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1.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 마지막 날 칠선계곡으로 하산하던 중, 발을 헛디뎌 계곡을 따라 아주 잠깐(느낌으로는 한참을) 계곡물 따라 떠내려 가다가 물가에 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아 위험을 빠져나온 적이 있다. 계곡물에 빠져 중심을 잃고 떠내려갈 때 겁에 질렸지만 순간 가족들이 생각났고, 계곡을 따라 뛰어오는 친구들의 고함소리도 들렸다. 내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는지 정신차려 기슭 쪽으로 가려 애쓴 끝에 계곡까지 늘어진 나뭇가지를 겨우 붙잡고 있다가 친구들 손을 잡고 올라왔다.
 
#경험 2. 기억도 선명한 2005년 3월 20일, 전국에서 지진을 느낀 날이다. 나는 40여명에 가까운 일행들과 함께 전라도 지역을 여행 중이었고 봄이 오는 들판을 걷고 있던 시간이었다. 뭔가 들판이 출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배를 타고 있다가 몸이 흔들 하는 느낌이었는데 순간 밀려오는 강렬한 불안감에 온 몸이 오싹해졌다. "이게 뭐지?" "설마 지진인가?" 일행들이 술렁였다. 잠시 후 40명 일행 대부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발생했는데 별일이 없느냐는 가족과 지인들의 전화였다.
 
일본에 지진과 쓰나미와 방사능의 공포가 덮쳤다.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친구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고 있는 그들에 비하면 내가 겪었던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경험치로 그들을 헤아려 볼 뿐이다. 계곡에 빠졌을 때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가던 순간은 내가 겪은 최고의 두려움이었다. 딛고 있는 땅이 통째로 흔들릴 때의 그 공포감 역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기억이다.
 
2010년 8월 5일 칠레의 산호세 광산이 붕괴되면서 지하 700m 갱도에 광부 33명이 매몰되었다가 구출된 일을 생생하게 담아낸 책 'THE 33'을 펼쳐 읽는 까닭이 그 때문이었다.
 
지하 갱도에 갇힌 칠레광부 33인은 처음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기도와 수로정비, 식량배분, 조명, 유머, 의학, 기록을 하며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들을 단결시킨 건 한 사람의 리더십이라기보다는 33인 각자의 힘과 마음이 엮이며 이루어낸 릴레이션십이다. 지상에 남아 그들이 무사하길 원했던 것은 광부들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피노체트 군사 독재 시절, 시민 3천 명이 살해당하고 그들의 시신이 '사라진' 일 때문에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칠레 국민들은 다시는 같은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고, 설사 살아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들을 지상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정부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너진 광산 아래 매몰된 광부들은 33인이 아니라 칠레 국민 모두였던 것이다. 고립 69일 만인 10월 13일 33명의 광부는 전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조 캡슐 '불사조'를 타고 올라오면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 일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 'THE 33'은 인류사회를 지탱해 온 희망과 믿음, 신뢰라는 오랜 덕목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깨우쳐준다.
 
일본이 겪고 있는 엄청난 피해 역시 일본은 물론 지구에 살고 있는 전 인류를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할 것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오만함을 버리게 하고, 재난 앞에서 타인과 협력하는 마음을 배우게 하고,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일상의 모든 시스템을 다시 점검하게 하고,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운명과 다르지 않고 한 국가의 운명이 전 인류의 운명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칠레광부들이 보여준 릴레이션십이 기적을 이루어낸 것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보내는 마음이 일본에서 전 세계로 번져가는 불안감을 헤쳐 나가게 할 것이다.

▶조나단 프랭클린 지음/유영만·이원경 옮김/월드김영사/324p/12,000원






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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