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하고 정갈한 차림새
20가지 이상 메뉴 선명한 맛
화사하고 맑은 술 더해
눈과 입이 과하게 즐거운 맛

초가집은 집 '가(家)'자에 집이 붙었고, 역전앞은 앞 '전(前)'자에 앞이 붙었다. 이처럼 한 단어에 같은 의미가 중첩되는 경우를 두고 '겹말'이라고 한다. 반드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어순화 차원에서 줄여 쓸 것을 권장한다. 워낙 관용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초가집'처럼 국어사전에서 인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음식(飮食)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밥이나 국 따위의 물건'이라 정의한다.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이란 말은 '사람이 먹어도 좋은', 혹은 '먹어서 사람에게 이로운'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음식이라는 단어에는 사람의 몸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몸에 좋은 음식'은 초가집이나 '역전앞'처럼 겹말인 셈이다. 요즘 우리네 밥상이 워낙 허접스럽다 보니 '몸에 좋은 음식'이란 관용구가 당연하다는 듯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웰빙음식, 사찰음식, 약선요리, 궁중요리 등 '몸에 좋은 음식'을 내는 음식점이 늘고 있다. 한식의 다양화·고급화의 측면에서 보자면 당연히 환영할만한 일이다. 헌데 서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음식들은 가격도 만만찮거니와 왠지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김해시 장유면에 있는 '수선재'라는 약선 한정식 전문점을 처음 찾았을 때도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너무 폼 잡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차림새는 정갈하고 맛은 선명한 음식을 대하고 보니 선입견은 다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 취재를 위해 다시 찾았다. 두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수선재'의 허진 대표는 '몸에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음식(飮食)'의 본질과 역할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하기야 밥상 위에 놓인 스무 가지가 넘는 음식들이 이미 충분한 수식어 역할을 하기에, 굳이 말로 이러쿵저러쿵 설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선재'는 창원시 대방동에서 7년간 한정식 집을 하다가 2년 전에 장유면 율하신도시로 옮겨 왔다. 창원시에서 김해시로 행정구역이 옮겨 왔지만, 창원터널을 통해 불모산만 넘으면 되기에 예전 단골들의 발길은 여전히 이어진다. 전남 영암군 출신으로 오랜 세월 약선 요리를 해온 장모님과 그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아내가 음식을 만들고, 호텔 마케팅매니저 출신인 남편이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다. 안팎으로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가니 음식은 반듯하고 서비스는 섬세하다.
 
식사에 앞서 연 잎차 한 잔을 건넨다. 색은 맑고, 향은 곱고, 맛은 깊다. 덖음 차임에도 불구하고 잎에 생기가 도는 것이 쉽게 만날 수 없는 품질이다. 알싸한 동치미로 입을 적신 다음 죽으로부터 음식을 시작한다. 연자 혹은 연밥이라 부르는 연꽃의 씨앗을 넣어 만든 '연자죽'이다. 혈액순환을 도와 부인병에 효과가 있고,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여 숙취제거에도 좋다고 한다. 효능을 떠나 담백한 맛 덕분에 다음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하다. "국산 연자는 워낙 금값이라 약으로나 쓰지 음식으로 덤빌 물건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수입산을 쓰는데 베트남산이 그중 품질이 좋습니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것을 가감 없이 전하는 그 심성에 오히려 신뢰가 간다.
 
