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노 마리니 미술관 내부와 전시 작품. 작가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대표작 '기마상' 시리즈는 말년의 작품으로 갈수록 기수의 몸이 뒤로 젖혀져 표현돼 있는데, 이는 비극의 역사에 대한 불안과 염세, 깊어진 고뇌의 산물처럼 느껴진다.

이탈리아 출신 구상조각의 대표 작가
마리니 마리오 사후 예배당 개조
조각·회화 등 180여점 … 1988년 개관
기수 몸 점점 뒤로 젖혀지는 '기마상'들
초상조각·알몸 여신상 등 작품 속
비극적 역사와 불안·염세 훌륭히 표현

피사의 사탑을 보고 왔다. 꼭 보고 싶은 것도, 아닌 것도 아니었다. 다만 파리의 에펠탑이, 뉴욕에 가면 자유의 여신상이 그렇듯 여기까지 와서 그냥 지나치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었다. 아무튼. 가고 오느라 반나절을 잡은 피사 구경은 예상이 맞아 떨어져 그저 그랬다. 하지만. 숙소를 잡아둔 피렌체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뜻밖의 순간이 있었다. 피사역 노점에서 피자를 샀는데 저녁 겸으로 먹을 요량이었다. 마침 출출한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애초에 소문난 집이었는지 하여간 긴 줄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짭짤한 앤초비라 부르는 멸치젓이 듬뿍 들어간 피자였다. 한입 베어 먹는 순간 그러나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의 기억이 혀에 새겨졌다. 저녁 대신 간단히 먹기로 한 피자 한 조각이 피사여행 전체를 순간 반짝이게 만든 것이다. 겨우 피자 한 조각이.

그렇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그 의외의 순간이 있어서 여행이 비로소 여행다워지는 것이다, 라고. 그것이 비록 다른 사람의 눈엔 시시하고, 아예 보이지 않기도 하고, 실제로도 정말 보잘것없는 그런 것일지라도 말이다.
 
피사를 다녀온 다음날. 숙소를 나와 세면도구만 챙기고 나머지 짐은 피렌체 역에 맡겼다. 1박2일로 근처 토스카나를 구경하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 도착한 곳은 시에나. 한때는 피렌체를 위협할 정도로 강한 도시국가였던 시에나는 토스카나 대부분의 도시들이 그렇듯 1500년대 전 유럽을 휩쓴 페스트를 겪으면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니, 차라리 1500년대 어디쯤에서 시간이 멈춰버렸다고 해야 좋을 만큼 구시가지는 중세의 모습 그대로였다. 골목길을 걸었다. 시에나 특유의 좁은 골목길의 풍광을 더하는 것은 오래되어 비로소 아름다워진 붉으스레한 갈색의 벽돌들이다. 미술시간 색상표에 표기된 바로 그 시에나색이다.

시에나의 골목길은 끊어질 듯 굽이치며 광장으로 이어졌다. 광장 문화라고 부르는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곳. 많은 여행객들이 발을 뻗고 커다란 조가비꼴의 캄포광장 이곳저곳에 앉아 있었다. 마치 무슨 의식을 행하듯 장엄한 풍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나도 슬그머니 광장에 앉아 보았다. 해가 머리 위에서 뜨거웠다. 길을 되짚어 다시 기차를 타고 포기본시 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스로 20여분 떨어진 산지미냐노로 향했다. 먼저 다녀온 누군가 꼭 가보라며 일러줘 하룻밤을 보내기로 작정해둔 터였다.

