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등왕자의 비원, 모은암 창건
낮달이 떴다. 봉황대 마당 동쪽 하늘에 하얀 보름달이 떠올랐다. 청일한 하늘에 떠올랐던 태양은 서서히 저물어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었다. 도화 꽃잎이 하르르 하늘가를 맴돌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돌개바람. 꽃잎이 하나 둘 마당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 꽃잎 사이로 들리는 낮은 발자국 소리. 하얗게 떠오른 낮달을 바라보며 비취빛 옥루를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무심한지고. 하늘은 저리 푸르고 달은 하얗게 떠오르건만 어이하여 그대는 속절없이 가버렸소?'
 

▲ 거등왕이 어머니 허황옥을 위해 만들었다, 또는 허황옥이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만들었다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하는 모은암 극락전.
낮달을 바라보는 수로대왕의 눈가에는 옥루가 계속 흘러내렸다. 도화 잎이 몇 개 왕의 발치에 떨어졌다. 왕은 힘겨운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꽃잎을 주워들었다. 왕은 꽃잎과 낮달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화 붉은 잎은 허왕후의 입술이었고, 하얀 낮달은 허왕후의 동그란 얼굴이었다. 내일은 허왕후가 이승의 끈을 놓은 지 칠 년 째 되는 날이었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허왕후에 대한 왕의 그리움은 깊어만 갔다.
 
"아바마마, 소생 거등이옵니다."

수로대왕은 미동도 하지 아니하고 고개를 들어 낮달을 바라보았다. 거등 왕자는 그런 부왕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분의 사랑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하리? 수만 리 먼 아유타국에서 이곳 금관국까지 오직 부왕만 바라보며 찾아 온 모후가 아니었던가? 그런 모후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시다가 모후가 먼저 승하하셨으니 그 상실감이 오죽 클 것인가?
 
한참 동안 낮달을 바라보던 수로대왕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태양은 이제 서쪽 산마루에 간신히 걸려 있었고, 노란 빛이 봉황대 마당에 은근히 스며들었다.
 
"그래, 사찰 터는 알아보았느냐?"

"예. 아바마마.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곳입니다."

"음. 그곳이 어디라고?"

"자로 잴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산, 무척산이옵니다."

"무척산이라…. 가없이 평온한 곳이겠구나."

수로대왕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그 모습을 본 거등왕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리었다. 모후께서 승하하신 후로 처음 보는 부왕의 웃음이었다.

"그래, 사찰 이름은 무엇이라 할 것이냐?"

"모은암이라고 하겠나이다."

"모은암이라.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찰이라. 그래, 고맙구나."

수로대왕은 얼굴 가득 넉넉한 웃음을 띠고 거등왕자를 바라보았다.
 

#2. 모은암을 찾은 수로왕
▲ 모은암의 종을 모셔놓은 모음각.
날은 그지없이 화창했다. 쪽나무에서 나온 쪽빛보다 더 파란 색감이 온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헉헉거리며 병사들과 대신들이 걸어갔다. 수로대왕은 예의 그 거룩한 걸음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계절은 오월의 끝자락이었고, 날은 차츰 더워졌다. 가끔 이름 모를 새들이 숲속에서 푸드덕거리며 청명한 하늘로 올라갔다.
 
가파른 산길과 기기묘묘한 바위를 지나니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 공터 한 가운데에 여인이 누운 듯한 바위가 보였다.
 
"저기 저 바위가 무엇이냐?"

거등왕자는 조용히 몸을 돌려 음전하게 아뢰었다.

"모암바위라 하나이다."

"모암바위…. 그래 네 말대로 네 어미의 안온한 자태를 닮았구나. 참으로 명당이로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거등왕자는 고개를 숙이며 수로대왕에게 고했다. 왕자의 옆에 선 신보 또한 눈물을 글썽이며 왕에게 예를 표했다. 신보는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으로 시집올 때 데리고 왔던 신하였다. 아유타국에서부터 공주를 모셨던 신보는 허왕후가 승하하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기별포에서 바다만 바라 볼 정도였다. 그러나 거등왕자가 하루가 다르게 커감에 따라 그를 가락국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진해서 그의 신실한 신하가 된 사람이었다. 때론 그의 스승이기도 했고, 때론 그의 지기 역할도 했던 신보였다.
 
세월이 흘러 삼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때가 서기 199년이었고, 수로왕의 나이 158세였다. 거등왕자의 혼신에 걸친 의지와 신보의 노력에 의하여 마침내 모은암이 창건되었다.
 
