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어사 미륵전에 모셔진 돌미륵. 전설에 따르면 만어산을 찾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 독룡과 다섯 나찰녀의 악행
'허어, 이거 참 큰일이로고.'
 
봉황대 궁궐 대전에 앉은 수로왕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슥한 가을날 밤이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대전 마루에 은빛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등촉대 하얀 촛불은 바지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고, 수로왕의 한숨 소리에 가끔 촛불이 연약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유화상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장유화상은 대전 마루에 앉아 낮게 드리워 오는 은조각 달빛을 무연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이렇게 앉아 있은 지도 벌써 두 식경이 지났다. 오늘 낮에 수로왕은 장유화상으로부터 참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번 가을에도 오곡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네 번째 가을이 돌아왔지만 오곡이 익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 못된 독룡과 다섯 나찰녀를 어떻게 해야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대사, 답답하구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나로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장유화상은 마치 자기가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생인 허황옥과 금관국으로 온 그는 금관국을 부처님의 신성한 나라로 만들고 있었다. 모든 일은 순연하게 진행되었다. 시절은 지극히 평온했고, 나라의 들판에는 오곡이 영글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는 날들이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거늘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큰일이었다. 이 가을에도 곡식이 영글지 않으면 금관국 백성들이 모두 굶주려 죽을 판이었다.

무척산 옥지 절벽 아래 동굴에 가두었던
악의 무리들이 탈출한 뒤 도탄에 빠진 백성들
수로왕과 장유화상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허왕후 "부처를 뵙고 오겠나이다" 옥신각신
수미산에서 지켜보던 부처 "석장을 가져오라"
여섯 비구와 천인을 내려보내 물리치게 해
다시 오곡백과와 화초가 금관국 산야를 뒤덮고
옥지 근처 만개의 돌로 둘러싼 거대 사찰 지어

 
4년 전, 수로왕이 금관국 구지봉에 내려온 지도 10년의 세월이 흐른 날이었다. 아유타국에서 건너온 허황옥을 맞아 나라의 기틀이 차츰 잡혀가던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왕후는 영민하고 잘 생긴 아들들을 생산했고, 오곡은 풍성하게 무르익어 온 백성들이 수로왕의 덕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렇게 평화로운 날들을 시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옥에 묶여 있던 다섯 나찰녀가 저승사자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무척산 근처 옥지(玉池)로 탈출한 것이었다.
 
나찰녀들은 옥지에 둥지를 틀고서는 시시때때로 민가에 내려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곡식을 훔쳐갔다. 때론 어린아이를 잡아가서 인육을 먹기도 했다. 어쩔 때는 뇌우를 내려 천지를 캄캄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로왕과 장유화상은 세 가지 신기(神器)인 옥구슬과 거울, 신검을 들고 가 다섯 나찰녀와 사흘에 걸친 싸움을 벌였다. 결국 다섯 나찰녀들은 수로왕에게 항복했고, 왕은 그 나찰녀들을 옥지 근처 절벽 아래 깊숙한 동굴에 가두었던 것이다.
 
허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역시 지옥에 묶여 있던 독룡 한 마리가 탈출에 성공하여 옥지로 내려오고야 말았으니. 독룡은 옥지에 내려오자마자 다섯 나찰녀를 감금해놓은 동굴을 부수어 나찰녀들을 모조리 풀어버렸다. 지옥에서 익히 수로왕의 영험을 알고 있던 독룡은 다섯 나찰녀와 힘을 합쳐 수로왕을 굴복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독룡과 다섯 나찰녀가 힘을 합치니 가히 천하무적이었다. 독룡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입에서 불을 내뿜어 금관국을 불태웠고, 나찰녀들은 뇌우와 우박을 퍼부어 오곡의 결실을 방해했다.
 
