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산성과 만장대. 고려 장군 박위가 옛 산성을 수축했고 조선시대 김해부사 정현석이 분산성을 개축해 전체 둘레가 1560척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산성의 정상인 만장대에 서면 김해시내는 물론이고, 김해평야와 낙동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김병찬 기자 kbc@
고려 장군 박위가 왜적 방어용 산성 수축
조선시대 김해부사 정현석이 개축
둘레 1560척에 성안 마르지 않는 우물 둘

봉수대인 만장대 해발 323m에 위치
김해평야와 낙동강·동래·양산까지 조망
해질녘 누각서 바라본 김해는 천하요새
정몽주 '김해산성기'·허훈 시 여덟 수 전해


▲ 봉수대인 만장대. 해발 323m에 위치해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김해읍지> 등을 종합해 보면, 분산(盆山)은 부 북쪽 3리 지점에 있으며 김해의 진산(鎭山)이다. 여기에 분산성(盆山城)이 있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560척이었다. 지금은 모두 무너졌고 봉수대를 두었다. 성안에 우물 둘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나 마르지 않는다. 이 기록으로 보아 조선조의 대부분 시기 봉수대인 만장대(萬丈臺)가 중요한 군사시설이었지, 분산성은 거의 황폐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 연간인 1871년에 다시 수축을 하였으니, 오히려 조선조 말에야 성이 모양을 제대로 갖추었던 것이다.
 
고대 국가 시기에 쌓았던 이 산성은 고려 우왕 때 다시 제대로 쌓는다.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이를 축하하고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를 썼다. 그 내용을 보면 '박위(朴 ·?~1398)가 옛 산성을 수축하여 넓히고 키우게 하였다. 돌을 쌓아 굳히고 산을 따라 높였는데, 일이 끝나고 밑에서 바라보니 성벽이 천 길이나 높이 서서 한 사람이 문을 담당하더라도 만 사람이 열 수 없도록 되었다. 장차 김해의 백성으로 하여금 평소에 무사하면 산에서 내려와 농사를 짓게 하고, 봉수(烽燧)를 보면 처자를 거두어 성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베개를 높이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분산성은 새로 수축을 하여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자랑하고 있으며, 봉수대인 만장대 또한 잘 단장되어 있다.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은 성이 수축되고 난 뒤 김해를 찾아 당시의 분산성을 여덟 수의 시로 읊었다. 이 가운데 당시 성의 모습과 역사적 사실을 잘 담고 있는 몇 수를 감상해 보도록 하자.


신발 밑에 만 리의 바람 부니 
쓸쓸한 나뭇잎 저 허공에 떨어지네 
거등왕 한 조각 돌은 강물 소리 속에 
서복의 푸른 산은 희뿌연 안개 속에 
하늘과 땅은 동남쪽으로 형세 넓으니 
간성의 뛰어난 꾀 예나 지금 한 가지 
떠도는 인생 밝은 해에 날개 돋은 듯 
구슬 궁궐 은대까지 소식 통하겠네   

舃底吹回萬里風(석저취회만리풍)
蕭蕭木葉下長空(소소목엽하장공)
居登片石江聲裏(거등편석강성리)
徐福靑山霧氣中(서복청산무기중)
天地東南形勢曠(천지동남형세광)
干城籌策古今同(간성주책고금동)
浮生白日如生翰(부생백일여생한)
瓊闕銀臺信息通(경궐은대신식통)

 

 
 
▲ 산의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
허훈은 시에 주를 달아 '고려 장군 박위가 여기에 성을 쌓았는데, 우리 조정에서 버려두고 고치지 않았다. 사또 정현석(鄭顯奭·1817~1899)이 남은 터를 따라 새로 쌓고 관청 건물을 갖추고 군교(軍校)를 두어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라고 하였다. 정현석은 1870년 김해부사로 와서 1871년까지 분산성을 수축하였다. 세 번째 구절 거등왕의 한 조각 돌은 초현대를, 네 번째 구절의 서복(徐福)은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사자로 불로초를 찾아 나섰다는 전설의 인물이며, 푸른 산은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러 살았다고 알려진 일본을 말한다. 그리고 여섯 번째 구절의 간성은 고려 장군 박위와 김해부사 정현석이며, 마지막 구절의 은대(銀臺)는 승정원(承政院)의 별칭이다. 시인은 분산성에서 바라보는 동남쪽의 탁 트인 풍광과, 이 성을 이루어낸 두 인물의 공적을 노래하고 있다.


