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가 죽어라." 문인화가 목천 김상옥(55)은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해인사 종정 혜암 대종사가 수좌들에게 남긴 말씀이다. 목천은 15세 소년시절부터 그림을 그려왔으니, '화업(畵業) 40년 인생'이다. "그림 공부 하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림 공부만 하다가, 그림만 그리다가 죽을 겁니다." 그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래서 더 진실 돼 보였다.  "저는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생산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습니다. 공부까지 안한다면 밥버러지인 거죠. 남은 인생, 정말로 공부만 하다 죽을 겁니다." 지난달에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40년 화업 인생을 돌아보는 첫 전시회를 열었던 목천의 작업실 '목천화실'을 찾았다.

▲ 화선지를 펼쳐 묵직한 문진으로 눌러놓고 그림을 그리는 목천의 손놀림이 자유롭다. 산봉우리를 그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산자락 끝은 꽃나무 가지로 이어졌다. 김병찬 기자 kbc@

목천 김상옥의 '목천화실'은 대성동 김해향교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다. 동상동에 있던 화실을 최근에 이곳으로 옮겼다.
 
'목천화실'은 목천과 그의 제자들이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제자들을 위한 공간도 방 하나씩 따로 마련돼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 안쪽에는 잠자는 방이 있다. "자고 일어나 눈만 뜨면 그림을 그려니 여기서 살아야죠. 동상동 화실에서는 출퇴근을 해본 적도 있는데, 그림 그릴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 안되겠더군요."
 
할 수 있었던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오직 그림 그리는 것밖에 …
공부하다 죽으라던 혜암 대종사의 말씀
평생의 그림 과업으로 삼고 살 뿐
내 그림은 추사에게 바치는 나의 답 또 어떤 '필신'이 내손에 올지 …


목천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일곱 살 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진도사람들은 다 그래요. 노래만 잘 하는 게 아니라,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지요. 조선시대 때 유배 온 선비들의 영향도 받았고, 그 후손들도 많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가 방학숙제로 그려간 그림을 보고 미술교사가 깜짝 놀랐다. 그가 그린 그림은 겸재 정선(1676~1759. 조선 후기의 화가.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을 개척한 인물)의 '금강산도'와 중국의 '화조도'였다. 중학교 1학년생의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던지 미술교사가 직접 그려보라고 했다.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내자 미술교사는 가정방문을 왔다. 그리고는 부모에게 '이 아이는 도회지로 내보내 그림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권했다. "김순형 선생님. 그 분을 잊지 못하지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하여 광주로 학교를 옮긴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의제 허백련(1891∼1977. 한국화가. 전남 진도 출생)이 후학양성과 문인화 중흥을 위해 개원한 연진미술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도시락 싸서 학교 가고, 수업 마치면 미술원 가서 그림 그리고, 집에 오면 오후 11시였어요. 한번은 집에서 양식을 보내왔는데, 그게 찹쌀이라.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와 미술원 다니느라 쌀을 사러 갈 시간이 없어 찹쌀밥만 계속 먹었던 적도 있어요. 학교에서 미술원 가는 사이에 쌀 사러 갈 생각 한번 안하고 그림만 그렸던 그 일도 세월이 지나니 다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1983년 군 제대 후 누나가 살고 있는 부산으로 왔다. 그때 두어 달 동안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송정 바닷가에 집을 마련해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989년에 조계종에 입문해 10여 년 간 승려생활을 했다. 다시  환속한 1999년에 그는 김해로 왔다. 사는 곳을 옮기고 학생·군인·승려로 옷을 갈아입었어도 그는 손에서 붓을 놓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스승을 모시고 그림을 그린 적이 없어요. 학교 미술선생님들은 서양화 전공이었죠. 연진미술원에서는 연세 많은 어르신들 틈에서 그림을 그렸고요. 혼자서 연습하고, 그리고, 익히고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그릴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운전을 못해 강의요청이 와도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김해시청에서 '가야 묵향회'를 대상으로 그림강의를 하는 것은 작업실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도 겨우 전화를 걸고 받는 용도로만 사용한다.
 
