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파사니사금의 고민
'고민이로다. 이 일을 어찌한다?'
 

▲ 수로왕릉 숭정각에 있는 수로왕 영정. 영정각인 숭정각 정문에서 볼 때 왼편에 있으며 오른쪽에는 허왕후의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파사니사금은 토함산 중턱에서 아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발 아래로 안개에 젖은 서라벌이 무연히 앉아 있었다. 푸른빛을 띤 안개가 바람 따라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음즙벌국이나 실직국은 둘 다 우리 사로국의 강역이 아닌가? 한울타리, 한집안에 사는 사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났는지.'
 
파사니사금은 잠시 몸을 돌려 토함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뭉게구름이 산 정상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토함산은 사로국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왕은 두 손을 모아 그 수호신에게 기도라도 하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지금 왕은 참으로 곤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서라벌 서쪽에 자리 잡은 음즙벌국과 실직국이 영토를 두고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음즙벌국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실직국 역시 마찬가지 주장을 하고 있었다. 두 소국은 사로국을 종주국으로 한 작은 부족국가였다. 또한 고구려와 사로국의 경계지점에 있는 나라들이었다. 두 나라가 고구려의 강역으로 들어간다면 사로국으로서는 커다란 손실이 되고 만다. 사로국 입장에서는 딱히 어느 한 나라의 손을 들어주기가 무척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파사니사금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우산으로 따가운 오월의 햇살을 막고자 했다. 그 모습을 본 왕비가 시종들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이 급히 해가리개를 갖고 와 왕의 머리 위를 가렸다. 왕비 역시 근심어린 얼굴로 왕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니사금이여, 너무 오랫동안 서 계셨나이다. 이만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왕비가 왕의 옆으로 다가오며 조용히 말했다. 왕은 찡그린 얼굴을 풀며 왕비를 쳐다보았다.

"공기가 맑고 곱구려. 오랜만에 궁에서 나와 우리 서라벌을 굽어보니 참으로 평화롭게 보이는 구려."
"이 모두가 니사금의 홍복이 아니옵니까?"
"허허. 거 무슨 과찬의 말씀을."
"니사금이여, 과히 심려치 마시옵소서. 좋은 방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좋은 방도를 찾아야지요."
"옛 말에 이르기를 지혜는 노인에게 빌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 노인이라도 내 곁에 있으면 참 좋겠는데."
"…."

왕과 왕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누가 속시원히 그들의 맘을 풀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멀리 산 아래 서라벌에서 오월의 바람이 불어왔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라벌을 내려다보았다.
 

2.지혜롭고 현명한 수로왕을 모셔라!
"야 이, 못된 놈들아! 왜 남의 땅에 와서 난리야?"
"이런 죽일 놈들. 누가 남의 땅을 침범했는데."
"좋아, 그럼 한판 해보자 이거야?"
"그래, 한판 뜨자. 우리 실직국의 매운 맛을 보여주마."

실직국 장수 항거는 툭 불거진 두 눈을 부라리며 음즙벌국 장수 기표를 노려보았다. 그에 질세라 호랑이 가죽 옷을 입은 기표 역시 세모꼴의 턱을 삐죽 내밀며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장수들의 기세는 살기등등했다. 황강변에 진을 친 두 나라의 군사들은 금방이라도 서로를 칠 태세였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저 멀리서 한 떼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두 나라 진영 사이로 들어갔다. 사로국 장수 유수였다.

"워워. 두 장수는 싸움을 멈추시오. 이는 파사니사금의 명이오."

서로에게 창과 칼을 겨누던 기표와 항거는 유수의 말에 잠시 주춤거렸다.

"유수장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실직국에서 왜 남의 땅에 들어와서 설치냔 말이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 일대가 어찌 너희 땅이냐? 여긴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땅이다. 너희들이나 썩 물러갓!"

▲ 봉황대 전경. 수로왕은 이곳 궁궐 마당에서 흰 수염을 산들바람에 날리며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허. 싸움을 멈추라고 하지 않았소? 곧 사로국 왕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릴 터이니 두 장수는 파사니사금의 명이 있을 때까지는 결코 싸우지 마시오. 만일 이 말을 어기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항거와 기표는 유수의 말에 서로를 노려보며 한참동안 씩씩거렸다. 곧 이어 항거가 땅에 침을 뱉으며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자, 기표도 찡그린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유수는 멀어져 가는 두 장수를 쳐다보다가 서라벌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래 항거와 기표가 대립하고 있다고?"
"예. 니사금. 두 장수가 서로를 죽일 듯이 하고 있습니다."
"큰일이로고. 점입가경이로구나."

유수의 말을 들은 니사금은 눈을 감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음즙벌국과 실직국이 군대까지 동원해 죽기 살기로 덤비고 있으니 사태는 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니사금이여,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유수의 말에 니사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생각이라고? 뭐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다름이 아니오라 낙동강 너머에 있는 금관국 수로왕이 지혜롭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를 초빙하여 판단을 내려보면 어떨까 하옵니다."
"금관국의 수로왕?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현명하다고 소문이 났단 말인가?"
"니사금이여, 유수장군의 말이 맞습니다. 수로왕을 불러 오소서."

대전으로 들어선 왕비가 부드럽지만 힘찬 어조로 말했다.

