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자루가 있었던 연화사와 멀리 뒤로 보이는 분산의 풍경에서 옛 가락국의 풍취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김병찬 기자 kbc@gimhaenews.co.kr
연자루는 고려시대의 주열(朱悅·?~1287)이 시로 읊은 이래 정몽주(鄭夢周·1337~1392), 권근(權近·1352~1409), 조준(趙浚·1346~1405) 등 고려조 시인들이 이를 이었다. 이제는 조선조 초기 시인 이원(李原·1368~1430)의 시를 보자.
 

앵무주 가에 방초는 푸르고 
등왕각 위 저녁놀이 밝구나 
이 가운데 당시의 흥이 있어 
술 들고 바람 맞으니 탈속의 마음    

鸚鵡洲邊芳草靑(앵무주변방초청)
騰王閣上落霞明(등왕각상낙하명)
箇中亦有當時興(개중역유당시흥)
擧酒臨風物外情(거주임풍물외정)

 

 
<이원, 차연자루시 이수(次燕子樓詩二首)>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최호(崔顥·?~754)는 중국 강남의 3대 누각 가운데 하나로, 호북성 무창부 강하현(湖北省 武昌府 江夏縣) 서남쪽 양자강(揚子江) 가에 있는 황학루(黃鶴樓)에 올라가서 '등황학루(登黃鶴樓)'라는 시를 읊었는데, 그 시에 '春草萋萋鸚鵡洲(춘초처처앵무주·봄풀은 앵무주를 무성하게 덮었네)'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중국 강서성 남창현(江西省南昌縣)에 있는 등왕각(騰王閣)은 황학루와 함께 그림으로 자주 묘사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시인은 연자루에서 느낀 흥취를 이 중국 최고의 누각에서 느낀 중국 시인묵객들의 그것에 비유하며, 마치 세속을 벗어나 신선의 세계에 있는 듯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이원보다는 거의 100년 뒤의 시인 성현(成俔·1439~1504)의 시다.


천 그루 초록빛 나무 속 그림 누각 깊고
감귤나무가 아득하구나 누각에 올라본다
호계 흐르는 물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분산의 덧없는 구름은 예나 지금이나
수로왕릉 황폐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네
초현대 무너졌으니 그 세월은 얼마인가
금관의 지난 일 찾아도 찾지 못하고
시인에게 주어 마음껏 시 읊게 하네

綠樹千章畵閣深(녹수천장화각심)
木奴邈我一登臨(목노막아일등림)
虎溪流水朝還暮(호계유수조환모)
盆嶺浮雲古又今(분령부운고우금)
首露陵荒多歲月(수로능황다세월)
招賢坮廢幾晴陰(초현대폐기청음)
金官往事尋無覓(금관왕사심무멱)
付與騷人謾苦吟(부여소인만고음)

 

 
<성현, 차김해연자루운(次金海燕子樓韻)>  


연자루 주변은 숲이 잘 조성되었던 듯 시인은 누각이 숲 속 깊숙이 있다고 하고, 우뚝하게 높은 모양을 감귤나무가 아득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연자루 밖에서는 아름다운 연자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연자루 위에 오르자 연자루의 아름다움보다는 안타까운 세월 속에 사라져버린 가락국에 대한 감상이 시인의 모든 감각을 지배하게 된다.
 
성현은 이 외에도 자신의 선친(先親) 성염조(成念祖·1398~1450)가 경상도 관찰사로 왔을 때 지은 연자루 시에서 운을 빌어 선친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선친께서 말고삐 잡은 지 몇 봄이 지났나
시판 위 성명은 있는데 자취는 사라져버렸네
요아를 다 읽고는 자주 눈물 훔치니
뜰을 지나갈 때 예를 묻던 건 그 누구였나

家君攬㘘幾經春(가군람비기경춘)
板上名存跡已塵(판상명존적이진)
讀罷蓼莪頻收淚(독파요아빈수루)
趨庭問禮是何人(추정문예시하인)

 

 
<성현, 봉차연자루선군운(奉次燕子樓先君韻)>  


세 번째 구절의 '요아(蓼莪)'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한 편으로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는 자식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은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네. 그 은덕을 갚으려 해도 하늘은 넓고 끝이 없구나"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의 뜰을 지나갈 때 예를 묻던 것은 공자(孔子)가 아들 백어(伯魚)를 가르칠 때 특별히 많은 교육을 시키거나 편애하지 않고, 뜰을 지나다 몇 마디 가르침을 준 데서 나온 이야기다. 시인은 <시경>의 내용에서는 아버지가 계셨던 곳에 와서 뵙지 못하는 마음을, 공자의 이야기에서는 아버지의 그윽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앞의 이원이나 성현보다 100여 년 뒤에 김안국(金安國·1478~1543)은 포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연자루를 읊고 있다.


제비가 짝지어 난 것이 몇 날이었던가 
강남길 가던 나그네 봄을 쫓아 왔었지 
봄바람에 매화는 모두 떨어져버리고 
동백꽃만 빗속에 피어있을 뿐 

燕子雙飛日幾回(연자쌍비일기회)
江南行客逐春來(강남행객축춘래)
東風落盡梅花樹(동풍낙진매화수)
唯見山茶帶雨開(유견산차대우개)

 

