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금관죽지사>와 <금관기속시>를 새롭게 번역하고 연구한 안미정 선생은 청뢰각(晴 閣)에 대해 '지금의 김해시 동상동에 있었다'고 하고, <읍지>의 내용을 통해 '객관 중문(中門) 밖에 있었으며 기축(己丑·1649)에 부사 이상경(李尙敬·1609~1674)이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1830년대 읍지에는 '객사의 정문 밖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를 시로 읊은 이학규는 '청뢰각은 부성의 동쪽, 객관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설명을 종합하여 보면 청뢰각은 현재의 동상동 연화사 남쪽에 있던 객관의 정문 앞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1649년 창건된 이후 이학규가 시를 읊을 당시인 1800년대까지도 이 집은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학규의 시를 보자.

▲ 동상동에 있는 연화사. 이 지역에 객관·청뢰각·분성대·함허정·하월재·연자루 등이 호계의 물줄기를 에워싸고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김병찬 기자 kbc@
연화사 남쪽 객관 정문 앞 청뢰각 자리 추정
물 끌어들인 연못 가운데 팔각정 모양 함허정
연자루 뒤 위치해 호계가 언덕 분성대와 나란히
연잎 맺힌 이슬과 새벽 달 어울려 그윽한 풍취
고을 원이 선비 양성하던 분성대 동쪽의 하월헌
지금의 취정재가 그 자리에 들어서 역할 대신
 

사찰에서 북을 만드는데
만 전이나 들여 장식을 하네
강에 흘러가나니 8월의 떼배
나그네가 천 근 짜리 소를 드리네
돌아오니 군 성 안에
우레 소리에 물과 구름이 끓어오르네

製鼓本禪宮(제고본선궁)
糚餙萬錢費(장희만전비)
江流八月槎(강류팔월사)
客獻千斤犩(객헌천근위)
歸來郡城中(귀래군성중)
晴䨓水雲沸(청뢰수운비)

 

 
<이학규, 금주부성고적십이수 증이약소 청뢰각(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 晴䨓閣)>  


이학규는 1809년부터 1810년에 걸쳐 김해에서 본 일을 읊은 '기경기사시(己庚紀事詩)'에 북을 치는 행사인 '격고(擊皷)'를 노래하고 있는데, 여기에 설명을 붙여 '격고는 가뭄을 걱정하는 것이다. 부의 풍속에 큰 가뭄을 만나면 부 안에 나무를 꽂아 시렁을 만들고, 풀을 묶어 용을 만들고, 장육존상(丈六尊像·1장 6척으로 만든 불상)의 그림을 걸고, 악사(樂師)와 승려·무당이 잡다하게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어 어지럽고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준비물은 모두 백성에게 요구하니, 백성들은 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가뭄을 걱정하기는커녕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것을 걱정한다'고 하였다.
 
세 번째 구절의 팔월의 떼배(八月槎)는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둔 중국의 <박물지(博物志)>에 설명되어 있기를 '해마다 8월이면 떼배가 바닷가에 떠 왔다가 가는 시기를 결코 놓치지 않는데, 어떤 사람이 그 위에다 집을 지은 뒤 양식을 싣고 타고 가더니, 10여 일만에 은하수에 이르러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보았다'고 하였다. 네 번째 구절의 '위( )'는 덩치가 엄청나게 커서 고기가 수천 근이나 나오는 소로 중국 촉(蜀) 땅에서 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소는 주로 제사의 희생으로 많이 쓰인다.
 
이 시는 당시의 사정을 풍자한 것으로 하늘에 기도를 드린다기에 견우에게 가서 기도하며 제사지낼 큰 소를 얻어다가 희생으로 바치려고 했더니, 기다리지 못하고 벌써 우레(청뢰·晴䨓)처럼 요란하게 북소리가 울리고 있더라는 표현이다.
 