소식을 들은 수로왕과 장유화상은 한 달음에 달려가 독룡과 다섯 나찰녀를 물리치고자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그들의 힘으로는 너무 벅찬 상대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힘에서 밀린 수로왕과 장유화상은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의기양양해진 독룡과 다섯 나찰녀들은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오곡의 결실을 악랄하게 방해하였다. 곧 이어 그들은 수로왕이 사는 봉황대 궁궐까지 집어 삼킬 기세였다.
 

# 부처님의 원력을 빌려야 합니다
시간은 벌써 인시를 지나 막 묘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태양이 뜰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찬란한 일출이 황금 들녘을 환히 비추어 노란 물결이 천지 사방을 물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 낙동강 그 너른 들녘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함만이 감돌았다.
 
"대사, 무슨 방법이 없겠소이까?"

장유화상은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자신으로서도 뚜렷한 답이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믿을 곳이라곤 부처님밖에 없었다. 허나 부처님은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부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모든 것은 풀릴 것이지만…."

장유대사는 이 말을 끝으로 다시 묵묵부답이었다. 수로왕은 그의 침묵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지라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허, 장차 이 일을 어이하리. 이러다간 어렵사리 세운 부처님의 나라가 없어질 판이 아닌가.'
 
그것이야 말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세운 부처님의 나라인가? 그 나라 하나 못 지켰으니 그 죄를 어찌 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내전의 서쪽 문이 열리더니 은은한 가향이 휘몰아 왔다. 커다란 옷자락이 나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허왕후였다. 아리따운 양 볼에 고운 홍조를 머금은 허왕후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대왕이시여, 무얼 그리 근심하시나이까?"

"아, 왕후. 음, 독룡과 다섯 나찰녀 때문이라오."

"부처님의 원력을 빌려 물리치면 되지 않습니까?"

"허나 부처님께서 미동도 하지 않으시니."

"그럼 소녀가 부처님을 만나고 오겠나이다."

"예? 거 무슨 말씀을?"

"왕후시여. 부처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이역만리 머나먼 곳. 아녀자의 몸으로 함부로 갈 곳이 아니오이다."

"오라버니. 저희 남매가 파사의 돌을 싣고 이 곳으로 오던 때를 잊었나이까? 지금 다시 그곳으로 못 간다는 법이라도 있나이까?"

"왕후시여, 그때는 부왕께서 주신 파사의 돌이 효험이라도 있었지요. 지금은 그 효험이 다해 거친 물살을 헤쳐 나가기가 무척 힘들다오."

"아니옵니다. 제가 싣고 가면 다시 부왕께서 말씀하신 효험이 나타날 것입니다. 걱정 마옵소서."

이때, 저 높은 곳 수미산에서는 부처가 작은 연못을 통해 세 사람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세 사람이 가니 안 가니 하며 옥신각신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 부처는 동자더러 석장을 가져오라 일렀다. 석장은 부처의 외출을 뜻하는 신기였다. 동자가 석장을 가져오자, 부처는 "할!" 소리를 크게 내며 석장을 땅바닥에 내리쳤다. 그 소리의 울림은 너무나 컸고 금관국 봉황대까지 울려퍼졌다.

"내 너희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여섯 비구와 만 인의 천인(天人)을 보내어 독룡과 다섯 나찰녀를 물리칠 것이다."

수로왕과 허황옥, 장유화상은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이어 모두 입가에 커다란 웃음을 지었다. 마침내 부처가 세 사람의 간절한 소망을 들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가 있는 서역을 향해 108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차츰 날이 밝아 왔고 신어산 은하사의 은은한 독경소리가 내전 깊숙이 들려왔다.
 

# 독룡과 다섯 나찰녀를 물리치다
그날 아침나절이었다. 부처가 보낸 여섯 비구와 만 인의 천인은 옥색 구름을 타고 옥지로 날아갔다. 수로왕과 장유화상도 말을 타고 급히 옥지로 달려갔다. 그들이 도착하니 독룡과 다섯 나찰녀가 서로 엉켜 난잡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 자체가 지옥도였다. 태산을 닮은 듯한 엄청난 몸집의 독룡과 독룡 못지않게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는 다섯 나찰녀는 이 세상의 모든 악행을 다 품고 있는 모습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악취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그르렁거리는 짐승 소리가 무척산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온갖 독충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독룡은 혀를 날름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다섯 나찰녀의 몸을 핥고 있었고, 다섯 나찰녀는 사악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참으로 음란하여 가히 볼 수가 없구나. 이 못된 것들아, 우리의 석장을 받아라!"

