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불과 물, 쇠에서 태어난 세 선녀
복숭아꽃이 도도히 천하궁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연분홍 꽃 이파리는 돌개바람에 날리다가 솜털 구름 사이로 가볍게 떨어졌다. 오색 무지개 찬란한 빛이 그윽하게 머무는 천하궁 내전. 옥황상제는 옥으로 만든 커다란 그릇 세 개를 앞에 놓고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세 그릇 안에는 각각 물과 불, 달구어진 쇠가 들어 있었다.
 
상제의 옆에서는 홍의동자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자의 눈동자는 천년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맑고 고운 색이었다. 도화꽃잎이 분분히 날리다가 옥그릇 주변을 맴돌았다. 상제는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흠. 오늘은 어떤 존재들을 만들어 볼까? 물과 불, 그리고 달구어진 쇠라.'

옥황상제는 먼저 물이 담긴 그릇으로 다가가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 다음 불이 담긴 그릇에는 콧김을 불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쇠가 담긴 그릇에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쓰다듬었다. 곧 이어 세 개의 그릇 안에서 동시에 하얀 실연기들이 피어올랐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더니 차츰 하나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어디선가 도화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세 형상은 서서히 선녀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바야흐로 물과 불, 쇠의 선녀가 탄생한 것이었다. 세 선녀는 영롱한 눈동자를 굴리면서 옥황상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상제는 세 선녀를 그윽한 미소로 굽어보며 위엄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로고. 이제부터 너희들은 한 날 한시에 태어났으니 자매처럼, 늘 우애와 사랑이 넘치는 관계가 되도록 하라."
"명심하겠나이다."

세 선녀는 흑단처럼 짙은 머릿결을 흩날리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각각 수선과 화선 그리고 금선이 될 것이다. 물에서 태어났으니 수선이요, 불에서 태어났으니 화선이로다. 또한 달구어진 쇠에서 태어났으니 마땅히 금선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화선, 수선, 금선…."

세 선녀는 각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라. 내 너희들을 만든 이유는 장차 인간세에 커다란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니라. 우리 천손족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지혜로운 존재가 인간계로 내려가 세세만년 평안한 나라를 세울 것인즉, 너희들은 그를 성심성의껏 도와야 할 것이다."
"깊이 혜량하겠나이다."

다시 복숭아꽃이 난분분하게 날렸다. 구름 위 저 높은 곳에서 우주의 모든 존재를 감화시키는 소리가 들려오니, 천상의 뭇 존재들이 모두 나와 세 선녀의 탄생을 경하하는 것이리라.
 

2.동시에 한 선남을 사랑한 세 선녀
"내가 제일 먼저 났으니 당연히 내가 언니지. 호호."
"무슨 소리? 상제께서 내 이름을 먼저 불렀으니 내가 언니지. 까르르."
"어머, 얘들 좀 봐. 불과 쇠는 물로 다스릴 수 있지. 그러니 내가 언니야. "

수선과 화선, 금선은 도화나무 아래에서 수미산 이슬로 만든 감로주를 마시며 툭닥거렸다. 상제의 명에 따라 세 선녀는 수시로 인간세로 내려가 선인과 악인을 골라내며 인간의 질서를 바로 잡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선녀들은 인간계로 따지자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인간계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인간계를 살펴보다가 가끔 도화나무 아래에서 망중한을 즐기며 애정 섞인 싸움을 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세 선녀들에게는 또 다른 관심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바로 수로라는 선남이었다.
 
어느 날, 세 선녀는 천손족이 모여 사는 칠보궁에 다녀오게 되었다. 홍의동자로부터 천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족속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세 선녀는 상제 몰래 칠보궁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너무나도 용맹하고 수려한 선남을 보게 되었다.
 
