내용을 묘사한 것으로, 불상을 모신 상단 뒤에 걸어두는 탱화이다. 가운데 모시는 주존불(主尊佛)이 무엇이냐에 따라 주존불을 모시는 좌우의 협시보살(脇侍菩薩)도 달라진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을,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을,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약사여래불을 보좌한다.
 
신중탱화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을 그린 것으로, 법당의 중심부에서 좌우측 벽에 봉안된다. 신중탱화에 나오는 많은 호법신들은 우리나라 재래의 신들이 많다. 쉽게 말해 탱화에 그려지는 인물은 주존불 외에도 수 십 명이다. 이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다.
 
"한 인물을 제대로 그리려면, 그 인물만 천장 이상을 그려야 합니다. 평생 습작을 한다고 생각해야죠, 수만 장, 수십만 장을 그려야 하는 거죠. 저 역시 지금도 계속 그리고 또 그리고 있습니다."
 
박영주의 탱화작품들은 김해 주변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부산 가락의 용적사, 경남 진해의 송림사, 경북 청도의 죽림정사에 그의 탱화가 걸려 있다.
 
불교에 관한 지식이 많다면 탱화를 좀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작업공간 안을 둘러보다가 조금 더 쉽게 와닿는 그림을 발견했다. '2013 김해공예협회전'에 출품한 그림 '관음의 미소'였다. 그림을 보니 넓은 연잎 위에 앉은 관세음보살이 연꽃을 든 채 한없이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아래로 한 여인이 마음을 다해 기원을 올리고 있었다.
 
"저 여인의 모습에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제가 그리는 그림은 그냥 그림이 아닙니다. 종교이고, 마음이지요. 그림을 그리면서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새 밤이 지나 새벽이 찾아올 때도 있고, 잠이 들면 꿈에서도 탱화가 보입니다."
 
그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선배들에 비하면 저는 아직 많이 미흡합니다. 더 열심히 그려야지요. 전통불화에 현대적 감각이 가미된 작품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경전을 더 읽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알아야 합니다."

 


≫ 박영주

김해공예협회 회원.
문화재수리 기능 4996호.
용적사 후불탱화 조성, 죽림정사 후불탱화 조성, 관음정사 신중탱화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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