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믿자면 연자루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 이전부터 있다가 구형왕 9년에 한 번 사라졌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문헌이나 실제의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것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김해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보니 가락국과 관련시켜 이러한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져온 것으로 보인다.
 
연자루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허정 문 앞이며 객관의 후원이라고 하면, 지난 3월 19일자 <김해뉴스>에 실린 다른 건물의 위치와 비교하여 그곳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객관의 후원이라면 현재 동상동 연화사(蓮華寺)가 바로 그곳이라는 말이 된다. 이곳은 김해의 상징이니만큼 수많은 시인들에게 시의 소재가 되었으므로, 시의 편수가 대단히 많다. 편의상 가장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부터 보되 시대별로 뽑아서 감상하도록 하자.
 
다음은 고려시대 주열(朱悅·?~1287)의 시다.


연자루 사라진지 물어보자 몇 년인지 
푸른 깁과 구슬 발은 이미 티끌 되었네 
호계는 울며 흐르나니 언제나 다할까 
구름 흩어져 천 년토록 사람 볼 수 없구나 

燕子樓亡問幾春(연자루망문기춘)
碧紗珠玉已成塵(벽사주옥이성진)
虎溪鳴咽何時盡(호계명열하시진)
雲散千年不見人(운산천년불견인)

 

 
<이학규, 금주부성고적십이수 증이약소 청뢰각(金州府城古迹十二首 贈李躍沼, 晴䨓閣)>  


▲ 연자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상동(東上洞)의 연화사(蓮華寺). 지금의 사찰 건물도 누정인양 연못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김병찬 기자 kbc@gimhaenews.co.kr
주열은 원종(元宗)과 충렬왕(忠烈王) 때 경상도 일대의 안렴사(按廉使)·계점사(計點使)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 시는 당시에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구에서 보듯 연자루는 주열이 이 시를 읊을 당시에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이 당시는 왜구의 침입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고, <동국여지승람>에 '삼별초(三別抄)가 군사를 나누어 경상도 방면으로 향하였는데, 금주가 변방에 있었으므로 적의 침공을 먼저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삼별초가 김해로 들어왔던 원종 11년(1270)의 전란 때 불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는 주열이 경상도 안렴사로 파견되었다가 교체되었던 원종 12년(1271)에서 13년(1272) 사이나, 경상도 토점사로 파견되었던 충렬왕 4년(1278)에서 5년(1279) 사이에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원종 12년에서 13년 사이로 보기에는 연자루가 사라진 것이 1~2년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연자루가 사라진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라는 구절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의 창작 연대는 연자루가 사라지고 난 뒤 8~9년이 지난 충렬왕 4년과 5년 사이로 보는 것이 옳겠다.
 
이로 보아 연자루는 1270년 이전에 세워졌다가 삼별초의 침공으로 불탔던 것이 다시 세워졌고, <동국여지승람>의 '객관은 정통(正統) 계해년(1443)에 부의 관청 건물의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부사 박눌생(朴訥生·1374~1449)이 중건하고 안숭선(安崇善·1392∼1452)이 기문을 지었다'는 기록과, 조선조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함허정 기문에 '지금의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이미 연자루를 중수하였고'라는 내용에서 보듯이 1443년 관청 건물들이 불탈 때 함께 소실되었다가 15세기 후반 부사 최윤신에 의해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자루는 뒤에도 여러 차례 새로 짓거나 수리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철거되었고 건물의 일부는 서울 방면으로 매각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시를 보기로 하자.


옛 가야 찾아오니 봄풀 빛이로다 
흥망이 몇 번 변해 바다가 티끌 되었나 
당시에 애끊으며 시를 남긴 나그네들 
마음 맑기 물과 같은 사람으로부터라네  

訪古伽倻草色春(방고가야초색춘)
興亡幾變海爲塵(흥망기변해위진)
當時腸斷留詩客(당시장단류시객)
自是心淸如水人(자시심청여수인)

 

 
 
이 시는 제목이 대단히 길다. 풀이해서 보면 '옛날 재상(宰相) 야은( 隱) 전(田) 선생이 계림판관(鷄林判官)이 되었을 때 김해 기생 옥섬섬(玉纖纖)에게 준 시가 있는데, 10여 년 뒤에 야은이 합포(合浦)로 와서 지킬 때 옥섬섬은 이미 늙었는데, 그녀를 불러 곁에 두고 날마다 가야금을 타게 했다. 내가 그것을 듣고 그 운에 화답하여 벽에 네 개의 절구를 적는다'라는 것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 신선의 산 일곱 점이 푸르고 
거문고 가운데 흰 달 하나 밝구나 
세상에 섬섬의 손이 있지 않았으면 
누가 태고의 정을 탈 수 있으리   

海上仙山七點靑(해상선산칠점청)
琴中素月一輪明(금중소월일륜명)
世間不有纖纖手(세간불유섬섬수)
誰肯能彈太古情(수긍능탄태고정)

 

