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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왕녀와 사흘 밤을 보낸 곳에 사찰을 지어 증표로 남기겠소"(14) 수로왕과 허황옥의 신혼방 '명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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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재 2014.03.11 11:54
  • 호수 164
  • 13면
  •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kkim40@hanafos.com)

   
▲ 부산 강서구 지사동 명월산에 있는 명월사(현재 흥국사) 전경. 한동안 폐사 상태였다가 1942년 우담이 중건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천년의 세월을 지나 인연을 만난 수로왕
"장유대사, 그대가 총감독이 되어 지휘하시오"
아유타국을 떠나며 품었던 불국토 건립의 비원
그 꿈의 실현 앞에서 허황옥과 장유화상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깊은 미소를 지었다

 

#1.명월산에서 만난 수로왕과 허황옥
수로왕은 기다리고 있었다. 천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인연을. 어디선가 실바람이 희미하게 불어왔다. 바람은 그의 얼굴을 가볍게 매만졌다. 형형한 눈빛에 용맹함과 기상이 넘치는 젊은 왕. 하늘의 명을 받아 황금 알의 형상으로 이 땅에 내려 온 천손이었다.
 
"붉은 돛을 단 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오전에 망산도를 다녀온 신귀간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쳐댔다.

'이제야 나의 인연이 이루어지는가? 붉고 고운 자태로 나에게 다가올 인연이.'

   
▲ 1956년에 세워진 삼성각. 이곳에서 불교 남방전래설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진 석탑면석이 발견됐다.
수로왕은 명월산 북쪽 기슭에 차려진 임시 행궁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별포로 내려가고 싶었다. 허나 자칫 잘못하면 아유타국에서 온 왕녀 일행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았다. 왕은 크게 심호홉을 하며 성급한 마음을 달래기로 했다. 얼마 있으면 유천간과 신귀간이 그의 인연을 모시고 올 것이었다.

한편, 허황옥 일행은 이런 수로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월산으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왕녀 일행이 별포 나루터에 도착하자마자 유천간이 찾아와 수로왕이 있는 궁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왕녀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함부로 낯선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당황한 유천간 일행이 급히 궁으로 사람을 보냈고, 수로왕이 왕녀의 말을 좇아 직접 행차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지금 왕녀는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 곳이 바로 명월산 북쪽 기슭이었다.
 
명월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하면서도 평평했다. 분명 예전에는 좁고 가파른 길이었을 것이다. 길가를 자세히 보니 삽과 곡괭이로 파낸 흔적이 역력했다. 필시 인위적으로 넓은 산길을 만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모두가 천년의 인연을 만나기 위해 수로왕이 행한 것이었다.
 
계절은 봄이 오는 길목이었다. 산에서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잎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종달새와 참새의 낭랑한 음성이 하느작거리며 떨어지는 솔잎 사이에 맺혀 있었다. 산길 도중에 평평한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 바위를 본 왕녀는 마침내 찾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바위 위로 올라간 왕녀는 명월산 봉우리를 향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조심스레 벗었다. 옆에 선 잉신(공주가 시집 갈 때 따라가는 신하)들이 공주의 행동을 도와주었다. 지금 공주는 명월산 산신령에게 일종의 폐백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무릎을 꿇은 공주는 비단바지를 두 손에 얹고 아유타국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자수정처럼 투명한 햇살이 왕녀의 뺨 위로 비치었다. 뺨에 어린 햇살 사이에는 천 년의 인연을 만나고자 하는 깊은 비원이 서려 있었다.
 
폐백을 바친 왕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언덕 정상으로 올라갔다. 언덕으로 올라갈수록 어렴풋이 희미한 광채가 눈에 들어왔다. 흰 빛이었다. 둥그런 흰 빛이 어떤 사람을 감싸는 형국이었다. 왕녀 일행이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 사람의 형상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수로왕이었다. 금빛 옷을 입은 수로왕이 하얀 광채에 싸인 채 왕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이가 나의 낭군이란 말인가? 천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기어코 만난.'

왕녀는 듬직하고 수려한 용모를 지닌 수로왕에게 어느새 마음을 빼앗겼다.

"모두 먼 길을 오느라 수고하셨소. 자, 행궁으로 들어갑시다."

왕녀와 잉신, 신귀간과 유천간 등은 수로왕의 뒤를 따라 모두 행궁으로 들어갔다. 궁녀들이 음식을 준비했고, 분주히 사람들이 움직이며 수로왕과 왕녀 일행의 신혼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고 곧 이어 흥겨운 잔치가 벌어졌다. 동쪽 언덕에서 두둥실 보름달이 떠올랐다. 은빛이 명월산 곳곳에 내려앉았고, 사방에 은조각들이 날렸다. 하늘마저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북쪽 기슭에 교교히 내리는 달빛. 그 달빛 아래 작은 행궁에서 수로왕과 왕녀는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모든 신하들과 궁녀들은 두 사람의 소중한 만남이 시작되는 행궁을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2.수로왕 "명월사를 지으시오"
   
▲ 명월사(현재 흥국사)에 세워져 있는 '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
사흘이 지났다. 수로왕과 신혼의 날을 보낸 허황옥이 한껏 성숙한 여인의 몸으로 행궁 밖으로 나왔다. 잉신들이 왕녀의 몸을 단장하는 동안 유천간과 신귀간, 장유화상 등이 봉황대 궁궐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모든 준비가 끝날 즈음, 수로왕이 모두의 앞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궁으로 돌아갑시다. 천년의 세월을 지나 만난 나의 인연과 함께 이제 봉황대 궁으로 돌아갈 것이오. 유천간!"
"예. 대왕마마."
"이곳 명월산 북쪽 기슭은 나의 사랑스런 왕녀와 사흘 밤을 보낸 아름다운 곳이오. 해서 이곳을 기념하는 증표 하나를 세우고자 하오."
"하명하십시오."
"이 산 이름이 명월산이라고 했지요? 그럼 이곳에 작은 사찰 하나를 세워 명월사라 하시오. 그 명월사가 우리 두 사람이 만난 증표가 될 것이요."
"장유대사. 그대가 명월사를 짓는 총감독이 되어야 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왕의 혜안이 그리 출중하시니 앞으로 대가락국의 앞날에 서광이 널리 비칠 것입니다."