붉은 머리에 황금 갑주를 입은 그는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번개 같은 민첩함을 갖고 있었다. 번개장군의 후예인 그 선남의 이름은 수로라고 했다. 세 선녀는 동시에 수로 선남을 좋아하게 되었고 은근히 서로를 질시하고 있었다. 이 날도 세 선녀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수로 선남을 두고 으르렁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얘들아, 우리 이럴게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 하나 할까?"
"놀이?"

화선의 말에 수선과 금선은 동시에 외쳤다.

"응. 인간들이 한다는 공깃돌 놀이를 한 번 해보자."
"공깃돌 놀이?"
"그래. 가장 오래 공깃돌 하는 사람을 언니로 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 언니가 수로 선남과 인연을 맺는 거야."
"수로 선남과 인연을?"

수선과 금선은 놀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깟 공깃돌 놀이가 대수냐는 표정이 두 선녀의 얼굴에 묻어 있었다.

그때, 수로 선남이 천마를 이끌고 세 선녀들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몸 뒤에서 찬란한 휘광이 반짝였고, 황금 갑주는 수미단 근처에서 나오는 번갯불을 반사하고 있었다. 세 선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로 선남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수로 선남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황급히 그녀들 곁을 지나가고 말았다. 선녀들은 멀어져 가는 수로 선남을 바라보며 묵계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3.공깃돌로 승부를 가리자구
다시 도화나무 아래로 모여든 세 선녀.
 
"자,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아까 말한 놀이를 해보자고. 난 자신 있으니까."
"호호.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 해 볼까?"
"좋지. 자, 공깃돌은 내가 준비하겠어."

▲ 진례면 신안마을에 있는 외톨바위. 수로 선남을 두고 연정을 품은 세 선녀 수선·화선·금선이 공깃돌 놀이로 내기를 하다 그 중 하나를 떨어뜨린 게 외톨바위라는 전설이 전한다.


금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름을 타더니 거산족이 사는 운계산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도화 나무 아래로 인간계의 초가집만한 바윗돌이 날아왔다. 수미산에 맞닿을 정도로 높은 도화나무는 둘레가 천오백보였다. 이렇게 큰 나무이니 인간의 초가집만한 바윗돌은 그저 작은 공깃돌 하나에 불과했다. 선녀들 또한 집 채만 한 바윗돌을 한 손으로 갖고 놀만큼 크고도 넓은 존재들이었다.

"자, 내가 먼저 한다."

화선이 공깃돌 다섯 개를 집더니 허공으로 붕붕 띄워 올렸다. 팔십 아홉, 구십, 구십 셋, 그러나 아이쿠! 아흔 다섯 번째에서 그만 놓치고 말았구나.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화선은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옥황상제님도 무심하시지. 다섯 번만 더 하면 되는데."

하얀 연꽃처럼 해사한 화선의 얼굴에 실망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수선은 옳다구나 여기며 얼른 공깃돌을 집어 들었다.

'아흔 다섯, 아흔 여섯, 아흔 일곱….'
 
수선은 이제 세 번만 더 하면 된다는 기대감을 안고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흔 여덟 번째에서 그만 돌을 떨어트리다니.

"이를 어째? 내가 실수를 다 하다니."

화선과 금선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화선은 수선의 실패에 위안을 가졌고, 수선은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자, 이리 돌 내놓으시지."

수선은 옻처럼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바윗돌 다섯 개를 금선에게 건네주었다. 금선은 호기롭게 공깃돌을 허공에 올려 보냈다. 그런데 세 선녀의 모습을 멀리에서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있었으니….
 

4.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산 세 선녀의 다툼
▲ 외톨바위.
천하궁 내전에 앉은 상제는 옥구슬로 세 선녀가 공깃돌 놀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선녀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옥황상제는 쯧쯧쯧 혀를 차댔다.
 
"저 고얀 것들. 인간세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였거늘. 수로 선남을 사이에 두고 저런 놀이를 하고 있으니."