 
<전녹생, 증김해기옥섬섬(贈金海妓玉纖纖)>  


제목에서 보이는 야은은 전녹생(田祿生)으로, 그는 1364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서 원나라에 다녀와 계림윤(鷄林尹)이 되었는데, 이상의 이야기에서 보면 그가 옥섬섬을 만나 시를 준 것은 바로 이때다. 그리고 1367년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왔을 때 다시 그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구절 '마음 맑기 물과 같은 사람'은 앞에서 보았던 주열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고려사>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주열은 용모가 추하고 코가 썩은 귤 같아서 제국공주(齊國公主·고려 충렬왕비)가 처음 와서 많은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주열이 일어나서 축수(祝壽)하니 공주가 놀라면서 "어찌 갑자기 늙고 추한 귀신으로 하여금 가까이 오게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용모는 귀신같이 추하지만 마음은 물과 같소"라고 하였더니 공주가 공경하고 귀하게 여겨 잔을 들어 마셨다.
 
▲ 연자루의 기둥에 썼던 석재의 일부.
고려 말 조선조 초의 시인 권근(權近·1352~1409)은 주열과 전녹생의 시에서 운(韻)을 빌어 연자루를 노래하였다. 그는 13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문제가 되어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흥해(興海)·김해(金海) 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가 김해에 온 것은 이듬해 윤 4월이었고, 5월에는 청주(淸州)로 다시 옮겨졌으니 김해에 머문 것은 약 한 달이다.
 
그는 연자루에서 세 수의 시를 남겼는데, 제목은 '김해 연자루 시 세 수를 차운하여'다. 제목처럼 첫 번째 시는 경(庚)자 운을, 두 번째의 것은 진(眞)자, 마지막의 것은 침(侵)자 운 등 앞선 시인들의 세 개 운을 이어 쓰고 있다.


가락국 옛터엔 풀 나무 푸르고 
바다 하늘 드넓어 눈이 활짝 트인다 
이 날 누각에 올라간 나그네 
나라 떠난 연연한 정 견디기 어렵구나   

駕洛遺墟草樹靑(가락유허초수청)
海天空闊眼增明(해천공활안증명)
樓中此日登臨客(루중차일등임객)
去國難堪戀戀情(거국난감연연정)

 

 
 
임금이 있는 서울을 떠나 변방 김해까지 온 나그네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연자루에 오른 시인의 눈 앞에 펼쳐진 옛 가락국의 수도 김해의 풍광이 이를 달래주는 듯하다.


곱디 고운 옥같은 손 이팔이라 청춘 
춤추는 비단 치맛자락에 향기가 인다 
글 잘하는 야은은 거문고에 취미 있었지 
높은 풍류 이어받은 이 몇이나 되는고 

玉手纖纖二八春(옥수섬섬이팔춘)
舞衫羅襪動香塵(무삼나말동향진)
文章埜隱琴中趣(문장야은금중취)
能繼高風有幾人(능계고풍유기인)

 

 
 
여기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야은 전녹생과 옥섬섬의 사랑 이야기는 오늘도 거문고 소리인양 시인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오니, 이것이 눈앞에 펼쳐진 김해의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다.

해변에 귀양온 나그네 머물러 있나니 
하늘가 높은 누대 오를 만하여라 
한 시대의 풍운은 옛일 되었는데 
천년의 능묘만 지금껏 남았구나 
제비 나는데 주렴에는 장마비 내리고 
앵무 지저귀는 동산 수풀엔 녹음이 짙어라 
적막하여라 웅대한 뜻도 계절에 놀라 
몇 번이나 서쪽 바라보며 헛되이 시를 읊조렸나  

海邊逐客方留滯(해변축객방류체)
天畔高樓可上臨(천반고루가상임)
一代風雲成太古(일대풍운성태고)
千秋陵墓至如今(천추능묘지여금)
燕飛簾幕黃梅雨(연비렴막황매우)
鶯囀園林綠樹陰(앵전원림녹수음)
寂寞壯心驚節序(적막장심경절서)
幾回西望費長吟(기회서망비장음)

 

 
<권근, 차김해연자루시삼운(次金海燕子樓詩三韻)>  

그러나 옛 가락국은 유배된 자신의 신세마냥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 사라져버리고 무덤으로만 남아 웅대한 뜻보다는 옛 추억만을 되새기도록 하고 있다.
 
고려말 조선조 초기 시인 조준(趙浚·1346~1405)은 다음과 같이 연자루를 읊었다.


거울 같은 바다와 산은 맑기도 하고 
아름다운 물결머리로 석양이 밝구나 
고맙구나 가야 그 옛날의 달빛이 
밤 깊어 누각에 기댄 마음 두루 비춰주니   

烟鬟鏡面海山靑(연환경면해산청)
雲錦波頭夕照明(운금파두석조명)
多謝伽倻舊時月(다사가야구시월)
夜深偏照倚樓情(야심편조의루정)

 

 
<조준, 차김해연자루운(次金海燕子樓韻)>  


연자루는 가락국의 정서를 가슴에 품고, 김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가득 펼치고 있다. 특히 달이 비치는 밤이면 연자루에 오르는 사람의 감성 속에 더욱 짙게 물든다. 그 옛날 호계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울린 연자루의 모습이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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