여섯 비구들이 독룡을 향하여 일제히 석장을 날렸다. 독룡을 향하여 날아가던 석장은 커다란 창으로 변하더니 각각 독룡의 심장과 허파, 두 눈과 두 귀에 박혔다.
 
"커응~. 으르릉."
 
독룡은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 서슬에 음란한 신음소리를 내던 다섯 나찰녀들이 하나 둘씩 땅으로 떨어졌다. 그때를 노려 천인들이 나찰녀들의 심장에 수미산의 정기가 담긴 신검을 박아대기 시작했다. 독룡이 하늘에서 괴로운 몸짓을 하며 죽어갈 즈음, 다섯 나찰녀들도 하나 둘씩 심장이 잘리고 있었다.
 
수로왕과 장유화상 역시 천인들을 도와 다섯 나찰녀들을 도륙하였다. 마침내 다섯 나찰녀들은 한줌 먼지로 변하면서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독룡은 검은 먹구름 사이로 달아나고 있었다. 여섯 비구와 천인들은 급히 구름을 타고 독룡을 쫓아갔다. 그들이 부지런히 독룡의 뒤를 쫓아가는 찰나, 어디선가 장엄한 소리가 들리더니 부처가 독룡의 꼬리를 잡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오색 무지개 사이로 나타났다. 그 거대한 독룡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던 것이다.
 
"아, 부처시여!"
 
수로왕과 장유화상은 저도 모르게 땅에 무릎을 끓고 경배를 드리고 있었다. 덩달아 여섯 비구들과 천인들도 모두 땅에 엎드렸다. 장엄한 빛줄기를 내며 땅으로 서서히 내려오는 부처를 찬양하는 노래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부처의 은덕을 기억하는 사찰을 세우리

▲ 만어사 입구에 있는 돌 너덜지대. 돌을 두들기면 쇠소리 같은 경쾌한 소리가 난다.
부처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않고 수로왕과 장유화상을 내려다 보았다. 독룡의 몸이 서서히 먼지가 되어 하늘가에 날렸다. 마침내 한점 먼지마저 사라질 즈음, 여섯 비구는 땅까지 연결된 오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고, 만 인의 천인들은 부처에게 경배 드리는 모습 그대로 돌이 되었다. 만 개의 돌이 모두 하늘을 향해 있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어디선가 웅혼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수로왕이 하늘을 쳐다보니 온화한 미소를 지은 부처와 여섯 비구가 오색 무지개 뒤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옆에 앉은 장유화상은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외고 있었고, 수로왕은 마음 속으로 커다란 결심을 하고 있었다.
 
'만인이 모여 있는 이곳에, 부처님의 원력이 실현된 이 곳에, 웅장한 사찰을 세우리라.'
 
독룡과 다섯 나찰녀가 모두 사라지자 황폐했던 들녘에 오곡백과가 무르익기 시작했고, 화초들이 금관국 산야를 뒤덮었다. 가을 하늘은 더 없이 맑고 푸르렀고, 흰 옷 입은 백성들이 몰려 나와 기쁨의 춤을 추었다.
 
세월이 흘러 수로왕은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 허왕후를 대동하고 옥지 근처 거대한 사찰로 행차했다. 사찰은 만 개의 돌들로 둘러 싸여 있었고, 일 년 내내 만 개의 돌에서는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로왕과 그의 식솔들이 만어사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을 경배하는 동안 장유화상은 옥으로 만든 망치로 만 개의 돌을 치며 부처의 은덕을 길이길이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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