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 '나그네' 전문)

이 시에 나오는 술은 무슨 술일까? 아마도 막걸리일 것이다. 막걸리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다. 선조들은 고두밥에 누룩을 섞은 뒤 그것을 오지 그릇 위에 걸고 채로 걸러 뿌옇고 텁텁하게 만들었다. 술을 거르기 전에 용수를 박아서 떠낸 맑은 술이 청주이고, 물을 더 넣어 걸쭉하게 걸러 낸 게 탁주이다. 이 탁주를 막걸리라고 한다.
막걸리의 명칭은 농주(農酒), 탁주(濁酒), 희주(喜酒), 백주(白酒), 합주(合酒), 가주(家酒), 이화주(梨花酒), 부의주(浮蟻酒), 탁배기 등으로 다양하다. 막걸리는 지역마다 나름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김해의 양조장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상동양조장'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 젊은 시절부터 술을 빚어온 두 작업자와 박대흠(왼쪽) 대표가 술밥에 누룩(효모균)을 뿌리고 손으로 비비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상동양조장은 상동면사무소 근처, 김해시 상동면 대감리에 있다. 간판은 보이지 않는데, 입구 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엷은 술 향기가 느껴졌다. '술 익는 공간'이었다.
 
박대흠(57) 대표는 한림면 신천마을 출신이다. 상동양조양의 3대째 사장이다. "예전에는 집에서 막걸리를 빚었죠. 일제강점기 때 쌀을 공출하느라 집에서는 술을 못 빚게 하고 면단위로 양조장을 하나씩 두었지요. 이 양조장도 그때 생겼는데 지금까지도 술을 빚고 있습니다. 저는 3대째 사장으로, 28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박 대표는 우연히 이 양조장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셨어요. 유통업 쪽의 일을 하고 있었죠. 술하고는 인연이 없었는데, 어찌하다 양조장 주인이 됐습니다. 친구가 양조장을 하고 싶다고 해 같이 하려고 했는데, 친구는 중간에 그만 두고 제가 맡게 됐습니다. 양조장을 정식으로 인수하고 난 뒤 양조장 일도 배우고 술맛을 유지하기 위해 전문가를 모셨습니다. 경북의 한 양조장에서 맛좋은 막걸리를 빚어내기로 유명했던 김두상 어른을 모셔왔습니다. 15년 여 일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분께 일을 배웠습니다. 그분이 남겨주신 막걸리 제조법 기록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온도와 습도에 예민해 어린 아이 키우듯
몸으로 익히고 배워야 하는 숙련의 과정

술독 안 발효 거품 살아있는 듯 '톡 톡'
정성들여 7~8일 동안 숙성시켜야 제맛

"최소 3년 이상은 배워야 기본 갖춰 일 배우려는 젊은이 점점 사라져"

▲ 막걸리가 익어가는 술독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른 거품이 마치 '술꽃' 같다.
박 대표는 양조장을 한 곳 씩 소개했다. "양조장에 오셨으니 이곳부터 보시죠." 박 대표는 사입실로 안내했다. 막걸리가 익고 있는 방이었다. 문을 열자 막걸리 향이 물씬 느껴졌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개의 독 안에서 술이 발효되는 소리가 마치 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었다. 작업한 날짜에 따라 순서대로 놓여 진 독 안의 술은 막 익기 시작한 것도 있었고, 한창 익고 있는 것도 있었고, 거르기 직전의 것도 있었다. 한 독 위에 덮인 흰 천을 들추었더니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한창 익고 있는 술독에서는 발효 과정에서 피어 오른 황백색의 거품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부드러운 치즈거품 같았다. 톡톡 작은 거품이 터지는 소리, 자글자글 뭔가가 익어가는 소리…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더니 작고 희미한 소리들이 사입실 안을 가득 채우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술독 하나마다에서 1.2ℓ 생탁주 약 1천200 병 분량의 술이 생산된다고 했다.
 
"지금 이 통 속의 술은 살아있는 겁니다. 누룩작업을 한 술밥을 물에 담그고, 상태를 보아가며 고두밥을 한 번 더 넣고, 그리고 8일 정도가 되면 숙성이 됩니다. 시큼한 향이 나죠? 자연탄산의 향입니다. 숙성이 잘 되면 자연적으로 탄산이 발생합니다. 이게 진짜 우리 막걸리의 향이고 맛입니다. 술이 익는 동안에는 아침저녁으로 온도를 잘 맞춰야 합니다. 추울 때는 열풍기를 틀어줘야 해요. 술에 다른 냄새가 배어들면 안되니까 열풍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열풍기 하나가 술통 앞에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막걸리 향만 맡았는데도 서서히 취기가 도는 듯했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 밀려왔다.
 
