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자매의 재회
"아…아직 오지 않았는가?"
"곧 도착하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여왕 비미호는 힘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초점을 잃은 듯한 그녀의 눈동자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던가? 태양의 신비로운 무녀인 비미호도 세월의 무게만은 비켜가지 못했다. 아리따운 아미는 잔주름으로 가득했고 섬섬옥수 고운 손에도 한껏 주름이 들어섰다.
 
쿠마가와 강에서 물안개가 아스라이 피어올랐다. 물안개 사이로 메밀꽃이 하나 둘 보였다가 사라졌다. 더없이 청아한 하늘을 자랑하는 맑은 가을날이었다. 서서히 그 물안개 사이로 작은 점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건 이물과 고물이 한껏 올라간 금관국의 배들이었다.
 
"장군. 금관국의 배들입니다."

황포돛 세 개가 하늘을 찌를 듯이 웅장하게 서 있는 금관국의 배들. 날렵하게 강물을 헤치며 올라오고 있는 배들은 수 십 척의 선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걸 본 야마타이국의 장수 후쿠가와는 비미호 여왕이 있는 스쿠시 성으로 파발마를 보냈다.
 
"아, 나의 동생 일견이 왔단 말이지."

여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옷을 갖고 오라고 명했다. 여왕은 한시라도 빨리 여동생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스쿠시 성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여왕 일행은 쿠마가와 강의 포구에 도착하였다.

"내 동생 일견 공주는 어디 있는가?"

비미호 여왕이 다가오자 금관국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었다. 그 중에는 몇 차례 야마타이국을 오갔던 이루 행수도 끼어 있었다. 곧 이어 사람들 뒤에서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마마, 저 일견, 여기 있나이다."
"아, 일견 공주. 그대가 너무 보고 싶었노라."
 
손을 맞잡은 두 자매의 눈가에 작은 이슬방울이 맺혔다. 정오의 태양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황홀하게 쏟아졌다. 태양의 자매 일견과 묘견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쿠마가와 강의 물안개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눈송이처럼 하얀 메밀꽃들이 두 자매의 머리 위로 날렸다.
 

#태양의 공주, 일견 공주
일견(日見) 공주. 태양을 바라보는 공주. 공주가 태어나던 날, 일곱 무지개가 하늘을 수놓았고 두 개의 태양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건 묘견공주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사람들은 두 자매를 태양의 신이 내려 보낸 존재라고 생각했다.
 

▲ 경남 거창의 우두산 의상봉.
일견 공주가 7세 되던 해였다.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봉황대에서 수국단원들이 훈련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견공주는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언니가 장차 금관국보다 더 넓은 땅을 다스리게 된다고? 일견은 수국단의 행수인 언니 묘견 공주가 더 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로부터 삼 년 후, 묘견 공주는 바다 건너 왜의 땅으로 가게 되었다. 묘견 공주가 떠나던 날, 일견은 언니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수많은 왕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매로 태어난 두 사람이었다. 비록 나이차가 많이 났지만 둘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깊은 정을 쌓았었다. 일견은 눈물을 흘리며 묘견에게 매달렸다.
 
"언니, 제발 나를 두고 가지마. 나도 언니 따라 갈 테야."
"일견아. 내 말 잘 들으렴. 네가 18세가 되면 너는 나를 대신해서 수국단을 이끌어야 해. 그리고 그 수국단과 함께 이 언니가 있는 왜의 땅으로 와야 해. 그럼 우리 둘이서 금관국의 아들나라를 세우는 거야. 우리는 찬란한 태양빛이 넘실대는 땅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알겠지?"

일견 공주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는 언니의 말에 비로소 울음을 멈추었다. 성년이 되면 언니를 도와 금관국의 아들나라를 세운다는 말이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묘견 공주를 태운 배가 바람을 가르며 벌포 나룻터를 힘차게 출발했다. 일견 공주는 멀어져 가는 묘견의 배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묘견 공주가 떠난 후, 일견 공주는 한층 의젓한 모습으로 공부에 열중하였고 무술 연마에 힘을 쏟았다. 그녀는 언니를 대신해서 수국단원을 이끄는 행수가 되었고 금관국 최고의 여전사로 성장하였다.
 