모은암은 울창한 숲 속에서 허왕후를 닮은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모은암이 창건되는 날, 땅에서 칠보 무지개가 솟아나온 하늘을 가득 덮었다. 신비한 향훈이 도처에서 풍겨 나왔고, 사찰 우물에서는 황금빛 물고기 한 쌍이 뛰어 올라 모암바위에 그대로 붙어 버렸다.
 
모은암은 대웅전 하나와 바위에 둘러싸인 산신각, 굴 속에 마련된 관음전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사찰이었다. 멀리 대웅전 뒤로 미륵바위가 웅장하게 솟아 있었고, 녹의홍상 나무들이 포근히 사찰을 감싸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찰이로고. 이렇게 고즈넉이 앉아 있으니 너의 모후를 생전에 보는 듯한 모습이구나. 거등왕자여. 내 이제 너를 믿고 이승의 끈을 놓아도 아무 여한이 없겠구나."

"아바마마. 그 어인 망극한 말씀이옵니까? 앞으로도 사실 날이 천수 만수이옵니다. 그런 말씀으로 소생의 맘을 아프게 하지 마소서."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천명에 달린 것. 이제 내 나이도 158세로다. 나는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도다."

"대왕이시여. 그 무슨 참담한 말씀을 하나이까? 세세만년 이 가락국을 다스리어 후대의 모범이 되는 제국을 만드소서."
 
"허허. 신보. 그대도 많이 늙었구려. 하긴 왕후를 따라 온 세월도 무척 많이 흘렀지요."

수로대왕은 흡족한 웃음을 띠며 일행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말했다. 모두들 대왕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대왕은 눈에 띄게 힘든 몸짓이었다. 거등왕자도 신보공도 그런 대왕을 안쓰러이 지켜보았다. 모은암을 지나 막 숲으로 들어갈 즈음이었다. 갑자기 수로대왕이 거등왕자를 불렀다.

"거등왕자야. 내 긴히 너에게 할 말이 있노라."

"예. 아바마마. 하명하소서."

"저 양지바른 곳에 소나무 두 그루를 심어 놓거라. 서로 가지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그건 어인 분부이옵니까?"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몸을 합치는 경우가 있다지. 가지가 붙기도 하고. 나와 너의 모후는 생전에 그런 소나무가 되고 싶어 했단다. 나의 의도를 알겠느냐?"

"예, 아바마마.."

수로대왕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숲길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수로대왕은 갑자기 기침과 각혈을 하며 모두를 긴장시켰다. 거등왕자와 신보가 급히 왕의 침전으로 달려갔다.

"아, 대왕이시여. 속히 몸을 추스르소서."

"이제 내가 하늘의 명을 받아 하늘로 올라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소. 신보공께서는 비록 내가 없더라도 우리 거등왕자를 잘 돌봐주시오."

거등왕자는 급히 어의를 대령하여 수로대왕을 진맥하였지만 이미 하늘의 명은 수로대왕을 데려가는 것이었다.


#3 북방의 별, 수로대왕이 하늘로 가던 날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통곡의 바다에 떠다니는 한 조각 난파선을 타고 있는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늘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천지 사방이 어두워졌다. 여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며 가슴을 쳤고, 남정네들은 땅에 머리를 찧으며 대왕의 승하를 슬퍼했다.
 
거등왕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모은암을 창건하고 한 달이 지난 즈음, 부왕께서 승하하고 마셨던 것이다. 세수 158세였고 때는 서기 199년이었다. 대가락국을 창건한 태조이자 모든 가야제국의 위대한 군주였던 부왕이었다. 또한 포상팔국의 반란을 진압한 전사였고, 여러 소국들간의 분쟁을 해결한 국제적 외교자였다. 그런 수로왕이 하늘의 명을 받아 귀천하고 말았던 것이다.
 
신보는 냉정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을 이 때에 자신만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상을 당했으니 상례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수로대왕을 욕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거등왕자시여. 슬픔을 거두소서. 나라의 국본이자 대가락국의 후게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 해야 합니다."
 
거등왕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금관국의 후계자로서 맡은 바 일을 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그의 슬픔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거등왕자는 겨우 입을 떼어 신보에게 힘겹게 말하였다.
 
"신보공의 말이 옳소. 내가 슬픔에 겨워 부왕을 욕되게 할 수는 없겠지요. 속히 부왕을 모실 묏자리를 알아봐야 겠소. 경이 알아서 처리해주시오."
 