사입실 옆은 술밥을 짓는 방이었다. 쌀 20가마가 넘게 들어가는 큰 밥솥이 놓여있었다. 이 밥솥만을 위한 큰 보일러도 따로 설치돼 있었다. 상동양조장은 경남지역에서 생산되는 쌀로만 막걸리를 만든다고 했다. "밥 짓는 냄새만 맡아도 잘 된 밥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술 거르는 향만 맡아도 잘됐는지 아닌지도 알아야 하구요."

▲ 상동양조장의 3대째 사장을 맡고 있는 박대흠 대표.
박 대표는 이어서 누룩 작업 중인 입국실로 안내했다. 젊은 시절부터 누룩작업을 해왔다는 어르신 두 명이 술밥에 누룩(효모균)을 뿌리고 비비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중요하고 까다로운 작업이지요. 공기순환을 시켜가며 48시간 두어야 합니다.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두 분은 부산에서 오십니다. 두 분은 일흔을 앞두고 있어요. 오전 5시부터 일을 시작해 오후 2시쯤이면 일을 끝냅니다. 새벽일이고, 또 힘드니까 젊은 사람들이 일을 배우려 하질 않아요. 일 배우러 왔다가도 며칠 견디지 못하고 가버리지요. 이대로 가면 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질 터라서 걱정입니다."
 
상동양조장은 큰 주류제조회사처럼 신식설비를 설치할 수 없는 탓에,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고 있었다. "술을 만드는 일은 아기를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가 감기 들지 않게 보살피듯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게 중요합니다.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잡균이 들어가지 않도록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박 대표는 막걸리를 만드는 과정을 두고 "설명해서 가르쳐줄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머리로 배우면서 몸으로 익혀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소한 3년 이상을 양조장에서 함께 생활해야 익힐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늘 날씨에 신경을 써야 해요. 일기예보를 일주일 이상 파악하면서 술을 만듭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기온이 오르는지 내리는지, 습도가 높은지 낮은지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변했다 싶으면 곧바로 작업장으로 가서 온도와 습도를 맞춰줘야 합니다." 
 
상동양조장의 작업장을 둘러보는 동안 기자가 느낀 것은 '이렇게 깨끗할 수가!'였다. 박 대표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청소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먹는 음식을 만드는 일인데요."
 
▲ 오랜 세월 김해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상동탁주.
상동탁주는 김해사람들에게도 익숙하지만 다른 지역에도 많이 알려진 술이다. "대동, 대저, 부산, 창원에서도 상동탁주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때는 직원이 20명, 기사만 7~8명 정도였죠. 술을 달라는데 없어서 못주는 일도 있었죠. 술이 익는 데는 7~10일 정도 걸리는데, 그걸 모르고 당장 술을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구요. 부산의 유명 식당인 옥미아구찜에서 우리 술을 받습니다. 언젠가 일본 단체여행객들이 부산 조방 앞에서 식사를 하면서 상동탁주를 특별히 주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상통탁주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의 한 가게에서 "맛있는 막걸리"라며 한 잔 걸친 덕에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 젊은이가 상동양조장을 찾아왔다. 김주완(33) 씨. 그는 영업총괄 업무와 기사 일을 맡게 된다고 했다. 그는 계명대학교 관광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유통회사를 다니며 영업을 하다 상통탁주를 알게 됐다. "상동탁주가 맛있고, 비전이 있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100% 우리쌀로 만드는 상동탁주에 제 인생을 한번 걸어 보려구요. 부모님을 1년 정도 설득했습니다. 부모님도 상동탁주 맛을 보더니 허락해주셨어요." 김주완 씨는 "젊은 사람이 체계적으로 일을 배우고 만들면 유통도 잘 되고, 우리 막걸리의 미래가 밝아지지 않겠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참, 상동양조장을 '공간&'에 소개한다고 했더니 상동탁주의 오랜 팬인 한 김해시민이 이 말을 기사에 꼭 써달라고 부탁해왔다. "가야문화축제할 때, 김해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할 때, 김해에서 만든 막걸리를 맛보게 하자"고.
▶상동양조장/상동면 대감리 634. 055-323-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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