아득한 봉우리 꼭대기 광막한 바람
허공에 흐르나니 징과 피리 소리
누대는 하늘 위로 높이 솟았고
일월은 중생들 속을 낮게 배회한다
살마주 축주 봉우리 외로운 새 가라앉고
동래 양산 만호가 점점이 연기와 한 가지
오창의 백마가 천 년이 흐른 뒤
오늘 날 아득하게 눈앞이 열린다  

縹緲峯頭曠漠風(표묘봉두광막풍)
雲璈象管響流空(운오상관향류공)
樓臺高出三淸上(누대고출삼청상)
日月低回九道中(일월저회구도중)
薩筑羣巒孤鳥沒(살축군만고조몰)
萊梁萬戶點煙同(내량만호점연동)
吳閶白馬千秋後(오창백마천추후)
此日悠悠眼力通(차일유유안력통)

 

 
 
▲ 분산성 안쪽으로 통하는 입구.
두 번째 구절의 운오(雲 )는 원(元)나라 때 궁중에서 쓰던 구리로 만든 조그만 징으로, 열세 개의 작은 징을 자루가 긴 틀에 달고 쳤다. 여기서는 분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경계하는 악기 소리를 비유한 것이다.
 
네 번째 구절의 구도(九道)는 구류(九類)와 같은 말로 난생(卵生)·태생(胎生)·습생(濕生)·화생(化生)·유색(有色)·무색(無色)·유상(有想)·무상(無想)·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등 아홉 종류의 중생으로 여기서는 분산성에서 내려다본 김해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다섯 번째 구절의 살축(薩筑)은 일본 구주(九州)에 있는 살마주(薩摩州)와 축주(筑州), 여섯 번째 구절의 내량(萊梁)은 동래(東萊)와 양산(梁山)이다. 일곱 번째 구절의 오창(吳 )은 중국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성의 서북문인 창문( 門)으로 보인다. 이 문은 춘추시대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세운 것으로 서쪽 지역에 대운하가 있고, 서북쪽문인 창문은 상업 지역의 핵으로 발달했다. 여기서는 김해의 자연과 번화한 삶을 비유한 것이다. 분산성에 선 시인의 시야에는 가까이 김해의 자연과 삶의 모습이, 왼쪽으로는 낙동강 건너 동래와 양산의 모습이, 멀리로는 일본 동부의 구주가 들어오고 있다.


한번 휘파람에 오르니 바람에 떨어지는 기러기
돌아보니 저 아래 세계가 허공으로 바뀌었네
석양 속 흐르는 강물은 허리띠 같고
안개 속 나무 빛은 부들과 같구나
여기부터 온갖 형상이 다를 바 없어
평지와 비교하자니 서로 같지 않구나
여기 오니 비로소 기이한 곳이라 할 것 있네
인간 세상이 멀리멀리 열려있구나  

一嘯登臨落鴈風(일소등림낙안풍)
回看下界轉成空(회간하계전성공)
江流似帶斜陽裏(강류사대사양리)
樹色如萍斷靄中(수색여평단애중)
自是衆形無所異(자시중형무소이)
較諸平地不相同(교제평지불상동)
此來始有叫奇處(차래시유규기처)
南贍之洲遠遠通(남섬지주원원통)

 

 
 
분산성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주변의 풍경을 읊은 것이다. 마지막 구절의 남섬(南贍)은 불교 용어인 남염부제(南閻浮提)의 준말로, 수미산(須彌山) 사대주(四大洲)의 남주(南洲)에 있기 때문에 이름 붙었다고 한다. 남염부주(南閻浮洲) 혹은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원래는 인도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도 평지와는 다른 분산성에서 내려다본 세계, 즉 김해를 뜻한다.

