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다루는 사람을 목공(木工) 또는 목장(木匠)이라고 한다. 목장은 또 건축물 등 큰 공정을 다루는 대목장(大木匠), 조각과 일반가구를 전문으로 하는 소목장(小木匠)으로 나뉘어진다. 소목장은 건축물에 조각을 하거나 장롱, 함 등의 일반 가구와 서가 등의 문방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소목장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했으며, 관청에 소속된 국가기술자로 대우받았다. 조선 초기까지 소목장들이 만드는 목제가구들은 왕실이나 상류계급에서만 사용됐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에도 소목장들이 만드는 목제가구가 널리 보급됐다. 또한 각 지역의 특성도 그들이 만드는 목제가구에 영향을 끼쳤다. 세월이 변해 가구회사에서 만드는 가구들이 일상화됐지만, 전통기법을 이어가는 소목장들은 아직 건재하다. 김해의 소목장 소국일(46) 씨는 전통기법에 현대적 디자인 감각을 더해 가구를 만들고 있다.

▲ 디자인에 맞게 잘라놓은 목재와 작업실 내부 모습. 김병찬 기자 kbc@
소국일의 공방은 삼계동 김해공원묘원 입구에 있다. 취재를 위해 위치를 확인했을 때 "김해공원묘원 입구로 오라"고 해서 설마 했는데, 정말 묘원 입간판 옆 신명마을에 공방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살면서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오직 나무만 만지고 있다. 공방 입구 바로 앞이 도로라서 차량소음이 목공작업 할 때 나는 소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소국일은 자신을 '가구 만드는 사람'이라 불러 달라고 했고, 작업장에는 간판이 없었다. 그래서 첫 대면에서 '가구 만드는 사람 소국일과 신명마을 공방'이라고, 기사의 작은 제목부터 정했다.
 
소국일은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태어났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두어 시간은 가야 하는 섬이다. 섬에서의 아름다운 유년시절을 잔뜩 기대했는데 그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가 1세 때 가족은 경남 창원으로 이사를 나왔다. 김해에는 20대 초반에 직장을 다니면서 정착했다.
 
"어릴 때 뭔가를 만들어보았고, 멀쩡한 물건을 해체 해보았고…. 아마 이쪽 일 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다 비슷할 겁니다. 저도 별로 다를 게 없어요. 손으로 만들고, 고치고 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무를 가지고 뭔가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죠. 그런데 그 기회가 좀 늦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나무를 만진지는 10여 년, 가구를 만든 지는 5년 여 됐다.
 
▲ 소국일 소목장이 전통기법에 현대적 디자인 감각을 더해 만든 콘솔.
"30대 초반은 경제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좀 힘든 시기였어요. 마음 둘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지요.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나무를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지요. 서각부터 배웠고, 서각을 배우다보니 가구가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양제 류제열, 곡산 이동신을 찾아가 각 1년 여 씩 나무 만지는 일의 기초를 배웠다. 부원동 양제 선생의 공방 2층 수집고에서 먹고 자기도 했다. 그 이후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현재의 자리로 온 것은 8년쯤 전이다. 원래 신명마을 공방은 김해가락오광대 탈 제작자 조지현 씨의 작업장이었다. "조지현 선생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조 선생은 현재 생림면 김해가락오광대탈전수관으로 옮겨 가 계시죠."
 
공방 한 쪽에 쌓아둔 목재를 둘러보다가, 나무를 보면 그 안의 결을 짐작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람 속도 알 수 없지만, 나무속은 켜봐야 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아는 척 하지 않았고, 솔직하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이것이 나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주문이 들어와도 내 기술이 모자라 못하겠다고 사양한 적도 있었어요. 간단한 가구 하나 짜달라고 하는 부탁도 더러 있었지만,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근처 감분마을에서 작업하시는 송유훈 선생을 만나 다시 배웠습니다. 그 분께 많은 것을 배웠지요."
 
▲ 전통기법의 삼층장.
오전 6시께 송유훈의 작업장에 가서 배우고, 일을 하고 나면 훌쩍 시간이 달아나 자정이 되곤 했다. 그 시간에도 송유훈은 1시간 정도 작품에 대한 강평을 해주고, 또다른 숙제를 내주곤 했단다. "배우는 게 너무 즐거웠지요. 반쯤 미쳐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 하루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새날이 오면 또다른 걸 배울 수 있겠지 하면서요. 곡산 선생과 양제 선생에게 배운 기초에 송유훈 선생의 가르침이 더해졌지요."
 
그는 배우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뭐든지 마찬가지이겠지만, 나무 다루는 일은 재미삼아 한 번 해볼까 하고 달려들 일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걸 뒤로 하고 매진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는 일, 사실은 그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취미로 하겠다는 사람도, 이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사람도 배우는 기초과정은 똑같습니다. 똑같이 가르쳐주고, 똑같이 배워도 배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냐 하는 데 따라 결과물은 엄청나게 달라지지요."
 
그는 또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기초를 배우는 일이 능력의 80~90%를 결정짓습니다." 그에게 가구 만드는 일을 배우러오는 사람은 6명. 취미로 배우는 사람도 있고,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는 "내가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먼저 이 일을 배웠기 때문이지, 내가 그들보다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건축디자인 책도 사보고, 유럽의 가구 디자인 책도 사본다. "전통가구를 아파트나 현대식 주택에 놓으면 어딘지 겉돌지요. 전통기법에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접목한 가구를 만들고 싶어요. 아파트에 놓아도 잘 어울리는, 일상생활에 쓰임새가 많은 가구를 전통기법으로 만드는 겁니다."
 
▲ "어떤 디자인이어야 하는가, 어떤 이미지여야 하는가, 이게 떠올라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소국일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가구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디자인 결정이다. "숙련기간에 따라 기술은 늡니다.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죠. 그 고민을 가장 많이 합니다. 공방에 온 사람들이 '지금까지 안 만들고 뭐했냐'고 말하면서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있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는 거죠. 어떤 디자인이어야 하는가, 어떤 이미지여야 하는가. 이게 떠올라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생각한 디자인대로 가구가 완성됐을 때 쾌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100%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직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나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면, 그래도 내가 유명작가가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가끔 지인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작품 만드는 사업가가 될래? 작가가 될래?' 라고요. 어렵고 힘들겠지만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옆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힘들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늘 다짐하고 있습니다."
 
▲ 작업도구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작업장 한 쪽에 작업도구가 가지런히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기자의 눈길이 그쪽으로 가는 걸 본 그가 또, 솔직하게 말했다. "이 도구들은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전통도구, 일본식 도구, 개량도구…. 여기저기를 다니다 눈에 띄면 새 것이든, 다른 사람이 사용한 것이든 마음에 들면 사 모은, 그런 것들입니다." 무심히 툭 던지듯이 말했지만, 기자는 다른 목수들이 사용했던 도구들까지도 정성스레 사 모으는 그의 마음자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마음자리란 모든 것을 아우른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이 혹 아닐까.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