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백만 마리는 족히 넘을 겁니다." 20년 경력의 장어굽기 베테랑 오창식 씨. 강한 연탄불 위에서 장어를 굽는 그의 손놀림은 유려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과연 장인의 솜씨라 칭찬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회유성 어류인 뱀장어(민물장어)는 민물에서 5~12년간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먼 바다로 나가 태평양의 심해에서 알을 낳고 죽는다. 알에서 부화한 장어는 해류를 타고 1~3년에 걸쳐 제 어미가 살던 강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강 하류에는 어김 없이 '장어촌'이 형성되어 있다. 전북 고창, 전남 나주, 인천 강화도 등이 유명하다.
 
지형적으로나 규모로 봤을 때, 김해 불암동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마을 뒤편에 부처바위가 있었다 해서 불암(佛岩) 또는 선암(仙岩)마을로 불렸던 이곳은 과거 서낙동강의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다. 강에 그물을 던지면 자연산 장어가 한가득 달려 나왔다. 그래서 '동장군도 선암에는 못 들어간다'는 말이 생겼다. 장어는 피로 회복이나 원기 증진에도 좋지만 도라지, 생강 등을 넣고 달여 먹으면 겨울 추위에 끄떡없고, 감기도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196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장어집이 이제는 어느덧 30여 곳에 이른다. 1970년대부터는 장어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도매상들까지 가세해 명실상부한 '장어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향옥정'이 차지하는 위상은 각별하다. 공순자(72) 여사로부터 시작된 '향옥정'은 대를 이어가며 40년간 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장남인 오창원 씨는 경영을, 차남인 창식 씨는 구이를 담당하며 가족경영을 고수한다. 김해와 부산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적으로도 그 위세가 대단하다. 정치인과 연예인 등 이곳을 다녀간 유명인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향옥정'을 설명함에 있어 전통과 명성은 한낱 수식어에 불과하다. '향옥정'의 진정한 가치는 재료와 정성, 즉 음식점이 가져야 될 본질에 숨어있다.
 
장어집이니 장어가 좋아야 함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요즘은 이 당연한 것이 새삼스러운 것으로 주목받는 세상이다. 한국에서 장어 하면 전북 고창의 '풍천장어'를 최고로 친다. 자연산 민물장어가 워낙 흔해 귀한 물고기 축에도 못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언감생심이다. 대부분이 양식이다. 장어는 인공적으로 산란과 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실뱀장어를 잡아서 키운다. 한국에서 잡힌 실뱀장어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중국·일본·대만 등에서 수입한다. 6개월 이상 국내에서 양식하면 국산으로 인정된다. 수입 장어는 외국에서 양식돼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자연산의 명성 덕분인지 양식 장어 역시 '풍천장어'를 으뜸으로 친다. '향옥정'은 국내산 풍천장어만을 고집한다.
 
장어는 크기에 따라 맛도 다르고 가격 차이도 많이 난다. 너무 작으면 맛과 육질이 떨어지고, 너무 크면 기름이 많아 느끼하다. 장어의 크기는 몇 마리가 1㎏ 인지로 따진다. 즉 6마리가 1㎏이면 '6미', 2마리가 1㎏이면 '2미'라고 한다. 전국의 이름난 장어집에서는 대부분 3~4미를 사용한다. 구이용으로는 이 정도 크기가 최적이기 때문이다. '향옥정'의 경우 공개를 꺼려했지만 비슷한 수준이라 보시면 된다. 허나 장어의 크기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대단하다. 장어를 좀 잡숴본 분이라면 크기를 비교해 보시고, 미각이 탁월한 분이라면 맛과 질감을 비교해 보실 것을 당당히 권한다.
 
▲ 지글지글 연탄불에 고소한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는 장어가 먹음직스럽다.
아무리 좋은 장어라도 손질과 조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향옥정'은 장어를 잡는 사람도, 장어를 굽는 사람도 모두 20년 이상의 경력자들이다. 그래서 오창원 대표는 '향옥정'의 직원들을 두고 전문직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기름이 많은 뱀장어는 바로 구우면 연기가 과도하게 배고, 소금으로만 구우면 기름 맛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장어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애벌구이한 장어에 양념을 발라 굽는 것이 좋다. '향옥정'은 복사열이 강한 스토브에 애벌구이를 해 기름을 충분히 제거한다. 그런 다음 연탄불 위에서 양념을 서너 번 발라 구워낸다. 40년간 변함 없는 방식이고 경험을 통해 터득한 최적의 조리법이다.
 
▲ 선암다리를 건너기 직전 대동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들어가다보면 바로 향옥정을 찾을 수 있다.
주방 한 켠에서는 20년 경력의 차남 창식 씨가 연탄화덕 앞에서 장어를 굽고 있다. "여기서 족히 수 만 마리는 구우셨겠네요" 했더니 "수 만 마리가 뭡니까, 수 백만 마리는 구웠습니다"라고 답한다. '설마…' 했는데, '향옥정'의 하루 평균 장어 소비량에 20년 세월을 곱하니 얼추 비슷하게 나왔다. 한가지 일을 수 백만 번 반복하면 절로 '장인'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강한 연탄불 앞에서도 그의 손놀림은 유려하고,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다. 기름이 육질을 뚫고 오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양념을 바른다. 기름이 잦아 들면서 양념이 배고 이 작업이 서너 차례 반복된다. '찰나'에 이뤄지는 일이기에 몇 해 경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듯싶다. 장어 굽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먹고 싶다'는 욕망이 '체면'이라는 이성을 압도한다. 염치불구하고 석쇠 위의 장어 한 점을 집어 먹었다. 무어라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 순간이 음식점 취재에서 가장 행복한 때고, 이것이 기자만의 특권이라는 말 밖에는….
 
