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스토리텔링 김해 여행
"바다 건너 왜의 땅에 대금관국의 아들나라를 반드시 세울 겁니다"(16) 수로왕의 공주, 일본 최초 왕이 되다
  • 수정 0000.00.00 00:00
  • 게재 2014.04.08 16:01
  • 호수 168
  • 13면
  •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kkim40@hanafos.com)

#1 아름다운 여왕, 비미호(卑彌呼)
하얀 꽃송이가 하르르 하늘에 휘날렸다. 꽃송이들은 돌개바람에 휘말리기도 하고, 산바람 따라 빙글 빙글 돌기도 했다. 사쿠라의 계절, 봄이었다. 여왕 비미호는 하얀 흙이 깔려 있는 궁궐 마당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백토 위에는 붉은 여명이 조금씩 비치고 있었고, 그 위로 벚꽃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한 달 후가 되면 그리운 고향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기다려진다. 고향의 배가."

여왕의 얼굴에 밝은 빛이 감돌았다.

   
▲ 야마타이국 히미코(卑彌呼)의 묘로 추정되는 일본 나라 현의 하시하카 고분.
"조카인 마품왕께 청을 넣어 고향의 배와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배를 교환하자고 했었지. 내 그 배를 바라보며 늘 어머니의 나라, 금관국을 생각할 것이다."

여왕의 눈동자에 붉은 색감이 감돌았다.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술 또한 지극히 붉었으며 반듯한 아미에선 투명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섬섬옥수 긴 손을 들어 여왕은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머릿결을 매만졌다. 요염한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칼은 이 세상 그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듯이 매력적이었다. 어느덧 그녀의 나이 사십 중반이었지만 얼굴과 몸매는 이십대 못지않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전 깊숙한 곳에 있는 제단으로 향했다. 두 명의 시녀가 구리거울과 청동방울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시각은 묘시의 중간이었다. 얼마 있으면 태양이 떠오를 것이었다. 그때를 맞춰 비미호 여왕은 하루를 시작하는 제를 올려야 했다. 자신이 만든 야마타이국과 어머니의 나라인 금관국을 위해. 또한 야마타이국이 다스리는 모든 부족의 평화를 위해.
 
제당은 비미호 여왕의 침전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얀 장막을 걷으면 가운데에 금빛 찬란한 제단이 나타났다. 장막 사이에는 가향을 풍기는 초가 조용히 타고 있었다. 서창을 통해 서서히 태양빛이 들어왔다. 여왕 비미호는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들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비미호는 여왕이자 무녀였다. 바다 건너 금관국에서 공주로 곱게 자란 그녀. 허나 이십 년 전, 수로왕족의 미래를 위해 남동생 선견 왕자와 함께 척박한 섬나라로 건너왔다. 천손으로 이 땅에 내려와 150년 간 금관국을 다스렸던 아버지 수로왕은 바다 건너 왜의 땅을 주목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수로왕족이 최후로 머무를 곳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시면서. 비미호 여왕은 눈을 감은 채 금관국과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렸다.
 

#2 바다 건너 왜의 땅으로 가야할 운명, 묘견 공주
   
▲ 히미코 인형.
"대왕이시여, 장차 저 아이는 이 가락국보다 더 넓은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렇소. 왕후여. 비록 아녀자로 태어났지만 묘견 공주는 제왕의 풍모를 가지고 있소. 우리 수로왕족의 미래가 어쩌면 저 아이에게 달려 있는지도 모르오."

수로왕과 허왕후는 봉황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왕후의 옆에는 어린 공주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궁궐 옆의 넓은 잔디밭에는 스무 명 남짓한 소녀들이 나무칼로 무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소녀들은 하나같이 앳된 얼굴에 예쁜 용모였고 긴 머리를 잘근 묶은 모습이었다. 그녀들의 이마에는 붉은 띠가 매달려 있었고, 검은 색으로 '수국(守國)'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들의 맨 앞에는 봉황 무늬가 새겨진 황금색 옷을 입은 소녀가 당당히 서 있었다. 수로왕의 첫째 공주인 묘견이었다. 방년 18세의 꽃다운 나이. 휘황찬란한 태양빛이 묘견 공주의 머리 위로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일단의 건장한 청년들이 잔디밭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풍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는 이는 수로왕의 첫째 아들이자 장차 왕위를 이을 거등 왕자였다. 그 뒤로 아홉 명의 왕자들이 말을 타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는 16세에 접어든 선견 왕자가 타고 있었다.
 
