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유신의 활터

'여기인가?'
 
붉게 머금은 빛이 금방이라도 대지를 태울 듯 맹렬한 기세로 동쪽 산허리를 난타하고 있었다. 태양은 노랗게 물든 혀를 쑥 내밀며 산자락의 돌무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유신은 지긋이 눈을 뜨고 그 돌무덤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증조할아버지인 구형왕께서 누워 계신다고 생각하니 일순 마음이 아팠다.
 
'망국의 한을 품고 누워 계신 구형왕이시여. 이제야 이 못난 후손이 찾아 왔나이다. 부디 저의 비원을 풀어주옵소서.'
 
유신의 이마에 묶인 머리띠가 산들바람에 휘날렸다.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사월의 봄바람은 더 없이 상쾌했지만 유신은 그 상쾌함을 맛보기 전에 비애를 느껴야 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유신은 여전히 금관가야의 왕족이었고, 또 왕족이어야만 했다. 그 옛날 드넓은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철기 무사의 후손들이 반도의 남단을 지배하던 영광의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할수록.
 
'왕이시여. 이제 편안히 주무소서. 어찌 하겠습니까?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 것을. 그러나 저는 잊지 않습니다. 그 옛날 북방을 지배하던 우리 조상의 웅혼한 뜻을. 저, 유신이 이제 그 뜻을 받아 들여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업을 이루겠나이다. 저에게 커다란 힘을 주소서.'
 
유신은 금강총으로 만든 활을 집어들었다. 어느덧 태양은 붉게 타올라 경사진 면에 고스란히 몸체를 노출한 돌무덤에 무지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돌무덤은 큰 돌과 작은 돌이 켜켜이 맞물려 있어 방추형으로 세워진 모양이었다. 그 무덤 안에는 작은 감실이 하나 있었고, 그 감실 안에는 백 년도 더 된 세월동안 금관가야를 굽어보는 구형왕의 어체가 놓여 있었다.
 

▲ 산청 왕산자락에 있는 가야의 10대이자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왕릉. 인근에 그의 증손자였던 김유신이 무예를 연습했다는 자리가 남아 있다.
갓 약관을 넘긴 유신은 정식으로 신라의 화랑이 되었고, 전국 각지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수련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곳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구형왕의 왕릉까지 오게 되었다.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들은 증조할아버지의 묘소였다. 김서현 장군은 또 그의 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에게 익히 들은 묘소였다. 한 눈에 보아도 천하 명당이었다. 울창한 수풀에 둘러싸인 호젓함이 돋보였고, 굽이치는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신비롭고 웅혼한 기운을 느낀 유신은 한참동안 돌무덤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편으론 감회가 새롭고 한편으론 가슴이 아픈 무덤이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흙이 아닌 돌로 자신을 덮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가슴 아팠다. 그러나 유신은 곧 이어 옛 금관가야의 왕족답게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게 되었다.
 
유신은 돌무덤 아래에서 널찍한 공터 하나를 발견했다. 길이는 삼백 보 이상이었고, 둘레는 팔백 보 이상인 대지였다. 바닥에는 억새가 자라고 있었고, 주변에는 금강송를 비롯한 많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그가 활쏘기 연습을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유신은 활통에서 활을 하나 꺼내 멀리 보이는 금강송을 향해 한 발을 쏘았다. 시위를 떠난 활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소리도 우렁차게 날아갔다. "콱"하며 박히는 화살소리. 그 소리에 놀라 숲속에서 잠자던 종달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또한 그 소리는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겠다는 유신의 굳은 결심을 공고히 하는 웅장한 소리였다.
 

#2 백제의 배신

▲ 비운의 왕 '구형왕'
"왕이시여, 백제군이 쳐들어오고 있나이다."
 
"뭐라? 배…백제군이?"
 
강수 장군이 보낸 전령의 급보를 받은 구형왕은 그만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봉황대 궁궐 내전은 일순 긴장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그게 무슨 말인가? 백제군은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우릴 배신하다니. 야마타이국의 병사들은 어찌 되었는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는가?"
 
왕은 오른편에 선 금하 장군에게 급히 물어보았다. 그러나 금하 장군은 고개를 떨군 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허어, 답답하구려. 금하 장군. 왜 그러시오? 야마타이국에서 어머니 나라인 우리 금관국을 도와주기 위해 군사를 보내주기로 하지 않았소?"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금하 장군은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 왕이시여. 야마타이국의 병사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야마타이국은 우리 금관국의 아들 나라인 것을. 어머니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거늘 왜 병사들을 파견하지 않는단 말이오?"
 
"야마타이국은 지금 백제가 세운 야마토국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나이다. 어젯밤에 야마타이국의 병사들이 우리 금관국으로 건너와 고해 바친 사실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구형왕의 얼굴에 노란 빛이 엄습했다. 두 눈가에 공포의 빛이 몰려왔고, 각진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왕의 턱에 매달린 하얀 수염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아아, 이대로, 이대로 우리 금관국이 끝난단 말인가?'

"왕이시여. 이제 백제는 우리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나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우리와 동맹을 맺고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한 그들이 아닙니까? 그랬던 그들이 우리 금관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 일부러 동맹을 깨고 야마타이국마저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습니다."

