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은 106주년을 맞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김해지역 여성단체 회원 등은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제26차 경남여성대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들은 100년을 넘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서도 결코 기쁘지 않았다. 김해에서 성폭력 상담건수가 날로 느는 등 성폭력 문제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해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피해 상담자는 181명으로 2012년 118명에 비해 63명(53%)이나 증가했다.

피해 현황과 문제점 및 대책


■ 아버지·이웃 아저씨·경비실 직원까지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따로 구분이 없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도 있지만 친아버지, 이웃집 아저씨, 경비실 직원 등 집이나 근처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해여성의전화 부설 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작성한 '성폭력 가해자 유형'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피해 사례 181건 중 31건의 가해자는 가족과 친·인척인 것으로 드러났다. 가해자가 직장 관계자, 학교 선·후배인 경우도 각각 18건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A 양은 오랜 기간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A 양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했지만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A 양이 아버지의 폭력과 성폭행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출이었다. A 양은 다시 집에 붙들려 가는 날에는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A 양은 견디다 못해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그의 아버지는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혐의(친족관계에 의한 강간)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김해성폭력상담소 신순재 소장은 "최근의 성폭력 피해를 분석해 보면 과거에 비해 친족의 성폭력이 많아지고 있다. 요즘에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어머니가 이혼을 각오하고서라도 딸을 성폭행한 남편을 처벌하려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지역내 상담자 수 1년새 53%나 늘어
친족이나 아는 사람 가해자 비율 증가
피해자 심리치료·사회복귀상담 절실
예산·인식 부족 탓 인력·시설 확보난


■ 피해자 연령 갈수록 낮아져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해성폭력상담소가 2012년 성폭력 피해자를 연령별로 나눠본 결과 7~13세 미만이 13명, 13~20세 미만이 56명, 20대가 21명이었다. 지난해에는 7~13세 미만이 7명, 13~20세 미만이 73명, 20대가 39명이었다. 7세~20대가 전년보다 45%가량 늘어난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발생 추세와 동향분석-2007~2012'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미성년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가 크게 늘고 있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 가해자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스마트폰의 보편화를 원인으로 꼽는다. 김해중부경찰서 성폭력전담팀 관계자는 "10대 청소년들은 스마트폰 등을 통해 쉽게 성인물을 본다. 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학생들이 성인물을 보다 보니 성폭력 피해자의 연령층이 자꾸 낮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터넷 등 성인 홈페이지에 접속할 때 주민등록번호 입력을 통해 성인 인증을 받지만 청소년들은 대개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를 외워 접속한다"고 지적했다.
 
장애인의 성폭력 피해도 늘었다. 2012년 8건에 불과했던 장애인 성폭력 피해 사례는 지난해의 경우 18건으로 10건이나 증가했다. 성폭력은 대부분 정신지체 장애인에게 발생했다. 눈여겨 볼 점은 지난해 성폭력 피해자들 중 남성이 7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성폭력 피해가 여성에게 한정돼 나타난다고만 볼 수 없게 됐음을 뜻한다.
 
■ 예산·인식 부족으로 상담·치료 어려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상담 등 주변의 지원, 사회복귀를 위한 장기간의 심리치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김해는 성폭력상담소가 한 곳에 불과한데다 인력마저 모자란다. 또 피해자 및 사회 전반적인 인식 부족으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심리치료에 어려움이 많다.
 
김해여성의전화가 운영하는 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상담 등을 통해 다양한 지원을 한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김해중부경찰서 성폭력전담팀, 무료법률구조공단 등에서 피해자를 법률적으로 지원한다. 그러나 김해성폭력상담소는 인력 부족으로 업무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김해중부경찰서 성폭력전담팀 관계자는 "김해에는 성폭력상담소가 하나밖에 없다. 상담 인력이 적어 업무 부담이 만만치 않다. 상담소가 하나 더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예산 문제로 인해 김해에 성폭력상담소가 추가로 들어서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신 소장은 "2003년과 비교하면 상담 건수는 5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상담소 인력이 상담소장 1명, 상담사 2명으로 정해져 있어 인력을 충원할 수 없다. 아직 경남도의 일부 군 지역에는 성폭력상담소가 없는 경우도 있다. 김해에 상담소를 하나 더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안타까워했다.
 
성폭력 전문가들은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만큼 중요한 것이 피해자의 사회 복귀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대인 기피, 불안 등의 증세에 시달리기 때문에 사회 복귀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을 돕기 위해 김해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심리치료를 거부하거나 너무 쉽게 치료를 중단해버리기 때문에 완벽한 치료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신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평생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릴 수 있다. 심리치료는 피해자가 사회로 복귀하기 위한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심리치료를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심리치료를 강요할 수는 없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상황에 따라 보호기관에 머무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김해에는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부산 양지터, 창원 창원여성의집 등에서 지내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호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신분 노출을 꺼리기 때문에 가급적 피해를 당한 곳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가 보호를 받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신 소장은 "김해에 성폭력 보호시설이 있으면 물론 좋을 것이다. 만약 만든다면 상처 받은 피해자가 제대로 회복될 수 있도록 전문가의 손에 맡겨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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