조선조 말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고을에 들어가면 연자루를 보게 되는데, 뒤에 함허정이 굴곡진 못에 떠있고, 그 옆에 분성대(盆城臺)가 있으니 사람들은 가락국의 궁궐터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대가 구름과 이어져 
아득하게 바다 위로 보이네 
처음 빛이 사람의 얼굴에 비치더니 
높은 바람에 나무 끝으로 흩어지네 
가만히 앉아 성 안의 사람 살펴보니 
아침이고 저녁이고 절로 여유롭구나 

臺與雲氣連(대여운기련)
蒼茫見海表(창망견해표)
初暉射人顔(초휘사인안)
高凮散木杪(고풍산목초)
坐視城中人(좌시성중인)
悠悠自昬曉(유유자혼효)

 

 
<이학규, 금주부성고적십이수 증이약소 분성대(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 盆城臺)>  


▲ 연화사 대웅전 뒤편 풍경.
대(臺)는 물가에 있는 언덕이다. 분성대 역시 호계 가에 있던 언덕이다. 지금은 이 대가 있었다고 알려진 연화사 주변에 언덕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가락국의 옛 궁궐터라고 새겨진 비석만 남아 있어 이곳이 그곳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 있었던 연자루, 함허정, 청뢰각, 객관 등과 분성대를 하나로 그려보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시인은 대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처음에 빛이 사람의 얼굴에 비치더니 대 위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끝으로 빛이 흩어진다는 표현에서 언덕 위로 지나는 해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대 주변의 평온한 분위기 또한 느낄 수 있다.
 
다음은 함허정(涵虛亭)을 보자. <동국여지승람>에는 '함허정은 연자루(鷰子樓)의 북쪽에 있으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건축한 것이다. 호계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그 복판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매우 조촐하고 시원하다'라고 하였다. 조선조 초기의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함허정을 처음 지었을 때의 기록인 <함허정기(涵虛亭記)>를 남겼다. 내용을 줄여서 보도록 하자.
 
부사 최윤신이 파사탑(婆娑塔) 남쪽에 네모난 못을 파고 호계(虎溪)의 물을 끌어들여 가두었다. 물속에 섬을 쌓아서 점대(漸臺·물이 차면 잠기는 언덕)를 만들고 그 위에 띠풀로 이엉을 이어 정자를 지었다. 물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고, 고기도 기르고 연도 심고 또 물새와 해오라기 등을 길러서 떴다 잠겼다 하게 하였다. 그 넓이는 반 이랑에 지나지 않지만 물이 멎고 어리어 하늘과 뒤섞였다. 최윤신이 좌의정 어세겸(魚世謙·1430~1500)에게 이름을 청했더니, 함허라고 지었다. 정자 이름인 함(涵)은 잠긴다는 뜻이고, 허(虛)는 비었다는 뜻이니, 비어 있으므로 모든 것을 잠기게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1800년대 초의 <김해읍지>에는 1547년 김해부사 김수문(金秀文·?~1568)이 무너진 것을 증축하였다고 하였다. 다음에 볼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시에서 읊은 그것이다.


물그림자 하늘하늘 아름다운 다리에 비치고 
팔괘 나뉜 붉은 기둥 원과 모를 본떴네 
구름 뜬 하늘 푸른 빛 품고 예나 지금 한가지 
솔과 대 찬 기운 일어 눈과 서리에 남았네 
맑은 은하수 갈래 돌 틈으로 부서지고 
둥근 연잎에 이슬 쏟아지니 시흥이 맑아지네 
산 위로 솟아나는 사경의 달 보니 
한 정자 허공의 밝은 빛을 마시고 있네  

水影離離映畵梁(수영리리영화량)
卦分丹柱體圓方(괘분단주체원방)
雲天涵碧自今古(운천함벽자금고)
松竹生寒留雪霜(송죽생한류설상)
淸漢泒分石齒碎(청한고분석치쇄)
圓荷露瀉吟魂凉(원하노사음혼량)
待看山吐四更月(대간산토사경월)
吸得一亭虛白光(흡득일정허백광)

 

