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세월이 녹슨 철교…생림 끝에서 삼랑진을 그리워하다
(47) 생림면 <3>
2012-09-18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지난번에 걸음을 멈추었던 성포마을의 이작초등학교에서 북으로 '사깍창모롱이'를 지나면 마사리의 송촌마을이다. 원래는 말 마(馬)에 쉴 휴(休)라 낙동강 건너는 나루에서 말이 쉬는 마을이라 마휴촌이라 불리다가, 제방에 모래가 쌓이면서 모래 사(沙)를 붙여 마사리가 되었단다. '솔말'이라 불렸던 송촌마을은 작약산 아래 소나무 마을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현풍 '솔(率)리'의 곽 씨가 입주하면서 마사리의 마(馬)를 붙여 '솔마(率馬)'가 되었다가, '솔'이 소나무 송(松)으로 표기되면서 송촌(松村)이 되었던 모양이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두 그루의 젊은 소나무를 제외하면 소나무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70여 가구에 두 서너 채의 전원주택이 새로 보이는데, 구봉사 오르는 길을 오르고 또 오르면 산 중턱에 고라니골(高鞍谷)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숨어 있다.
마사로를 따라 북으로 가면 북곡마을 표지석이 있다. 서쪽으로 꺾어 만나는 작약산 자락에는 가야시대로 추정되는 북곡고분군이 있고, 북쪽으로 마을입구를 연 북쪽 골짜기엔 70여 가구가 산다. 북곡마을 위의 낙동강 변에는 '독뫼'의 독산마을이 있다. '콰이강의 다리'로도 불렸던 낙동철교를 생림 쪽에 앉힌 언덕이 '독뫼'고, 동쪽에 또 하나의 작은 언덕이 '아래 독뫼'의 하독산마을이다. 이 두 언덕이 비록 작고 낮긴 하지만, 생림수리제방을 쌓아 330만㎡(100만 평)의 이작들판을 만들어내는 데는 아주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한다. 경전선의 이설로 철교폐쇄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철도건널목의 표지판이 남아있는 낙동철교 앞에 선다. 가까이 다가가 기하학적 철근골조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다 일제강점기 1940년 4월의 개설을 떠올렸다. 무슨 까닭에선지 불현듯 중국에서 압록강철교 너머로 북한 땅을 바라보던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철교 오른쪽의 사각형 통제소와 아랫쪽 원통형 벙커의 이끼 끼고 색바랜 콘크리트가 그런 감상을 부채질하는 모양이다. 서쪽으로 향하던 옛 경전선의 녹슨 철로를 잠시 따라 걷다 저 앞에 막혀 있는 마사굴(새굴, 1.5㎞)을 보고 발걸음을 돌린다. 레일바이크 등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던 계획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낙동철교 앞 건널목에서 강쪽으로 내려가면 1905년 5월에 철교로 가설되어 1962년부터 인도로 변한 낙동강의 첫 번째 다리 옛 삼랑진교에 이른다. 옛 삼랑진교 앞에는 김해시의 도로표지판과 생림면의 '생림동천(生林洞天)'이 함께 서 있는 삼거리가 있다. 구 삼랑진교와 그 앞의 마사교(1996.9)를 오가며 사진을 찍는데 과일노점을 편 아주머니 한 분이 뭐하느냐고 묻는다. 이 연재를 위한 취재 내내 이럴 때가 제일 곤란했지만, 어느새 <김해뉴스>의 기자 사칭에 익숙해 있음에 놀란다. 20년 전 쯤, 김해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운전도 서툰데 이 다리를 건너다 대항차를 만나 사이드미러를 접어가며 진땀 흘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너비가 4.3m밖에 되지 않는 이 다리에서 재수없게(?) 다른 차라도 만날라 치면 아예 울어버리고 말았다는 '아지매' 운전자들의 회상도 이제는 우스개가 되었다. 동쪽 낙동철교 너머에 넓고 시원한 삼랑진교(2008.12)가 새로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생림대로에서 곧장 이어지는 새 다리를 애용하게 되었지만, 한림에서 마사리를 거쳐 삼랑진과 밀양으로 가는 차들은 여전히 '용맹스럽게' 이 다리를 건너다니는 모양이다.
다시 마사교 앞 삼거리에 올라 제방 위의 금곡로를 따라 서쪽의 마사1구로 간다. 얼마 안돼 KTX가 달리는 신품의 연보랏빛 낙동강교 아래에 선다. 서쪽의 한림정역에서 생림터널을 빠져 나온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강변을 달려야 비로소 강을 건너게 되는 참 길고 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다리란다. 지난 2009년 9월에 개통한 이 다리는 맞은편 강가에 있는 도문화재 제306호 삼강사비(三江祠碑)에 대한 영향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건설사가 처음 제시했던 철근트러스트는 아주 짙은 보랏빛이었다. 강기슭 양쪽의 녹색과 푸른 강물, 그리고 하얀 모래에 어떻게 진보라가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위원들과 함께 한심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결국 좀 연해지긴 했지만 보라를 바꾸지는 못했고, 환경이나 문화재와의 위화감도 해결하지 못한 채, 저 혼자만 예쁜 다리가 되었다. 강을 건너는 교량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곡선과 함께 색채도 아름답다는 철도매니아도 있는 모양이다.
발길을 되돌려 안양마을에서 동쪽으로 양지마을을 내려다 보며 도요고개를 넘는다. 산을 끼고 강변길을 따라 돌면 도요보건진료소가 도요마을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원래는 도요새가 많은 물가의 모래섬이라 도요저(都要渚)라 불렸던 어촌마을이었다. 지금은 70여 호에 불과하지만 조선 초만 해도 수백 호였고 가야시대에는 3천여 호나 되었다는 전승도 있다. 삼랑진으로 건너가는 깡층나루와 양산의 작원관으로 건너가는 작원진이 있었던 수운의 요지였다. 조선 성종 때 점필재 선생의 도요진이란 시가 이런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동쪽 마을의 딸은 강 건너 서쪽 이웃집에 시집가고, 남쪽 배의 고기가 오면 북쪽 배에 나누며, 한 조각의 언덕이라도 살아가기 간단하니, 자손들이 밭갈고 김매는 건 꿈도 꾸지 않는다'. 나루 대신 도요감자가 유명해졌으니 시대는 변하였다. 가운데 마을회관에서 돌아보면 서쪽 산 중턱엔 고풍스런 도요교회가 있고, 맞은 편에는 이작초등학교 도요분교를 리모델링한 도요창작예술촌이 있다. 한동안 화가와 조각가들의 공방으로 활용되다가 2009년부터 연출가 이윤택의 극단이 둥지를 틀고 출판과 공연의 판을 벌이고 있다. 매월 둘째 토요일 오후 2시 30분에 시작되는 토요가족극장이 어느새 성황을 이루는데, 여기서 초연된 연극이 밀양에 가고, 서울 연희단 공연으로 올리기 때문에 초연을 즐기려는 매니아도 적지 않다는 게 촌장 김영철 시인의 귀띔이다. 남쪽 이웃 상동면의 여차마을로 통하는 길도 없고 더 나아갈 곳도 없다. 100여 객석을 가득 채운 관람객들과 함께 로맨틱 뮤지컬 '사랑을 지껄이다'의 감상으로 생림면 순례의 발걸음을 마감한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