"오라버니들!"
"어머, 왕자님들이다."

묘견 공주는 소녀들과 함께 왕자들에게 달려갔다. 왕자들은 말에서 내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구, 우리 묘견이가 오늘도 무술 연습을 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장차 이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 너머 먼 곳에 나라를 세울 거예요."
"하하. 묘견 공주의 꿈이 웅대하구나. 우리 형제들 중 포부가 가장 넓지."

거등 왕자는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묘견 공주를 칭찬했다.

"그래. 너의 말이 옳도다. 우리 묘견이가 제왕의 풍모이지."

우렁우렁.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그윽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미물마저 굴복시키는 신성한 존재, 수로왕이었다.

   
▲ 히미코 여왕의 초상과 구리거울.
"아바마마. 오셨습니까?"
"오냐. 허허. 그래 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신라와 대방군에 철정을 보내주기로 약조하였습니다."
"호호. 그래 수고했구나. 우리 왕자들이 금관국의 살림꾼들이야. 어미로선 여간 기쁜 게 아냐."
"모두가 두 분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오라버니. 저도 빨리 바다를 건너고 싶어요. 가서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어요."
"묘견아.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너는 이미 바다 건너 저 먼 땅으로 가기로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단다. 이 어미가 아유타국에서 금관국으로 오는 그 순간에 벌써 말이다."

허왕후는 묘견 공주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깊숙이 쳐다보았다. 묘견 공주는 어머니의 눈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었다. 아유타국에서 오신 어머니. 부처님의 신성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외삼촌인 장유화상과 더불어 수만리 뱃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가르침과 아버지의 혜안을 따라 자신은 남동생과 함께 왜의 땅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것이 운명이며 수로왕족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했다. 묘견 공주는 하루속히 가고 싶었다.
 

#3 묘견과 선견, 바다 건너 왜의 땅으로 가다
"너무 험난한 세월이었어. 아직도 할 일은 남았지만."
 
   
▲ 가고시마의 히미코신사에 있는 히미코 석상.
내전에서 제의를 마친 여왕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곧 그녀는 연노란 옷을 펄럭이며 내전을 나와 대전 마당으로 걸어갔다. 마당가의 벚나무로 간 그녀는 하르르 날리는 벚꽃을 두 손으로 받는 시늉을 했다. 뒤에 선 시녀들이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뭇 남성들보다 몇 갑절은 포부가 크고 당찬 여왕이지만 꽃을 보는 순간은 보통의 여인과 마찬가지였다.
 
"누님. 아직도 소녀 같은 행동을 하오?"
"허. 어서 오시오, 대부. 떨어지는 벚꽃이 너무 처량해서 말이오."
"혹여 그게 누님 마음이 아닐는지?"

대답대신 여왕은 손에 쥔 벚꽃을 허공에 날렸다.

"출정 소식이나 전해주게나. 일지국과 대마국에게선 충성을 받아냈는가?"
"여부가 있습니까? 노국과 이도국도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나이다. 단지 말썽을 피우는 나라가 하나 있군요."
"또? 우리가 삼천의 무리를 이끌고 금관국을 떠나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그 나라는 우리를 방해했지. 그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있어. 내 이제는 용서할 수 없어!"

비미호 여왕은 입술을 깨물며 굳은 결기를 다지고 있었다.

이 십 년 전, 묘견 공주와 선견 왕자는 별포 나룻터에서 왜의 땅으로 출발하였다. 병사들과 백성을 태운 백 척의 배와 함께. 금관국의 2대 왕이 된 거등왕은 수로왕의 유지를 받들어 바다 건너 왜의 땅에 금관국의 아들 나라를 세우기로 했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묘견 공주와 선견 왕자를 파견하려는 것이었다.

"묘견 공주. 이제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너의 꿈을 펼칠 때가 되었다. 가서 우리 금관국의 아들 나라를 세워다오."
 