▲ 일견 공주는 호시탐탐 가야를 노리던 도척 무리를 무찔러 우두산 너머 가야산으로 쫓아냈다. 일견 공주가 도척의 무리와 한 판 승부를 겨룬 가조벌 전경.
일견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수로왕은 일견에게 가조벌로 진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금관국과 대가야의 경계지역인 가야산 자락에는 넓은 가조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벌판 뒤에는 소의 머리 형상을 한 우두산이 웅장하게 서 있었고, 자수정처럼 고운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가조벌에는 호시탐탐 금관국을 노리는 도척의 무리들이 있었다. 나날이 금관국의 형세가 번창하던 시절이었다. 수로왕은 언니 묘견 공주에 못지않은 일견 공주에게 가조벌을 점령하여 금관국의 분국을 세우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가조벌을 정벌한 일견 공주
▲ 도척 무리가 근거지로 삼았던 우두산의 험한 산세.
수국단 수백을 이끌고 가조벌 경계지역에 도착한 일견 공주는 파죽지세로 도척의 무리들을 격파해 나갔다. 가조벌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도척의 무리는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얼굴에 흉포한 문신을 새긴 야만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수시로 금관국의 변방을 침탈하여 부녀자를 겁간하고 곡식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흉포한 무리들이라 해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금관국 정예 병사들의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국단의 행수는 금관국 최고의 쇠뇌 솜씨를 자랑하는 일견 공주가 아니던가?
 
공주는 금관국에서 개발한 최신식 쇠뇌 수십 대를 앞세우고 가조벌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마침내 그들은 가조벌을 포기하고 우두산 너머 가야산으로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공주는 가조벌과 우두산 일대를 고천원(高天原)이라 명명하고 소박하지만 작은 궁궐을 하나 세웠다. 그리고 이를 금관국과 비미호 여왕에게 자랑스럽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가야산 너머로 도주한 도척의 무리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도척은 여러 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왜의 땅으로 건너가 구노국이란 나라를 세운 적이 있었다. 구노국은 비미호 여왕의 야마타이국과 경계를 이룬 나라였고 한때는 야마타이국의 병사들을 에비노 고원에서 몰살시킨 적이 있을 정도였다.
 
도척은 구노국과 연통하여 일부 군대는 야마타이국을 치도록 하고 일부 군대는 가조벌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야음을 틈타 가조벌에 당도한 구노국 병사들은 도척의 병사들과 합세하여 일견 공주가 있는 고천원 일대를 총공격하였다.
 
"공주님, 기습입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도척의 무리들인가?"
"바다 건너 왜의 땅에서도 수많은 병사들이 몰려왔습니다. 필시 구노국 병사들인가 합니다."
"구노국? 그 놈들은 내 언니 비미호를 괴롭히던 놈들이 아닌가?"
"맞습니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속히 동굴로 피신해야 합니다."

▲ 가조벌에서 바라본 우두산.
일견 공주는 수국단 부행수 연화의 말에 급히 가조벌 궁성을 빠져 나왔다. 그녀는 우두산 자락에 마련된 동굴에 당도하였고, 전서구 수 십 마리를 날려 금관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시 수로왕은 이미 승하한 뒤였고, 오빠인 거등왕자가 금관국 2대 왕이 된 직후였다. 거등왕은 급히 장수 이찬과 날랜 병사 천 명을 가조벌로 출정시켰다.
 
장수 이찬은 야마타이국에서 이미 구노국 병사들과 맞붙은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그들의 전술을 잘 알고 있는 이찬은 성동격서 전법을 이용하여 구노국 병사들을 차례차례 물리쳤다. 구노국 병사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도척은 장수 이찬에 의해 구노국 병사들이 몰살되자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공주님, 무사하십니까?"
"전 괜찮아요. 구노국 병사들은 물리쳤나요?"
"예. 제깟 놈들이 금관국의 상대가 됩니까?"
"장군은 우리 자매의 은인입니다. 지난번에는 제 언니를 살리시고 이번에는 저를 살리셨군요."
"두 분 자매는 우리 금관국의 보배이십니다. 태양의 정기를 받은 분들이 아닙니까? 일견 공주께서도 조만간 비미호 여왕을 만나게 될 겁니다."
"오라버니께서 그리 윤허하셨나요? 제가 왜의 땅으로 가도 되나요?"
"예. 전하의 윤허가 나왔습니다. 이제 일견 공주께서는 야마타이국으로 건너가셔서 비미호 여왕과 더불어 금관국의 아들 나라를 더 크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게 두 자매분의 운명입니다."