취해 높은 누각에 기대니 초목에 바람 일고
대륙으로 눈 옮기니 석양이 하늘에 떴네
넓고 아득한 세계 더 이상 밖이 없으니
때때로 영웅이 이 속에서 늙는다
땅은 긴 강으로 문호가 만들어졌고
하늘엔 늘어선 날카로운 산 칼날 같구나
두남 한 점이 평안히 불타오르니
천리 떨어진 서울에 밤마다 통하네  

醉倚高樓草木風(취의고루초목풍)
流眸大陸夕陽空(유모대륙석양공)
茫茫世界無餘外(망망세계무여외)
往往英雄老此中(왕왕영웅노차중)
地以長江門戶作(지이장강문호작)
天留列嶂劒鋩同(천류열장검망동)
斗南一點平安火(두남일점평안화)
千里京師夜夜通(천리경사야야통)

 

 
 
해질녘 분산성 누각에서 바라본 김해를 천하의 요새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주로 주변의 방어선인 산과 평야를 묘사했다. 일곱 번째 구절의 두남(斗南)은 남두성(南斗星)으로 인간의 삶을 관장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남쪽 하늘에 뜬 저녁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남쪽의 별빛이 결국은 서울까지 통하여 나라를 지키는 빛이 되리라는 표현이다.

연오의 큰 문장이 굳센 바람 일으키더니
이에 의지하여 천년동안 산이 비지 않았네
벼랑 위 쇠뇌 활은 저 아래를 막아내었고
층층의 봉우리엔 군량과 갑옷 감추었네
꽂혀진 산 베어진 솔은 검은 원숭이 같고
구름 걷힌 성가퀴 흰 무지개 같구나
김해의 단단한 진영 천혜의 험요 더하였고
만장의 높은 대는 사방을 압도한다네
 

延烏大筆動勍風(연오대필동경풍)
藉此千秋山不空(자차천추산불공)
陡壁礟弓堪禦下(두벽포궁감어하)
層峯糧鎧可藏中(층봉양개가장중)
倒嶂槎松玄玃似(도장사송현확사)
排雲粉堞素霓同(배운분첩소예동)
金寧鉅鎭加天險(금녕거진가천험)
萬丈高臺壓四通(만장고대압사통)

 

 
 
첫 번째 구절의 연오(延烏)는 연일(延日)과 오천(烏川)을 합한 말로, 경상북도 포항(浦項)의 영일(迎日)이다. 영일의 유명한 성씨로 정(鄭) 씨가 있는데, 이를 연일 정씨 혹은 오천 정씨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연오의 큰 문장은 정몽주를 말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정몽주는 <김해산성기>를 썼다. 시인은 정몽주가 이 글에서 김해산성의 위용을 언급한 이후로 이것이 축복인 양 주문인 양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고 우뚝하게 서서 사방을 압도하며 변방을 지키는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허훈의 <분산진성(盆山鎭城)> 여덟 수를 통해 조선조 말 분산성의 모습과 분산성에서 바라본 주변의 풍광, 분산성의 의의 등을 느껴보았다. 허훈은 밝은 낮에 도착해 밤이 되기까지 계속 성에서 내려오지 않았던지 전체 시에서 낮부터 밤까지 펼쳐지는 분산성과 주변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분산성의 수루(戍樓)에서 읊은 이종기(李種杞·1837∼1902)의 시를 감상하고 분산성에서 내려가기로 하자.
 

아득한 분산에 수루를 올리고
사또가 조치하여 변방을 웅장하게 했네
그건 그렇고 오랑캐 새끼 돛을 펄럭이는데
은혜 믿음이 남쪽 고을에 펼쳐지기만 못하지  

縹緲盆山起戍樓(표묘분산기수루)
使君措置壯邊陬(사군조치장변추)
遮莫蠻兒飄海颿(차막만아표해범)
不如恩信殿南州(불여은신전남주)

 

 
<이종기, 분성수루(盆城戍樓)>  

수루는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지어진 누각이다. 분산성을 새로 수축하고 수루를 지은 것은 고려 사또 박위와 조선조 말의 사또 정현석이다. 이들이 분산성에 수루를 지어 주변을 경계하였던 것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함이다. 참으로 오랜 악연이다. 가까이에서 서로 믿음을 주고 은혜를 베풀면서 지낸다면 이 산성과 수루가 무엇 때문에 필요할 것인가? 그런데 지금도 저 오랑캐 새끼들은 침략의 돛을 펄럭이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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