"허면 무슨 수가 있단 말이오?"

"이제 우리 금관국의 백성들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선 신라와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허나 신라는 여태까지 우리 금관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 갖은 악행을 저질렀던 나라요. 그런 나라와 어찌 동맹을 맺는단 말이오?"

"여태껏 신라가 저희 금관국을 괴롭힌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라는 우리 금관국의 왕족과 관리들을 자기들의 귀족으로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아, 그런 약조가 있었소? 그런 약조가…."

구형왕의 깊게 패인 이마에 짙은 그림자가 배였다. 왕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백제는 우리 금관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할 것이다. 우리 왕족과 귀족들, 백성들을 도륙하여 씨를 말리려 들겠지. 그들이 보인 행태를 보면 그건 충분히 가늠할 만한 일이다. 이미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진 것은 사실일 터, 그렇다면 차제에 신라에 투항하는 것도 금관국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왕은 무거운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만조백관들과 내관들도 모두 왕을 따라 일어섰다. 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대전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도화 잎들이 돌개바람에 실려 날리고 있었다. 그 옛날, 허왕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금관으로 올 때도 도화 잎들이 온 천지에 날렸다고 했다. 왕은 고개를 들어 신어산과 무척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에 무척산 천지가 들어왔고, 봉황대 궁궐 남서쪽에 있는 수로대왕의 능묘가 들어왔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지고. 저 드넓은 북방의 들녘을 호령하던 조상들께서 세운 나라이거늘. 내 대에 이제 그 운이 다하다니. 저승에 가서 수로대왕과 허왕후를 어찌 뵙는단 말인가? 아아.'
 
▲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셔놓은 전각인 덕양전.
어느덧 왕의 눈가에 굵은 옥루가 뚝뚝 떨어졌다. 차마 부끄럽고 안타까워 목숨이라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왕은 내관에게 명하여 짧은 칼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내관은 그 명을 받고 주저하였으나 추상같은 왕의 명에 할 수 없이 칼을 가져와야 했다. 만조백관들은 모두 숨죽여 왕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봉황대 궁궐 앞마당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왕이 그 칼을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하려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어찌 그러시나이까?"
 
구형왕이 칼을 하늘로 높이 든 순간, 한 떼의 젊은 왕자들이 궁궐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모두 구형왕의 자식들이었다. 그 중에는 제일 막내이자 이제 겨우 열 살인 무력왕자도 끼어 있었다.
 
"모두 물러서라! 내 조상님들께 면목이 없구나. 이제부터 너희들은 이 애비의 행동을 똑똑히 지켜보거라."
 
왕의 지엄한 명에 모든 왕자들이 주춤거렸다. 하오의 태양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왕이 치켜든 칼날에 태양빛이 번들거렸다. 금동관을 벗은 왕은 칼을 들더니 순식간에 상투를 잘라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오백년을 버텨온 대금관국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3 왕산사와 구형왕릉
▲ 구형왕을 추모하는 덕양전 춘향대제 장면.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다. 다시 사월이었고, 도화 잎들이 천지에 날리던 어느 봄날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김유신 장군이 금강총을 들고 다시 구형왕릉 앞의 넓은 공터에 찾아 왔다. 눈에 띄게 수척하고 힘겨운 몸짓이었지만 장군의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장군은 금강총으로 마주 보이는 소나무에 활시위를 날렸다. 화살은 빛처럼 빠르게 날아가 금강송에 "콱"하고 박혔다. 그 소리는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노장군의 결기가 가득 서린 소리였다.
 
김유신 장군은 몸을 돌려 구형왕릉 앞으로 다가갔다. 왕릉 앞에는 '구형양왕릉'이란 비석이 고즈넉이 서 있었다. 이슬을 맞은 비석은 고고한 빛을 발하며 후손인 김유신 장군을 그윽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형왕이시여, 마침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나이다. 대금관국의 후손인 저 김유신이 그 대업에 앞장섰나이다. 비록 대왕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 후손인 제가 대업을 이루었으니 이는 곧 우리 금관국이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편히 쉬소서. 이 모든 것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나이까."
 
김유신 장군은 무릎을 끓고 손에 든 금강총을 구형왕릉 앞에 바쳤다. 그가 돌무덤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동안 어디선가 은은한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무덤 아래 왕산사에서 울러 펴지는 소리였다. 왕산사 한켠에 모셔진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에서 밝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김수로대왕과 허왕후께서 세운 위대한 철기의 나라, 바다 건너 왜의 땅에 찬란한 가야의 문명을 전달한 위대한 제국, 바로 대가락국이 아닌가? 비록 신라의 무력을 빌렸을지언정, 삼한일통의 대업이 그 후손에 의해 이룩되었으니 하늘에 계신 열성조께서도 기뻐하셨을 것이다.
 
김신의 하얀 수염이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도화 잎은 여전히 하늘에 날리고 있었고, 그 잎들을 따라 김수로대왕와 허왕후의 넉넉한 미소가 도도히 삼한 땅에 흐르고 있었다.






김대갑 문화유산 해설사·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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