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면 병동리 어병마을로 향하는 길을 따라 도랑이 길게 이어져 있다. 도랑 옆에 심어진 창포는 축 늘어져 누렇게 변했고, 도랑 곳곳에는 살얼음이 동동 떠다닌다. 도랑 인근에 세워진 표지판에는 '어병마을 도랑 살리기 빨래터 복원'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야무지게 머리를 묶고 하얀 저고리를 여민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 방망이를 두드렸던 곳. 힘든 시집살이의 부담을 수다로 풀어냈을 아낙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 어병마을 한가운데에는 200년 넘은 당산나무가 우뚝 선 채 마을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다.

고려 충렬왕, 충신 김관에 두 자락 하사
마을 역사 최소 700~800년 이상 추정
 200년 넘은 당산나무·복원 빨래터 자랑
산업단지 예정돼 주민들 난개발 큰 걱정


어병마을 송유백(60) 이장은 "어병마을 유래에 잘 아는 분"이라며 김종성(67) 씨를 소개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 씨는 "할아버지를 취재하러 와 줘서 고맙다"며 반갑게 맞이했다.
 
김 씨는 "어병(御屛)'이라는 동네 이름이 지어진 건 700여 년 전인 고려 25대 충렬왕(1274~1308) 때"라고 설명했다. 충렬왕 때 어병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뒤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던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관(1250~1345)으로 김유신(595~673)의 13대 손이다. 유학을 숭상한 인물로 문서를 꾸미는 일을 보던 한림원과 중앙행정관청인 판도사 등에서 근무했다. 충렬왕은 김관의 충직함을 인정해 그를 독려하고자 병풍 두 자락을 하사했다. 그 후로 김관이 사는 마을은 '임금이 병풍을 하사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어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변 지역에도 같은 뜻인 '병동(屛洞)'이라는 이름이 붙어 병동리로 불리게 됐다.
 
▲ 마을주민들이 지금도 활용하는 빨래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병마을 노인회 지충규(72) 총무는 "어릴 적 어르신들로부터 어사가 병풍을 주고 갔다고 해서 어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들었지. 이런 이야기가 있는 줄 몰랐네"라며 귀를 기울였다. 김 씨는 "충렬왕 때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은 700~800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돼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꽃다운 나이인 19세에 어병마을로 시집 와 평생을 살고 있다는 김기선(82·여) 씨는 "우리 동네는 양반동네였어. 김해 김씨, 창녕 조씨, 충주 송씨, 밀양 박씨 등 네 성씨가 모여 살았지. 워낙 사람도 많고 인심이 좋아서 어병에 산다면 다들 부러워했어"라고 자랑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어병마을은 홍수, 태풍 등 자연재해에 크게 시달리지 않으면서 지내왔다. 마을 사람들은 벼농사를 하거나 과수원 등을 운영하며 마을을 지켜왔다. 재해가 없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집안의 잔치나 제사가 있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은 모여 음식과 정을 나눴다. 송 이장은 "마을회관 자리에는 50년 전까지 야학교가 있었다. 1989년 기사년에 문을 닫았다. 그 건물에 소가 돌며 방아를 찧는 돌방아가 만들어졌다. 마을회관 앞 공터는 당시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고 회상했다.
 
▲ 평화로운 어병마을의 풍경.

마을 입구에서 봤던 빨래터 이야기를 꺼냈다.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빨래터로 쓰고 있다"며 자랑했다. 어병마을 도랑은 화포천 11개 지류 가운데 무릉천의 최상류에 있다. 3년 전 '화포천 환경지킴이'와 진행한 도랑 정화 활동을 통해 빨래터를 되살렸다고 한다. 송 이장의 안내에 따라 가본 빨래터에는 시멘트가 깔려 있었다. 송 이장은 "2011년 제1회 우리 마을 도랑살리기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아 상금을 타서 도랑 살리기에 재투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빨래터에 서서 동네를 돌아보니 멀리 당산나무 하나가 보였다. 송 이장은 200년이 넘은 당산나무라며 그 곳으로 안내했다. 마을 중심에 자리 잡은 당산나무에서 보는 마을은 평화로웠다. 당산나무는 마을의 희노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래 지켜봐 온 산 증인이었다. 송 이장은 "수십 년 전 만 해도 사람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마을이었다. 당산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내기도 했다. 빈집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당산제 때 마을 사람들이 어울리던 풍경은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어병마을에는 400명이 넘게 살았다. 병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면서 지금은 주민 수가 10분의 1로 줄어버렸다. 게다가 10년 전부터 조금씩 공장이 들어오더니 마을 입구는 아예 공단으로 변했다. 마을 앞에 자리 잡은 병동농공단지에는 자동차 부품, 기계전자 등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세워져 있다. 앞으로 마을 인근에 명동일반산업단지, 병동일반산업단지 등 2개의 산업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송 이장은 "더이상 산업단지 등 난개발이 이뤄지지 않으면 좋겠다"며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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