상제는 조만간에 수로 선남을 인간세로 내려 보낼 생각이었다. 호랑이 형상을 한 땅이 하나 있었고, 바다 건너 일렬로 죽 늘어선 땅이 있었다. 상제는 그 두 곳의 땅을 모두 다스리는 임무를 수로 선남에게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 선녀 중 하나가 수로선남과 인연을 맺으면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행여라도 그리 될까봐 상제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홍의동자는 속히 들어오너라."
"예, 여기 있습니다."

상제가 입을 떼자마자 홍의동자가 나타났다.

"너는 세 선녀 주변에 가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금선이 백 번 째를 하기 전에 내가 부른다고 외치거라. 무슨 말인 줄 알겠느냐?"

홍의동자는 갑자기 깔깔거렸다. 옥황상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상제님. 그리하겠나이다."

홍의동자는 푸른 구름에 몸을 실었다. 동자는 세 선녀가 공깃돌 놀이를 하는 도화나무 근처 번개의 숲에서 몸을 낮춘 채 가만히 있었다. 화선과 수선이 실패하고 이제 금선의 차례가 되었다. 금선은 능숙한 솜씨로 공깃돌을 허공에 띄워 보냈다.

'아흔 일곱, 아흔 여덟, 아흔 아홉…. 이제 한 번만, 단 한 번만 더 하면 모든 것은 끝나는 거지. 호호. 수로 선남은 나의 인연이 되는 건가?'

금선이 막 백 번째 돌을 허공에 날릴 때였다. 번개의 숲을 빠져나온 홍의동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옥황상제님이 부르세요! 빨리 천하궁으로 가야 해요,"

금선은 갑자기 나타난 홍의동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미 백 번 째 돌들은 허공에 올라간 상태였다. 금선은 아차 싶어 손을 뻗었으나 아뿔싸! 돌 한 개가 구름 아래로 떨어지더니 인간세의 산자락에 쿡 처박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본 홍의동자.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은 채 얼른 구름을 타고 줄행랑쳤다. 천하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옥황상제도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5.세 가지 신기를 품고 땅으로 내려온 수로
"이제 이별의 시간입니다. 세 선녀분의 가르침대로 인간세에 내려가 반드시 세세만년 평안한 나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세 선녀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상제의 명에 따라 수로 선남이 인간계로 나가는 방법을 일러 준 선녀들이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수로 선남은 황금상자 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로 선남은 황금 상자 속의 알 속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수로가 다 들어가면 세 선녀가 상자를 황금 줄에 매달아 바다를 접한 인간 세상에 내려 보낼 작정이었다. 이 모든 것은 옥황상제의 뜻이었다.
 
"수로 선남이시여, 자 이걸 갖고 가세요. 이 옥구슬은 인간세를 영원한 풍요의 땅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화선은 비취빛 영롱한 옥구슬을 수로에게 주었다.

"저는 거울을 드리겠나이다. 이 거울로 상제와 저희들을 기억하세요."
"고맙군요. 제가 받아도 될는지…."
"이 모두가 상제의 뜻입니다. 저는 이 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불로 달구어진 쇳물을 녹여 직접 만든 것입니다. 수로 선남이 내려 갈 곳은 쇠와 바다가 만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 부디 천상의 이로운 뜻을 널리 알려주세요."
"이를 말입니까? 상제의 뜻과 그대들의 부탁을 잊지 않으리다. 자, 그럼…."

말을 마친 수로는 황금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는 크고도 넓었다. 세 선녀는 황금상자를 천천히 구름 아래 땅으로 내려 보내기 시작했다. 수로를 실은 황금상자가 천상에서 멀어지고 땅에 가까워지자 수로는 상자 안에서 땅을 향해 외쳤다.

"여기 사람이 있는가?"

황금상자가 땅에 가까워 오자 인간세의 사람들이 이렇게 외쳤다.

"여기 저희들이 있나이다. 저희들이…."

금선이 떨어트린 바위 위에 옥구슬처럼 은근한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었다.





김해뉴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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