허황옥과 장유화상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유타국을 떠나면서 품었던 비원이 마침내 대가락국에 실현되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던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 불국토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다.
 

#3.명월사 주지의 고민
절 안은 이른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족히 100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마당 여기저기를 차지한 채 옥시글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갖고 온 음식들을 먹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숯불을 피워 음식을 해 먹고 있었다. 장사치들과 보따리상들, 점잖은 학관에서 요염한 차림의 여인네까지. 거의 모두가 금관국의 수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마뜩잖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명월사 주지였다.

'참. 이거 큰일이로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으니 원.'

주지인 진각은 절 마당에 있는 비석 앞에서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자고로 찾아오는 손님을 내칠 수는 없는 법. 하필이면 금관국의 수도로 가는 길이 절 앞에 나는 바람에 명월사가 교통의 요지가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오고가는 길손들은 잠시 스치고 가면 그만이지만 명월사 입장에서는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절에 머물며 온갖 소란을 피워대니 말이다. 스님들의 수도 정진에도 방해가 될 뿐더러, 절 살림도 갈수록 축이 나기 시작했다.
 
'예전 수로왕께서 이 절을 만드실 때가 제일 좋았는데.'

진각은 '가락국태후영안유허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수로왕은 명월사에 수많은 전답을 하사하고 많은 재물을 내려 보내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래서 명월사는 근 300명의 스님들이 수도 정진할 정도로 융성했던 것이다.

"스님. 어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절 행정을 맡고 있는 용수가 다가왔다.

"저 꼴을 보십시오. 우리 명월사가 무슨 시정잡배들이 모이는 장터도 아니고.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더는 못 참겠습니다."

용수는 화난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이러다간 열흘도 못 돼 절 재정이 고갈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스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걸 행하려니 영 찜찜해서 말이오."
"뭘 더 고민하십니까? 그때 그 처사가 일러준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글쎄. 그게 참…."

진각은 답답한 표정으로 절 뒤편에 고개를 쑥 내민 산봉우리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산봉우리 하나가 잔뜩 발기한 채 명월사를 내려다 보는 형국이었다. 사흘 전에 이 절을 찾은 어떤 과객이 저 산봉우리를 끊어야 길손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저 산봉우리를 끊어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괜히 낯선 사람의 말을 들었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면 어떡하나?'

진각은 걱정하고 있었다. 절은 명월산의 넉넉한 품새에 싸여 있었고, 명월산의 산신령은 명월사의 수호신이었다. 그 수호신의 지맥이 들어 있는 산봉우리를 끊으면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용수의 말대로 수백 명의 길손들이 계속해서 명월사를 찾아 온다면 얼마 못 가 절은 문을 닫을 것이었다.

"용수 스님. 별 일은 없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산봉우리보다 우리 절의 앞날이 중요합니다. 당장 저 봉우리를 끊어버립시다."
"그럼, 그리 합시다. 우선은 우리 절이 살고 봐야 하지 않겠소?"

진각의 말을 들은 용수는 급히 발걸음을 요사채로 옮겼다. 그리고 모든 스님을 나오라고 해서 절 뒤편으로 쇠망치와 정을 들고 갔다. 스님들은 모두 합심해서 산봉우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곧 이어 산봉우리가 우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조금 전까지 절 마당을 어지럽히던 길손들이 죄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내려다 본 용수는 득의만면한 웃음을 띠었다.
 

#4.폐사가 되어 버린 명월사
   
▲ 1986년에 만들어진 오층관음보탑.
'아아, 이리도 참담할 수가.'

진각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코브라 석물을 매만지며 눈물을 훔쳤다. 예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갖고 온 신물이었다.

'이 신물이 언제까지나 명월사를 지켜 주리라 믿었건만. 이 모두가 나의 불찰이로다.'

온갖 잡초가 가득한 절 마당에는 을씨년스런 기운이 감돌았다. 벌써 용수도 죽은 지 오래였다.

'나무아미타불. 이 모두가 나의 불찰이로다. 부처님과 수로대왕을 뵐 면목이 없구나.'

어디선가 찬바람이 쌩하니 불어왔다. 확연히 늙어버린 진각은 다 떨어진 가사장삼을 겨우 추스르며 석장에 몸을 의지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명월사는 폐사가 되어버렸다. 웅장했던 대웅전과 승당, 요사채 등은 이미 허물어진 지 오래였고 명월사에서 죽은 스님들만 수 십 명이었다. 열 두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대 사찰이 이리도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젊은 과객의 말을 따라 산봉우리를 끊은 것이 엄청난 재앙의 시작이었다. 길손들의 발길이 끊기면서부터 절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더니 스님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님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절에 들어오는 시주도 끊어졌고, 절 재정은 완전히 파탄이 난 것이었다.

'나는 평생 죄인으로 자처하며 전국을 유랑할 것이다. 나의 시체는 길가 어딘가에서 썩어 문드러지겠지. 그게 나의 불찰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는 길일 터. 어쩌면 이 모두가 부처님의 뜻이 아닐는지.'
 
진각은 코브라 형상의 석물을 지나 허황옥 석비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 쉴 새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황망한 바람이 불어와 빈터의 대나무 숲을 쏴쏴 흔들어대고 있었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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