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경운산을 올랐다. 화창한 봄 날씨에 연초록 잎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등굽잇길을 갈 때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세우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맞은바라기 철쭉나무 밑 마른 검불 사이로 작은 꽃뱀 한 마리가 황급히 기어가고 있었다. 봄 햇살을 쬐려 나왔다가 인기척에 놀란 모양이었다. 나도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가만히 그곳을 피해 산을 오르는데 뱀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서정주 시인과 그의 시 '화사(花蛇)'였다. 시를 보면,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아름다운 배암…/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중략)/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등의 강렬한 시어로 구성되어 있다. '화사'는 꽃뱀에 대한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혐오스러움의 상반된 감정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양면성을 표현했으며 아름다움과 혐오의 기로에서 선택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었다고 나름 해석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생각나는 것은 내 고향 밭둑 돌무더기 사이에 하얗게 피어난 5월의 찔레꽃이다.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찔레순을 꺾어 먹기 위해 다가가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기다랗고 허연 뱀의 허물이 걸려있었다. '진대'라는 황구렁이의 허물로 크기가 지게 작대기만 했다. 구렁이는 돌담장 사이 틈새나 곡식을 넣어둔 도장에서 주로 모습을 나타내었고 어른들은 집지킴이라 하여 그냥 놓아두었다. 지금은 환경이 많이 변하여 이런 큰 구렁이를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카페 활동을 하는 지인이다. 지인은 카페의 닉네임을 '사무사(思無邪)'로 정하고 그 뜻대로 생각을 바르게 가져 사악함이 없이 살고자 하였으나 다른 회원들이 '살무사'로 불러 난처하다고 했다. 그래서 뱀을 보면 사무사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무사는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자왈(子曰) 시삼백(詩三百) 일언이폐지왈(一言以蔽之曰) 사무사(思無邪)·공자가 말씀하시길 <시경>에 실린 삼백 편의 시에는 한마디로 간사한 생각이 없다)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시경>은 주(周)나라 초부터 춘추(春秋)시대의 많은 시가(詩歌) 중에서 공자가 311편을 엄선하여 수록한 책이다. 예의에 합당한 것으로 엄선된 작품은 순박한 백성들의 생활과 감성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좋은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무사로 불리니 그 사람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살무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사다. 사람은 뱀이란 말만 들어도 섬뜩해하는 잠재의식이 있다. 그만큼 뱀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동물이다. 모르긴 몰라도 살무사의 살은 죽일 살(殺)을 쓰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思'에서 '殺'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으니 황당할 것이다.
 
사벽(邪僻)함 없이 생각하며 살자고 '思'가 들어간 사무사를 썼을 터인데 생각을 죽이고 '殺'이 들어간 살무사로 불리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 사회가 삭막해지는 것은 아닐까? 침몰한 세월호가 주는 교훈을 봐도 그렇다. 사무사와 거리가 먼 생각 없는 사람들의 사악한 짓거리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이제는 6·4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22일부터는 선거운동기간에 들어간다. 후보자도 이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악한 마음을 버린 상태에서 생각하고 유권자도 깊이 생각하여 제대로 된 인물에 투표를 해야 한다.
 
생각이 죽어버린 사회는 절대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올바른 생각에서 올바른 행동이 나옴을 명심하자. 이제는 진정 '살무사'에서 '사무사'로 갈 차례이다. 땀을 흘리고 경운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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