"아, 왕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이까?"
"예. 저도 예전에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가 무척 현명하다고 하니 좋은 판단을 내려줄 거라 믿습니다."
"하긴. 나도 얼핏 소문을 들은 것 같소. 하늘에서 금합자에 실려 내려온 천손이라는…. 그의 왕비인 허황옥은 멀리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했던가요?"
"맞습니다. 넓고 깊은 포부를 지녔다고 하더이다."
"니사금이여. 저에게 명을 내려주시면 한달음에 달려가 수로왕을 서라벌로 모셔오겠나이다."
"좋아. 유수장군. 지금 당장 금관국으로 달려가 수로왕을 모셔오게."
"명, 받들겠나이다."

유수는 쏜살같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니사금과 왕비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일말의 기대감에 휩싸였다. 어디선가 서광이 비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3.수로왕, 음즙벌국과 실직국의 분쟁을 해결하다
수로왕은 봉황대 궁궐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흰 수염이 그의 턱에서 산들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은 그의 얼굴에 투명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옆에 선 허황옥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늘의 명을 받아 금관국에 내려온지도 어언 사십년. 천년의 세월을 돌아 만난 수로왕과 허황옥. 그들은 더 없이 평화로운 나날에 만족하고 있었다.
 
"왕비여, 다과상을 준비하시오. 조금 있으면 귀한 손님이 올 것이오."
"예? 손님이 오신다고요? 어떤 손님이…."
"허허. 큰 고민을 안고 오는 손님이라오. 내 그를 따라 며칠 서라벌로 갈 터이니 채비를 해주시오."
"뜬금없이 그리 말씀하시니 어리둥절합니다. 무슨 일이옵니까?"
"뭐, 별 건 아니라오. 내 다녀와서 말하리다."

허황옥은 궁금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천손의 고귀한 명은 부드러우면서도 추상같은 것. 허황옥은 시종에게 왕의 행차 준비를 시켰다.

"대왕이시여. 멀리 사로국에서 유수장군이란 분이 찾아왔습니다."

대전 마당으로 들어선 내관이 수로왕에게 진중한 자세로 아뢰었다.

"내 이미 알고 있느니라. 그를 대전으로 오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 봉황대에 있는 가야시대 가옥들.
내관은 마당을 빠져나가더니 곧이어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유수를 데려왔다. 유수는 연신 신기한 눈빛으로 봉황대 궁궐 여기저기를 쳐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로국의 궁궐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관은 그를 대전으로 인도했다.

"어서 오시오. 유수장군. 내 아침부터 기다렸소이다."
"예? 제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까?"
"허허. 그래 파사니사금께서는 안녕하신가요?"
"예. 자, 잘 계십니다."
"내 바로 서라벌로 갈 수 있으니 나를 인도하시오. 어서 갑시다."

말을 마친 수로왕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자기가 찾아 올 것도 알고 있었고, 이미 어떤 일인지도 파악한 수로왕이 무척 신기했던 것이다. 유수가 주춤거리는 자세를 취하는 동안 수로왕은 이미 대전을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유수도 급히 대전을 나섰다.
 
수로왕과 유수는 낙동강을 건너 사로국의 강역인 내산국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반나절을 더 말을 몰아 실직국과 음즙벌국이 진을 치고 있는 진영으로 들어갔다. 항거와 기표는 여전히 서로를 노려본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들도 수로왕이 온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얼굴에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현명한 수로왕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먼저 항거가 수로왕에게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수로 대왕이시여. 일찍이 수로왕의 소문을 들었나이다."
항거가 예를 표하자 그에 질세라 기표도 얼른 고개를 숙이며 수로왕에게 인사했다.
"수로대왕께서 속히 해결책을 내놓으시면 저희들도 그에 따르겠나이다."
"허허. 내가 무슨 지혜가 있다고. 음."

수로왕은 두 장수의 인사를 받은 후,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두 나라가 싸우고 있는 땅의 지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항거와 기표, 유수는 모두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들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로왕은 한참 동안 땅을 살피고 또 살펴보았다. 마침내, 수로왕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먼저 이 땅은 음즙벌국의 땅이 분명하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왜 음즙벌국의 땅입니까?"
"이곳 안강의 지세를 잘 살펴보시오. 여인의 젖가슴이 하늘을 향해 있는 형국이오. 이는 음기가 충만한 땅이란 뜻이오. 음즙벌국의 음은 바로 여인의 음을 뜻함이오. 모든 사물은 그 이름에 먼저 유래가 맺혀 있는 법이오. 이 땅은 바로 음즙벌국의 옛 조상들이 머물렀던 땅임이 분명하오."
 
수로왕의 말에 기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항거는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기 나라 땅이라고 굳게 믿었건만 결과는 너무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땅은 또한 실직국의 땅이오. 왜냐하면 예전 음즙벌국과 실직국은 한 형제였기 때문이오. 음즙벌국에서 실직국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오. 이는 천손인 나 수로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 실직국도 이 땅에 대한 지분이 있단 말씀 아닙니까?"
"그렇소. 그러니 이제부터 이 땅을 균등하게 나누어 음즙벌국과 실직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오. 모두 그리 할 수 있겠소?"

수로왕의 말에 항거와 기표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엄한 천손의 명이었다. 과연 어느 누가 거역할 수 있을까. 두 장수와 유수는 모두 무릎을 끓으며 수로왕의 말을 인정했다.
 
이리하여 사로국의 오랜 고민인 음즙벌국과 실직국의 영토 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모두가 천손인 수로왕의 권위에 의해 정리된 일이었다. 두 나라의 분쟁을 해결한 수로왕의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흘러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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