 
<황준량, 함허정 차조건중(涵虛亭 次曹建中)>  


황준량은 시에 주를 달아 '정자의 모양은 모나고 둥글어 팔괘(八卦)를 본떴다'고 하였으니, 팔각정이다. 황준량이 차운을 한 조식(曺植·1501~1572) 또한 '교룡의 집 신기루 오르니 제비는 들보가 없고, 허공에 무엇인가 잠겼으니 보이나니 곧고 모나네'라고 읊고 있다. 이러한 팔각정 주변으로는 호계의 물이 흘러들었다가 돌 틈을 맑게 장식하곤 흘러나가고, 연잎에 맺힌 이슬 또한 맑은 풍경을 보탠다. 더구나 달이 둥실 떠오른 새벽의 함허정은 그 풍취를 더하였다.
 
▲ 취정재.
함허정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1598) 때 무너졌던 것이 1801년 부사 심능필(沈能弼)에 의해 하월헌으로 거듭 났으나, 다시 퇴락하는 등 여러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김해읍지>에 하월헌은 고을 원이 선비를 기르던 양사재(養士齋)로 소개되어 있는데, '경신(庚申·1800)년 초에 성내의 함허정 옛 터에 세웠다. 빼어난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신사(辛巳·1821)년에 북쪽 성 밖에 다시 세웠다'고 되어 있다.


높은 집이 잔 물결을 베게 삼으니 
돌아 흘러 난간 그림자를 지나네 
연잎은 옥정의 뿌리에 이어지고 
밝은 달은 문고리에 차갑게 비치네 
집 앞에서 희미한 종소리 듣자니 
외로운 마음에 깊은 깨달음 일으키네 

高軒枕漣漪(고헌침연의)
周流步櫩影(주류보염영)
荷連玉井根(하연옥정근)
月皎銅鋪冷(월교동포냉)
齋頭聞微鐘(재두문미종)
孤懷發深省(고회발심성)

 

 
<이학규, 금주부성고적십이수 증이약소 하월재(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 荷月齋)>  


세 번째 구절 옥정의 뿌리는 중국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768~824)의 "태화봉 꼭대기 옥정의 연꽃, 열 길 높게 피었으니 연밥도 배만 하구나. 어찌하면 긴 사다리로 열매 따다가 칠택(七澤)에 심어 뿌리를 연이을 수 있을까?"라고 한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세상에 쓰이지 못한 자신을 암시한 말이다. 한유와 마찬가지로 이학규 또한 선비를 양성한다는 하월재에서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는 마음을 읊고 있다.


하월헌의 창가가 온종일 비었으니
어찌 구태여 사내들 언덕 위에 모이리오
은동곳 상투에다 누런 삼베옷 걸치고서
분성대에 올라서 바람을 쏘인다네

荷月軒窗鎭日空(하월헌창진일공)
何須子國聚邱中(하수자국취구중)
銀釘髻子黃麻褶(은정계자황마습)
去灑盆城臺上風(거쇄분성대상풍)

 

 
<이학규, 금관기속시>  


이학규는 시에 주를 달아 '하월헌은 객관의 북쪽이며 분성대의 동쪽에 있다. 고을의 원이 선비를 양성하는 곳이다. 집은 오랫동안 내버려두어 고을의 불량배들이 모여서 음탕한 짓을 하는 곳이 되었다'고 하였다.
 
1801년 10월에 김해에 온 이학규가 이미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집은 세우고 그리 오래지 않아 선비 양성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주변의 여타 정자처럼 유흥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선비 양성의 새로운 기대를 안고 하월헌은 1821년 성 밖으로 나갔다.
 
▲ 취정재(就正齋). 이곳은 예전에는 하월재가 있었던 곳이며, 하월재는 선비를 기르던 곳으로 함허정의 옛 터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후 이 또한 제대로 운영되지 않다가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와서 이를 개탄하고 서당을 열어 김해 주변의 학문을 일으켰던 이래로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향교 입구 유림회관 옆에 1927년 새로 지은 취정재(就正齋)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취정재에는 허전의 철명편(哲命篇) 목판이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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