이만하면 40년 전통의 장어구이 맛이 특별할 수 밖에 없구나, 생각하려는 찰나. 공순자 여사께서 "고추장 봐라, 고추장, 우리 집 왔으몬 고추장을 봐야지"라며 한마디 던지신다. 음식점 취재를 다니다 보면, 장독을 열어 줄 때가 제일 반갑다. 그 집 음식의 근원을 보여주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장독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고추장을 듬뿍 퍼 올린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붉은색이 인상적이다. 개운한 단맛과 카랑카랑한 매운맛에 콤콤한, 하지만 기분 좋은 발효향이 어우러졌다. 장어소스로 쓸 게 아니라 그냥 밥을 비벼 먹어도 꿀맛이겠다. 경남 함양에 있는 사돈댁에서 해마다 3백~5백 근씩 엄선해서 보내오는 태양초로 담근다고 한다. 자고로 '음식 맛은 장맛'이라 했거늘, 이 장독이 비지 않는 한, 향옥정의 맛은 변치 않을 듯 싶다.
 
▲ 향옥정 창시자 공순자 씨가 장어 먹는 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큼지막한 자개상에 장어구이정식이 거나하게 차려졌다. 좁은 방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사용하기 시작한 자개상은 이제 '향옥정'의 상징이 되었다. 20년 넘게 사용하다 보니 수명을 다해, 이제는 세 개 정도만 사용하고 있다. 대충 세어도 찬의 종류만 스무 가지에 이른다. 김치건 무침이건 조림이건 장아찌건 모든 반찬은 직접 만든다. 40년 공력의 손맛이니 그 맛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이 밥상에서 장어구이만 빼고 백반집을 차려도 대박 날 것이다. 오창원 대표의 한마디가 인상적이다. "장보러 갈 때마다 어머님께서는 '하루에 3만~5만 원만 더 쓰면 손님이 즐겁다'는 말씀을 버릇처럼 하십니다." 푸성귀 하나도 제 각각 가치가 다른 법이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그 말을 듣고 보니, 해묵은 자개상에 놓인 반찬들 때깔이 유독 빛이 난다.
 
▲ 태양초로 직접 담근 고추장.
장어구이 맛은 명불허전이다. 우선 살이 도톰하니 크기부터가 여느 장어집과는 차이가 난다. 양식이라지만 사료맛이 나지 않으니 축양이 잘됐고, 잡내가 없으니 장어 잡는 솜씨 또한 짐작이 간다. 살은 부드럽게 씹히고, 껍질은 적당히 쫀득거린다. 장어구이에 양념을 바르는 것은 기름내를 죽이고 장어 고유의 맛을 활성화시키기 위함이다. 양념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양이 많아지면 오히려 장어 맛은 죽고 양념 맛만 도드라진다. '향옥정'의 양념은 장어 맛을 살려주기 위한 빛나는 조연으로 그 역할을 다한다. 소금구이와 양념구이의 장점만을 살린 셈이다. 단골들 가운데는 이집에 앉으면 유독 평소보다 장어를 많이 먹게 된다는 이들이 더러 있다. 양이 적어서가 아니라 물리지 않는 맛 때문일 것이다.
 
방 두 칸에서 시작한 향옥정은 이제 100석 규모의 제법 큰 음식점으로 성장했다. 한번에 확장을 한 것이 아니고 형편이 될 때마다 집 한 칸씩 늘여 온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옛날 집 서너 채가 지붕을 맞대고 있는 구조는 마치 미로와도 같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모습이다. 그 흔적을 지우고 번듯한 건물을 올릴 수도 있었건만, 역사를 허물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더불어 장어에 대한 고집과 음식에 대한 원칙 또한 변함없다. '전통'이 살아있고 '맛'이 살아있으니 말 그대로 '전통의 맛'이다. 장어도 좋고, 장맛도 뛰어나고, 굽는 솜씨 또한 더할 나위 없지만 '향옥정'의 음식 맛이 각별한 것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는 바로 그 '전통의 맛' 때문이 아닐까?


Tip. 향옥정 장어맛 제대로 즐기기 ──────
장어구이정식 1인분이 3만5천원이고, 장어구이 추가 시 1인분에 2만원이다. 향옥정의 옛 분위기를 느끼려면 작은 방에 앉아 자개상에 차려진 상을 받는 것이 좋다. 하지만 자개상이 두 개 밖에 남지 않아 반드시 예약이 필요하다. 이마저도 주말이나 여름 성수기에는 장담할 수 없지만, 도전해 볼 가치는 있다. 물론! 어느 상에 차려졌건 장어구이 맛은 차이가 없다.

주소:김해시 불암1동 220-8
연락처:055)336-6283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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