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업으로 번창했던 도요새의 낙원
(10) 생림면 도요리 도요마을
2012-02-07 박현주 기자
가야·신라시대 3천호 이상 거주, 조선시대 '도요저·도요진' 불려
이름만으로도 중요한 곳 추측, 농사 대신 생선 거래하며 생계
김해시의 가장 북쪽에서 밀양과 양산을 마주보고 있는 김해 생림면 도요리. 도요마을로 가는 도로 왼편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낙동강변에는 오랜 옛날부터 많은 어촌마을이 있었다. 도요마을 역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야, 신라시대 때는 낙동강을 따라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 3천 호 이상이 살았던 번창한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강가에 도요새가 많이 날아와 '도요'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 때는 도요저(都要渚) 또는 도요진(都要津)이라 불렸다. 한자 '要'를 마을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중종실록'에는 '도요리에 1천 호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도요저(都要渚)'라는 글을 남겼다. "김해와 밀양이 경계선에 있다. 이곳 주민 수백 호는 대대로 생선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 설명과 함께 시도 썼다.
"동쪽 이웃에 딸 있어 서쪽 이웃에 시집 가고 / 남쪽 배에 고기 오면 북쪽 배에 나눠준다. / 한 조각 강가 땅에 사는 일 어려워도 / 자손들 끝내 밭 갈고 김 맬 생각 않더라."
동서남북 사방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어업이 생업의 위주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시다.
어업 쇠퇴하고 농촌으로 변모, 마을 특산품 모래밭감자 유명
도요창작스튜디오 들어서며, 김해의 예술인촌으로 거듭나
정해윤(62) 이장은 "지금은 56가구에 260여 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외지로 나가고 부모들이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마을 취재를 하러 간 날, 마을회관 앞으로 어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마을 청소도 해야 하고, 달집태우기 행사 준비를 해야 하고, 크고 작은 마을 일들을 의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에 도요창작스튜디오가 들어서면서 부산에서 도요마을로 이주를 해 온 최영철 시인 조명숙 소설가 부부가 전해주는 마을 어른들의 인심은 따뜻하다. "농사도 안 짓고 뭐 먹고 사노"하고 걱정을 하는 어른들이 감자며 고구마 등을 집안에 놓아두고 간단다. 문제는 누가 놓고 간 선물인지도 모른다는 것. 도요창작스튜디오의 연극배우들이 연습을 하느라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어른들은 큰 불만 없이 묵묵히 참아주시고 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마을 청소를 하기 위해 모이라는 이장의 방송이 들려왔다. "주민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정겨운 내용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청소를 하고 나면 도요마을이 환해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