허 대표는 먼저 두부튀김을 권한다. 두부 사이에 다진 표고버섯을 넣고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음식이다. 겉은 바삭하지만 두부의 부드러운 질감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두부와 표고의 조합을 느끼다가, 이어서 참나물을 한번 곁들여 보십시오. 전혀 다른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한 가지 음식으로 두 가지 맛이 연출되니 일타쌍피다. 새삼 이런 게 우리 한식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규와상은 여름철 식욕이 떨어졌을 때 궁중에서 만들어 먹던 만두입니다." "무침에 사용한 것은 논 고동(논우렁이)입니다. 가격이 만만찮지만 국산을 고집합니다. 우선은 그냥 드시다가 연잎소면을 말아서 한번 드셔 보십시오. 향이 좋습니다." 음식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허 대표의 말과 표정에서는 식재료에 대한 자신감과 음식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수라를 대하던 조선 임금의 예의가 생각났다. 수라에 차려진 음식에 대해 상궁은 각각의 재료가 어디서에서 온 것인지 일일이 설명을 드렸다. 그러면 왕은 음식들을 먹으며 그 산물을 생산한 백성들의 노고를 가슴에 새기고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한다. 이는 비단 수라를 대하는 왕에게만 해당되는 예의는 아닐 것이다. 손님에게 음식의 명칭과 재료의 산지를 설명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허 대표의 노력을 대하니, '밥상을 대하는 예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음식을 먹다보니 문득, 눈이 과하게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구절판도 근채 쌈도 동치미도 색이 참 화사하다. 반주로 나온 약초주·송순주·죽순주 또한 술빛이 맑고 은은하다. 재료가 가진 본래의 색을 살린 것이 있는가 하면, 천연재료로 멋을 부린 것도 있다. 거기에 색의 조화까지 신경을 썼으니 눈이 호사를 누린다. "음식들 때깔이 심상찮습니다" 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명쾌하다. "우리집 식구들 색에 목숨 거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우선은 음식에 손이 가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깔이 좋은데다 맛 까지 받쳐주니, '수선재'의 음식은 재색을 겸비한 양가댁 규수를 보는 느낌이다. 담백한 야채육수에 들깨를 듬뿍 갈아 넣은 들깨탕은 구수하지만 텁텁하지 않다. 탕평채의 경우 색에 집착하다보면 맛은 밍숭맹숭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한 번 데친 후 두 번에 나눠 볶은 잡채는 당면 자체에 간이 잘 배어 있다. 봄을 알리는 해조류인 '곰피' 채소말이는 계절감과 식감을 두루 살렸다. 모양·색·향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은 두릅튀김과 냉이튀김은 예사 솜씨가 아니다. 이정도면 일본의 유명 텐부라전문점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건강을 강조하기 전에 우선은 맛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폼 잡지 않고 솔직 담백하게 말하는 허 대표는 보면 볼수록 음식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주인장이다.
 
10여 가지 요리를 맛보고 나니 밥상이 차려졌다. 갓 구운 김은 손님 상 앞에서 직접 잘라주니 향이 살아있다. 쌉싸래한 머윗잎쌈은 새삼 입맛을 돌게 한다. 재빨리 끓여 거품이 가라앉기 전에 내온 된장찌개는 단출한 재료지만 깊고 구수한 맛을 낸다. 방풍나물·취나물·무나물은 본래 가진 질감과 향을 잘 살렸다. 김과 함께 조물조물 무쳐낸 달래무침에서는 봄내음이 물씬 풍긴다. 요리로 충분히 배를 채운 터라 맛이나 보자며 덤벼들었건만, 이 좋은 찬을 두고 숟가락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에는 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음식의 가짓수로 사람을 현혹하지도, 화려한 식재료로 뽐을 내지도, 약선 요리네 사찰음식이네하며 애써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정직하고 계절에 맞는 재료를 구해, 그 재료가 본디 가진 질감과 색과 향을 오롯이 살렸다. 거기에 수십 년 세월을 갈고 닦은 어머니의 솜씨와 그 솜씨를 물려받은 딸의 손맛이 더해졌다. 전라도에서는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나 그 음식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맛'을 두고 '게미'라고 한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두고 '게미가 있는 맛'이라는 표현을 쓴다. '수선재'는 김해에서는 드물게 '게미가 있는 맛'을 즐길 수 있는 음식점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고 나면 몸에 좋고 나쁘고를 떠나, '밥 같은 밥을 먹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누구는 음식의 가짓수가 적다고, 누구는 한정식 차림에 회나 소고기 한 점 없다고 타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창원에서 시작해 김해에 자리 잡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들이 있어, 허 대표는 "식당 주인치고는 행복한 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행복한 주인이 차리는 밥상이니 손님 또한 덩달아 행복해진다. 행복의 선순환 구조인 셈이다.

TIP - 상차림 ──────
선정식·수정식 두 종류 한정식

선정식, 수정식 등 두 종류의 한정식이 있고 가격은 각각 1만7천원과 2만7천원이다. 만만히 볼 가격은 아니지만, 종류만 많고 딱히 먹을 만한 음식이 드문 뷔페와 비교하면 가격대비 재료의 질과 음식의 수준이 월등하다. 귀한 손님을 모시거나 특별히 기념할만한 날이라면 1인당 5만원에 4인 이상 주문이 가능한 약선 정식도 고려해 볼만 하다. 최소 반나절 전에 예약이 필요하다.

주소:김해시 장유면 관동리 465-9
연락처:055-314-2882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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