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동면 대감리 봉암마을은 대감리에서 감노리 화현마을로 넘어가는 꽃고개 아래에 있다. 마을 양쪽은 산줄기가 감싸고 있고 대포천 건너편으로 신어산이 우러러 보여 풍수지리적으로 안정적인 형세를 띈다. 앞쪽에는 상동에서 흔치 않은 들판이 대포천을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면적이 애매해 살림살이가 먹고 넘치는 정도는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봉암마을은 상동면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고 고속도로에서 가까워 공장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험한 산세 둘러싸여 '꽃고개'로 왕래
금동산 계곡 '암경' 마을 자취 사라져
일제 땐 지맥 끊으려 연화봉에 불질러
1984년 돼서야 대포천 건너 봉암교 설치

이 마을은 20여 년 전부터 들어온 공장에 터를 내준데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마을을 뚫고 지나가 경관을 많이 잃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는 대동IC를 거쳐 낙동강 옆을 타고 올라가지만, 봉암마을에서 안쪽으로 들어와 감노리를 거쳐 삼랑진으로 넘어간다. 봉암마을 동쪽의 산세가 비탈져 강변에 공간이 적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겼다. 옛 사람들도 험한 산세 때문에 꽃고개를 넘어 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한다.
 
봉암마을의 '봉암(蜂岩)'은 꽃과 벌이 많은 들판을 뜻한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봉은 벌을, 암은 바위를 가리키는 한자여서 봉암은 바위 밑에서 벌을 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감노리로 넘어가는 금동산 자락에 꽃고개가 있고 건너편 마을이 화전마을인 것도 이 설명을 뒷받침한다. 마을 사람들은 "꽃고개는 꽃가지에 벌이 붙어 있는 모양의 명당이라 자손이 흥한다"고 믿었다. 동쪽의 연화봉은 벌이 꽃을 찾아 날아드는 모양이라고 해석된다.
 
봉암마을은 여느 자연마을이 그렇듯 1980년대부터 인구가 조금씩 줄었다. 가장 많았을 때가 180여 명이었고, 지금은 원주민은 53가구에 120명 정도가 산다. 주변 공장 직원 등까지 합친 전체 거주민은 230여 명이다.
 
봉암마을은 1984년에야 대포천을 건너는 봉암교가 들어섰을 정도로 외진 편이었다. 이것이 지금은 고속도로에 가깝다는 이유와 함께 공장들을 불러들이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봉암마을과 용전마을 사이의 금동산 계곡에는 '암경'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공장들만 들어섰다.
 
봉암마을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공장 또는 공장에 밥을 대는 식당에서 일한다.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거의 산딸기로 돈을 번다고 한다. 김해는 전국 산딸기 유통량의 70%를 차지하는데, 이를 상동과 대동에서 양분하고 있다. 봉암마을 김수한 이장(38)은 "우리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10여 년 전부터 산딸기를 전략품목으로 정해 최대시장인 수도권에 내다 팔 궁리를 했다"며 "다른 마을에서는 총각들이 결혼하면 고향을 떠나지만 우리는 산딸기 덕분에 바깥에서 신부를 데려온다"고 말했다.
 
▲ 상동면 대감리 봉암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
이 마을은 충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증호조참판이었던 이대형(1543~1592)을 비롯해 절개가 있는 인물이 많이 나왔다. 봉암마을에 무덤이 있는 이대형은 김해성에서 순절한 사충신 중 한 명이다. 그가 순국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시신을 수습하고자 왜군 기지에 잠입한 아들 우두마저 죽임을 당해 두 사람의 신발과 옷을 대신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최근 취임한 성균관유도회 김해지부 회장인 이병태(74) 유림의 고향도 이곳이다.
 
봉암마을 노인회의 김병철(70) 회장은 "예로부터 봉암마을에서는 큰 인물을 많이 냈다. 오죽했으면 일제가 지맥을 끊으려고 연화봉에 올라 구덩이에 나무를 넣고 불을 질렀겠나"라며 "예전부터 봉암마을 주민들은 주변 환경이 아름답고 사람도 올곧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강조했다.

김해뉴스 /최윤영 기자 c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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