▲ 목천이 사용하는 붓들이 붓걸이에 가지런히 걸려있다. 이 붓으로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을까.
"꽃과 새를 그릴 때 야생화도감, 식물도감, 조류도감에 있는 것을 모두 다 그려봤다"고 그는 말했다. 기자는 아연실색했다. 원래 그렇게 연습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두꺼운 도감에 소개된 것을, 그것도 여러 권을 그려봤다니 정말 대단한 일 아닌가.
 
그는 김해의 고물상 몇 군데에 "혹시 옛 그림이 입수되면 꼭 연락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해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고물상에서 "대단한 옛 그림이 많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한꺼번에 옛 그림이 많이 나왔다는 말에 설마 하면서 달려가 봤더니, 그 그림은 다름 아닌 목천 자신의 그림이었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려대는 그의 작업실에서는 하룻밤만 자고 나도 버려지는 그림들이 박스에 눌러 담아야 할 정도로 많이 나왔다. 그의 그런 그림들이 오롯이 고물상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버리는 그림들은 찢어서 버렸다.
 
"한림면 쇠실(금곡마을)에 살 때였어요. 마루를 개조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로 꾸몄지요. 그림을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대로 구겨서 마당에 버렸습니다. 어느 날 새벽, 마당에 안개가 가득 밀려들었는데 바람까지 불더군요. 마당에 버린 그림들이 바람에 펼쳐져 안개 가득한 공중으로 떠오릅디다.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았죠. 감동이었습니다. 넋을 잃고 보면서, 그걸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못 그렸습니다. 필력이 따라주질 않는 거죠."
 
필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니, 얼마 전 윤슬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첫 전시회를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일이다.
 
"6, 7년 전쯤이었을 겁니다.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필신(筆神)이 온 것일까요. 2m짜리 화선지를 펼쳐놓고 아무 생각 없이 붓질을 하고 나면 어느새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겁니다. 다시 화선지를 펼치고 나면 또 그려져 있고, 또 그려져 있고. 이때쯤 제 그림이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림도 이전과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 정말 필신이 내게 온 것일까요?" 그의 눈빛이 잠시 허공을 더듬는 것 같았다. "혹시 나 혼자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죠.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그림을 수십 장씩 그립니다."
 
그는 몇 년 전 공부를 위해 보았던 자료와 책들을 모두 버렸다. "그림에는 시대적인 배경과 그림 그린 사람의 사상과 철학이 배어 있습니다. 그냥 그리는 게 아니죠. 잘 그려진 그림을 보면 따라 그려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그림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보고 나면 버리고 내 것을 그려야 합니다. 그래서 다 버렸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마음속에서 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화제집도 버렸습니다. 그림도 글도 모두 나의 것, 나의 작업이라야 합니다."
 
스승을 모시고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태산 같은 스승이 자리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이다. "추사의 그림에서는 외로움과, 쓸쓸함, 모진 아픔이 느껴집니다. 추사의 '불이설란도'를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내 그림은 추사에게 바치는 나의 답입니다. 추사가 남긴 모든 작품에 대한 나의 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첫 전시회에서 '허송세월'이라는 큰 주제의 질문을 던졌다. "나의 40년 화업인생이 허송세월은 혹 아닌지를 대중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허송세월이라니, 당치도 않다. 이름난 대회 출신의 화가도 아니고, 이제 첫 전시회를 열었지만 그의 그 전시회가 던져 준 충격은 컸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화가들도, 그 수제자들도 목천의 전시회 도록을 구하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감동과 충격 때문이었다.
 
▲ 목천 김상옥
일찌감치 그의 작품에 반해 오랫동안 후원을 해 온 사람들도 있다. 김동겸 인제대학교 겸임 교수가 후원회장이다. 김 회장은 "10년 전 한 표구상에서 그림 한 장을 보고 반해버렸다. 그 그림이 목천 선생이 그린 능소화 그림이다. 표구상에서 연락처를 받아 찾아가 뵙고 난 뒤부터 지인들과 함께 후원하고 있다. 목천 선생이 다른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림만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목천은 전시회 때 선보인 작품들을 다시 그릴 계획이다. "300호쯤은 돼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전시장 규모에 얽매이지 않고, 대작으로 그려야 할 그림들은 다시 그려야죠." 그림공부를 하다 죽으리라는 그는 또 말했다. "나에게 또 무엇이 올 것인지 기다려집니다. 내손에 어떤 필신이 올 건지."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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