실바람이 불어와 묘견 공주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녀는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바야흐로 태양의 무녀 비미호는 수로왕족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왜의 땅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묘견은 거등왕의 전송을 받으며 힘차게 돛을 펼쳤다. 하늘은 더없이 쾌청했고, 바람은 적당하게 불고 있었다. 별 탈이 없다면 삼천의 무리는 한 달 만에 왜의 땅에 도착할 터였다. 이미 왜의 땅에 건너가 있는 금관국 사람들과 연통은 되어 있었다. 왜인들은 아주 작은 부족국가를 세우고 있었는데, 대다수는 이미 금관국의 높은 철기 문화와 문물을 숭상했다. 그래서 그들과 화친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단지, 고약한 나라가 하나 있다고 했다.
 
묘견은 가급적이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왜의 땅에 금관국의 아들나라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 저항하는 세력은 반드시 있기 마련. 그들과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금관국을 출발한 묘견과 선견은 쿠마가와 강까기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 도읍을 정하고 여덟 개의 성을 세웠다.
 
묘견공주는 일지국과 대마국, 이도국, 미마국, 나카토국 등을 차례차례 병합하였고 금관국에서 갖고 온 높은 문물을 전해주었다. 여러 소국들은 묘견 공주를 비미호라고 부르며 여왕으로 추대하였고 나라 이름을 야마타이국이라고 칭했다. 마침내 금관국의 아들나라가 왜의 땅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나라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구노국이었다.
 

#4 구노국을 정벌하고 진정한 여왕으로!
   
▲ 히미코 궁전으로 추정되는 나라 현의 터.
야마타이국과 구노국은 양측의 접경지대인 에비노 고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구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지형지물에 익숙지 않은 야마타이국의 병사들이 구노국의 함정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구노국에게 대패한 묘견과 선견은 쿠마가와 강 상류로 도피하여 급히 금관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화답한 거등왕은 병사 삼천과 장수 이찬을 파견했다. 묘견과 선견은 이찬의 도움을 받아 다시 에비노 고원에서 구노국과 일대 혈투를 벌여 마침내 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노국은 완강했다. 에비노고원에서 물러났을 뿐, 결코 그들 본영의 땅이 침범당한 것은 아니었다. 비미호 여왕도 더 이상 진격하다간 예전처럼 몰살의 위험이 있어 에비노 고원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그 구노국이 다시 야마타이국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 결코 용서치 않으리. 두 번씩이나 함정에 빠질 수는 없지."

비미호 여왕의 두 눈동자에서 광채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아버지 수로왕의 말을 떠올렸다.

"바다 건너 왜의 땅은 우리 수로왕족이 최후로 머물 땅이다. 반드시 그곳을 정복하여 우리 종족의 미래를 도모해야 하느니라."

여왕은 시녀에게 갑옷과 칼을 갖고 오라고 했다. 황금빛 투구에 황금색 갑옷을 입은 여왕은 긴 칼과 짧은 칼을 허리에 차고 마당가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궁궐 마당에는 이미 수많은 병사들이 무구를 갖춘 채 출정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미호 여왕은 그들 병사 앞으로 나아갔다.
 
"대 금관국의 후예이자 야마타이국의 자랑스러운 병사들이여. 이제 우리는 철천지원수 구노국을 정벌하고 진정한 왕국이 되고자 하오. 반드시 구노국을 합병하여 이 땅에 금관국의 나라를 세울 것이오!"
 
여왕의 말에 수많은 병사들이 기치창검을 흔들며 환호했다. 그 옆의 선견 왕자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기를 나타냈다. 이제, 마지막 전투가 남았다. 이 전투만 성공하면 수로왕족의 미래는 탄탄대로가 될 것이었다.
 
"전군, 총 진격!"

선견 왕자의 말에 대궐 마당을 가득 채운 병사들과 대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모두 행군을 시작했다. 파죽지세! 그들의 높은 사기는 구노국을 한 달음에 멸망시킬 것 같았다.

태양이 붉게 타올랐다. 여왕 비미호는 그 태양으로 날아가는 삼족오였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온 몸에 넉넉히 안은 신비의 무녀, 비미호가 진정한 여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대한민국, 브라질에 0-3 패배... 벤투 체제 최다 실점대한민국, 브라질에 0-3 패배... 벤투 체제 최다 실점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비밀글로 설정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