"분부 받잡겠습니다."
 

#4 무척산의 천지와 연리지
▲ 소나무 두그루의 가지가 달라붙은 연리지.
그날 이후, 신보는 금관국 곳곳을 뒤져 수로대왕을 모실 묏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는 아유타국에서도 알아주는 풍수관이었다. 신보는 근 열흘을 뒤진 결과, 봉황대 궁궐에서 동북방으로 백리 남짓한 곳에서 명당을 찾았다. 신보는 급히 그 사실을 거등왕에게 알렸다.
 
수로대왕의 어체를 모실 명당이 정해졌으니 이제 구덩이를 파는 일이 남았다. 거등왕은 수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왕의 묏자리를 파게 했다. 그런데 왕의 묏자리를 파니 지하에서 물길이 솟아올라 구덩이를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신보공은 차오르는 물을 모두 파내고 다시 구덩이를 팠으나 물길은 가차 없이 구덩이를 메우고 말았다.
 
거등왕과 신보를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커다란 근심에 휩싸였다. 대왕의 어체가 풍우에 노출될 위험에 처했건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신보공이 왕의 묏자리 근처에서 밤낮으로 숙식을 하며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신보공은 저녁을 먹고 혼곤한 기운에 잠시 앉은 자리에서 졸고 말았다.
 
꿈은 너무 생생했다. 온 몸에서 광채가 나는 수로대왕께서 금동관을 쓰신 채 그에게 다가와 단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신보공, 이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유심히 살펴보시오.'

언뜻 잠에서 깨어난 신보공은 머리를 후두둑 털며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는 커다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어렴풋이 금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동쪽 하늘가에 산 그림자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가락국에서 가장 높은 무척산이었다. 거등왕자가 모후를 위해 만든 모은암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가장 높은 곳을 살펴보라고? 그게 저곳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보공은 저도 모르게 무척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군사들도 무척산으로 올라갔다. 산 중턱의 모은암을 지난 신보공 일행은 귀신에 홀린 듯 무작정 위로만 올라갔다. 마침내 정상에 당도한 신보공은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정상의 평평한 곳을 눈여겨 보았다. 이미 여명이 훤히 비치었고, 사방은 노란 빛에 둘러 싸여 있었다.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었어. 이곳 무척산 꼭대기와 대왕의 묏자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맥이었어. 대왕의 묏자리에서 나온 물을 이곳에 가두어야겠어.'
 
▲ 수로왕릉의 묏자리에서 나온 물을 가둬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무척산 천지.
신보공은 뒤따라온 군사들에게 명하여 꼭대기 부분에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렇게 하기를 사흘. 웬만큼 구덩이를 팠다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지하에서 물길이 솟아올랐다. 물은 순식간에 구덩이를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산 아래에서 전령 하나가 급히 올라오더니 헐떡이는 목소리로 신보공에게 아뢰었다.
 
"신기하게도 대왕의 묏자리에서 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빠져나간 상태입니다."

소식을 듣고 거등왕이 올라왔다. 거등왕 또한 자초지종을 듣고는 무릎을 탁 치며 대왕의 높은 뜻에 감탄을 연발했다.

"이 모두가 부왕의 뜻입니다. 이제 어체를 정식으로 모셔야겠소."

"이를 말씀입니까? 가락국 백성들의 마음이 이제야 풀리겠습니다."

"자, 빨리 내려갑시다."

거등왕과 신보공은 급히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은암을 지나 양지바른 곳에 도달할 즈음이었다. 갑자기 신보공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거등왕이시여, 참으로 신비한 일이 있습니다. 나…나무들이."

"무슨 말이요? 나무들이라니?"

거등왕은 신보공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아, 어찌 세상에 이리 신기한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부왕의 명에 의해 심어 놓은 두 소나무 가지가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부왕께서 모후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소나무였다. 신보공과 신하들은 모두 그 나무 앞에 모여들어 신비스런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두의 얼굴에는 경이의 표정이 스며 있었고, 동쪽에서 떠오른 찬란한 붉은 빛이 아낌없이 그들의 얼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멀리, 수로대왕의 묏자리에서 숙연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가락국의 창건주인 수로대왕께서 마침내 영원히 기거할 안식처가 만들어짐을 경하하는 노래 소리였다. 태양은 황홀하게 무척산 천지를 비추고 있었고 모두들 무릎을 꿇고 수로대왕의 덕을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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