마을로 가는 길. 그런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익다. 낮은 구릉과 초원 그리고 아스라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오솔길.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늘어선 사이프러스 나무들. 이 풍경들. 그렇다. 그림에서 많이 보았다. 여러 그림들 배경으로 보았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광경의 배경도, 성모가 천사의 방문을 받는 수태고지에서의 배경 풍경도 모두 이곳 토스카나의 풍광이었다. 그림 속 풍경들은 성경에 기록된 중동의 어디 척박한 땅의 이방 풍경이 아니라, 화가들이 살고 있던 자신들의 동네다. 자신들의 동네가 예수와 성모가 살았던 곳의 풍경으로 묘사된 것이다.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날, 산지미냐노는 듣고 짐작했던 곳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다. 이제 짐을 찾아 마지막 여정 로마로 내려갈 것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피렌체 시내는 여전히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서양 미술사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빠뜨릴 수 없듯이 서양 미술사에서 르네상스의 중심도시 피렌체를 빠뜨릴 수 없다. 피렌체는 우피치를 비롯하여 여러 미술관들로 서양미술사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피렌체의 미술품은 미술관이라 이름 붙은 곳에만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옮길 수 없는 프레스코 벽화를 포함하여 많은 조각들이 성당이나 수도원 등 원래의 자리에 보존되어 있다. 발품이 들어 힘이 들긴 하지만 오래된 건물과 잘 묵은 부부처럼 사이좋게 어우러진 미술품을 찾아다니며 구경하는 일은 박제된 미술관에서의 전시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피렌체 방문의 선물로 준다. 그리고 피렌체 시내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관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관인 마리노 마리니 미술관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땐 미술도 또 하나의 암기과목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작가와 작품을 연결할 수 있도록 열심히 외웠다. 시험문제에 자주 나오는 '최후의 만찬'과 '최후의 심판'의 두 사람 이름을 나는 늘 헛갈려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긴 이름이 밥 먹는 사람이다' 그렇게 외웠다. 그리고 말을 탄 기수 조각상 그림이 나오면 답은 '말 마 마리노 마리니' 하며 막무가내로 외웠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습지만 그 땐 그 나름대로 진지했다. 아무튼. 구시가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광장을 지나면 바로 그 말 마 마리노 마리니 미술관으로 꺾어지는 골목길이 나온다.
 
마리노 마리니 미술관은 마리니 사후 산 판크라치오 예배당을 새롭게 꾸며 1988년 문을 열었다. 피렌체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다. 마리니는 1901년 피렌체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토스카나의 소도시 피스토이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시기는 비극의 시기였다. 피렌체의 미술학교에 입학할 때는 조국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격랑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전쟁이 끝나자 이번엔 대량 실업과 국가 부채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에 또 다른 재앙 무솔리니가 등장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전쟁. 그리고 또 다시 제2차 세계대전.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불타버린 패전까지. 20세기 초 동서양을 막론한 삶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우리 시대는 비극입니다. 나는 평온할 때조차 그 평온함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 속에는 비극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마리니의 말처럼 20세기 초 인류 문명사 전체는 광폭하게 휘몰아친 폭력 앞에 맨몸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과거 예배당이었던 덕분으로 높은 천장이 시원하다. 조각상을 전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미술관 소개 책자에 의하면 조각과 회화 등 180여 점의 작품이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제일 먼저 기마상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그 말이군, 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벽에는 듬성듬성 그림들이 걸려 있고 바닥엔 인물 초상 조각과 알몸의 여신상인 포모나도 보인다. 하지만 역시 주역은 기마상이다. 서양 조각에서 기마상은 늘 기념비적 영웅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마리니의 기마상은 비극적 역사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염세, 그리고 실존적 고통이 가득한 존재가 되었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기마상을 조각하기 시작한 마리니는 말년에 이를수록 작품속의 기수는 점점 더 몸을 뒤로 젖혀갔다. 삶이 더 거칠어지고 고뇌는 점점 더 깊어간 탓일까. 슬픔이 묻어있는 마리니의 말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자살로 삶을 마감한 우리나라의 조각가 권진규(1922~1973)가 떠올랐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조각가가 마리니였다는 생각이 났다.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권진규의 말 두상 조소 한 점이 함께 따라 나왔다. 미술관 밖 시끄러운 소음과 찌를 듯 밝은 피렌체 햇살 속에서 훅 더운 숨결이 문득 얼굴에 와 닿았다.


■ 마리노 마리니 (Marino Marini 1901∼1980) ─────

이탈리아 출신의 조각가. 피렌체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토스카나의 소도시 피스토이아(Pistoia)에서 출생했으며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토스카나 지방의 고대 국가인 에트루리아의 유물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그가 평생에 걸쳐 작업했던 3가지 테마는 여성 누드인 포모나와 당대 유명 화가나 음악가의 초상, 그리고 기마상이다. 20세기 구상 조각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 마리노 마리니 미술관(Museo Marino Marini) ─────

·주소:piazza san pancrazio 50123 firenze
·전화:+39 055 219432
·개관시간:10:00~17:00, 일·화요일, 공휴일 휴관
·입장료:4유로
·가는길:Via Tornabuoni와 Piazza Santa Maria Novella 사이에 위치
· http://www.museomarinomarini.it









윤봉한_김해 윤봉한치과 원장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