일견 공주와 장수 이찬은 서로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굳은 결의를 하고 있었다. 대 금관국의 위세를 천하에 떨치겠다는.
 

#마침내 태양의 나라에 서다
스쿠시 성으로 돌아온 비미호 여왕과 일견 공주는 내전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왕 비미호는 자리에 누워 가끔 기침을 하며 힘겨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여왕의 눈동자에는 더 없이 기쁜 빛이 떠올랐다. 그런 언니를 일견 공주는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왕이시여. 이제 그만 침소로 드소서. 내일부터 제가 성심성의껏 야마타이국을 돌보겠나이다."
"그래. 나는 이제 명이 다하였다. 나는 여왕이기 전에 천손의 명을 받는 무녀의 몸. 붉은 달이 뜨고 일곱 번째의 태양이 뜨는 날, 내 너에게 세 가지 신기를 전해주고 귀천할 것이다."
"예? 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귀천이라니? 어인 말씀을…."

금새 일견의 눈동자에 눈물이 어리었다. 비미호 여왕은 그런 동생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일견아.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이 또한 하늘이 정한 일. 수로대왕과 어머니 허왕후의 품으로 돌아가 너를 따뜻이 보살필 것이다. 우리 수로왕족은 너와 너의 자손으로 인해 이곳에서 찬란한 금관국의 문명을 일으킬 것이다."
"아, 언니."

그로부터 일곱 번째 날, 시리도록 붉은 달이 떠오른 날이었다. 수쿠시 성의 천제단에서 여왕 비미호는 하얀 옷을 입은 채 생머리를 늘어뜨렸다. 야마타이국의 모든 장수와 병사들이 스쿠시 성을 에워싸고 있었고, 문무 대신들 또한 천제단 주변에 모여 있었다. 비미호 여왕 뒤에는 일견 공주가 무릎을 끊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에 붉은 띠, 황금 갑옷을 입은 금관국 최고의 여전사. 뚜렷한 이목구비에 농염한 허리를 지닌 절세미녀, 일견 공주였다.
 
"하늘이시여. 이제 저는 천손의 부름을 받고 귀천하고자 하나이다. 우리 야마타이국은 대 금관국의 아들나라로서 이곳 왜의 땅에 작은 나라를 세웠나이다. 이제 보다 큰 나라를 세우고자 하오니 저의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어린 소녀들이 붉고 파란 옷을 입은 채 비미호 주변을 맴돌며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차츰 고조되는 동안 비미호 여왕은 늙은 시녀에게 세 가지 신기를 갖고 오라고 했다. 시녀는 커다란 금합자를 갖고 왔다.
 
"이 신기는 세 가지 보물이다. 하나는 옥구슬이니 이는 풍요를 의미하고, 또 하나는 거울로써 천손에게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검이 있나니 이는 강력한 무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이 신기로 일견 공주와 그의 자손들은 이 땅에 대화(大和)의 나라, 야마토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야마토 제국은 대 금관국의 아들 나라 중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될 것이다. 또한 이제부터 일견 공주는 태양의 왕녀, 아마테라스 오오카미로 불릴 것이다."
 
일견 공주는 비미호 여왕으로부터 세 가지 신기를 조심스레 받았다. 차츰 여명이 밝아오면서 태양이 떠올랐다. 일견 공주, 아니 아마테라스 오오카미는 온 몸에 쏟아지는 태양빛을 받으며 옥구슬과 거울, 신검을 하늘 위로 올렸다. 그와 동시에 여왕 비미호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비미호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동안, 아마테라스 오오카미는 드넓은 고천원을, 대 금관국의 수로왕족을, 눈앞에 펼쳐지는 태양의 나라를 생각했다. 세 가지 신기는 그녀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져서 이곳 왜의 땅이 금관국의 아들 나라임을 뜻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늘에서 태양빛이 하염없이 천제단에 쏟아져 내렸고 아마테라스의 세 가지 신기는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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