 
<김안국, 차연자루포은선생운(次燕子樓圃隱先生韻)>  


그는 시에 설명을 붙여 "내가 왔을 때가 마침 늦봄이었다. 포은의 시를 정중하게 읽었는데, '매화는 이미 다 떨어져버렸네'에서는 오랫동안 슬퍼했다. 매화수(梅花樹)와 강남행(江南行)은 포은의 시 속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몽주는 외교의 임무를 맡고 중국 강남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때 읊었던 시 '강남류(江南柳)'에는 '江南行客歸何時(강남행객귀하시·강남의 나그네 어느 때나 돌아가리)'라는 구절이 있어 고향을 떠나 먼 길을 나선 나그네의 시린 가슴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寄李獻納詹 按行 時金海燕子樓前手種梅花故云(기이헌납첨 안행 시김해연자루전수종매화고운·헌납 이첨에게 보낸다. 김해를 살펴보러 다닐 때 연자루 앞에 손수 매화를 심었다고 하기에 일컫는다)'라는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연자루 앞에 제비는 돌아왔어도
낭군께선 한번 떠나 다시 오지 않네
그때 손수 심었던 매화나무야
물어보자 봄바람에 몇 번이나 피었더냐

燕子樓前燕子回(연자루전연자회)
郞君一去不重來(랑군일거불중래)
當時手種梅花樹(당시수종매화수)
爲問春風幾度開(위문춘풍기도개)

 

 
 
김안국은 정몽주의 나라를 위한 충정과 언양으로 유배되었을 때의 심경 및 연자루에서 느꼈던 감회를 표현하면서, 정몽주에 대한 회고의 감정과 봄이 지나가는 시기의 쓸쓸한 감회를 이입하고 있다.
 
다음은 김안국보다 약 50년 뒤 연자루를 찾은 홍성민(洪聖民·1536~1594)의 시다.


수많은 전쟁 거쳐 왔어도 옛 성은
겁회가 다 날아가 한 언덕 평화로울 뿐
산하가 성곽을 끌어안아 남쪽이 견고하고
바람과 이슬 창문을 침노하니 북쪽 나그네 놀란다
봉화가 저녁 연기 비추니 차갑게 번쩍이는 그림자
뿔피리 바다를 뒤집으니 차갑게 들려오는 물결 소리
하늘 가 물색은 남의 마음 끄는 것 대단하여도
얻은 것은 쓸쓸하여라 구레나룻만 빛나는구나

百戰經來只古城(백전경래지고성)
劫灰飛盡一丘平(겁회비진일구평)
山河擁郭南維固(산하옹곽남유고)
風露侵窓北客驚(풍로침창북객경)
烽照暝烟寒閃影(봉조명연한섬영)
角飜溟海冷傳聲(각번명해냉전성)
天涯物色撩人甚(천애물색요인심)
嬴得蕭蕭鬢髮明(영득소소빈발명)

 

 
<홍성민, 金海燕子樓韻>  


시는 연자루의 아름다움이나 역사보다는 연자루에서 보이는 김해의 분위기에 집중되어 있다. 남쪽 변방인 김해는 오랜 세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굳센 김해인들의 성격만큼이나 단단한 방어는 평화로운 김해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김해는 시인에게는 새로운 경험으로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멀리 떠나온 나그네에게는 쓸쓸함을 더해주는 타향일 뿐이며, 벼슬아치에게는 언제나 근심만 안겨주는 변방일 뿐이다. 홍성민은 두 차례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온 적이 있었으니, 이 시는 당시에 썼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홍성민과 거의 같은 시기 김륵(金 ·1540~1616)의 시다.


평생 꿈 속에서 한 높은 누각 생각했다가 
높은 난간에 기대어보니 마음이 한가로워지네 
만리의 나그네길 못가의 집 밤이 들고 
천 겹 변방의 관문 바다와 산 가을이라네 
차가운 성 돌은 묵었고 인민들은 순박하고 
옛 나라 구름 거칠고 세월이 흐르네 청산에 흥망을 물어보지 말라 
청산에 흥망을 물어보지 말라 
창주 한번 바라보니 사람 마음 근심하게 한다 

平生夢想一高樓(평생몽상일고루)
試倚危欄意轉悠(시의위란의전유)
萬里羈遊池館夜(만리기유지관야)
千重關戍海山秋(천중관수해산추)
寒城石老人民朴(한성석로인민박)
古國雲荒歲月流(고국운황세월류)
莫向靑山問興廢(막향청산문흥폐)
滄洲一望使人愁(창주일망사인수)

 

 
<김륵, 金海燕子樓韻 三首>  


오랫동안 김해 연자루의 소문을 들었던 듯 시인은 누각에 오른 기쁨과 주변 경관에 대한 감탄을 표현하고 있다. 평온하면서 소박한 김해의 모습과 백성들의 태도는 시인의 마음조차 평화롭게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옛 가락국을 생각하면 김해 주변의 산하는 무심하게도 변함없이 아름답다. 시인은 김해를 동쪽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사는 곳인 창주(滄洲)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렇듯 아름답기에 더욱 옛 나라에 대한 감회가 깊어지는 것이다.
 
연자루는 김해 풍광의 대표적 상징이었으며, 가락국의 옛 추억 또한 누각의 그윽한 정취 속에 녹아들어 김해의 역사 또한 그곳에 스며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답답한 시대를 만나 흔적조차 찾을 길 없게 되었으니,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고 정신의 휴식처로 삼았던 수많은 시인들의 시 속에서 자취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아쉽고 불편한 마음이야 이루 말할 것이 있겠는가.


▲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필자는 연자루를 마지막으로 김해의 풍광과 정서를 읊은 한시의 연재를 마감하고자 한다. 김해는 바다와 산과 강과 사람이 어우러져 한 점도 버릴 것이 없는 곳이다. 다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 유적 및 유물의 유지, 복원 등에도 불구하고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이와는 전혀 반대되는 현상들도 나타나게 된다. 필자는 김해가 역동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로 성장하길 바란다.

김해뉴스 /엄경흠 부산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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