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사(長遊寺)는 김해시와 창원시의 경계인 불모산(佛母山) 또는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계곡 이름마저 '장유'로 불리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보면 맑은 냇물을 만나게 되는데, 여름이면 녹음의 서늘한 기운을, 가을이면 단풍의 붉은 기운을 골골이 녹이며 흐르고 있다.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걷다가 숨이 가빠 두 번째 쉴 때 쯤, 여기로부터 기운을 이끌어간 산자락 아래로 김해 시내가 편편하게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부산 강서의 평야와 바다가 눈 끝에 걸리면서 장유사와 만나게 된다. 물론 차를 가지고 가면 숨이 찰 일도, 다리가 아플 일도 없다. 그러나 차를 몰아가는 손과 발의 움직임도 그다지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는 가락국 제8대 질지왕(銍知王·?~492)이 절을 지을 당시 세웠다는 장유화상사리탑(長遊和尙舍利塔·장유화상은 허왕후의 오빠로서 허보옥(許寶玉)이라고도 한다)이 남아 있다. 절에서 오른쪽 60m 아래가 장유화상이 최초로 수도했던 토굴이라 하고, 장유사 입구의 사라진 절터는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김수로왕(首露王·42~199)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장막을 치고 합혼(合婚)한 곳에 세운 왕후사터(王后寺址)라고 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절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불교의 전래는 김수로왕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는 중국 진(晉)나라 승려 순도(順道)가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2년(372)에 고구려로, 같은 진나라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침류왕(枕流王·384~385) 즉위년(384)에 백제로,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눌지왕(訥祗王·417~458) 때 신라로 불교를 전했다는 사실 즉,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찰들이 절의 연원을 신비로움과 연계시키는 경우는 허다하니,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 절을 감상하기에는 더욱 유리할 것이다.
현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전신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1545년 6월 김해에서 온 장유사 승려 천옥(天玉)의 부탁으로 적어준 <장유사중창기(長遊寺重創記)>를 보면, 이 절을 처음 지은 것은 신라 애장왕(哀莊王·800~809) 때의 화주(化主)였던 월지국(月支國) 신승(神僧) 장유(長遊) 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로왕이 중창한 후 화주 소석(小釋)에 의하여 여덟 번째 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주세붕이 기문을 적어준 것은 아홉 번째 중창이다. 주세붕의 기문에서 천옥이 이야기하였다는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설이나 기록과는 시기와 장유의 출신 지역 차이가 너무 크다. 필자는 다시 말한다. 절이 누구에 의해 언제 생겼느냐가 아니라 그 절을 유지하고 있는 정신적 바탕이 무엇이냐, 그것을 참으로 종교적 차원에서 믿느냐가 중요하다. 기문에서 천옥은 절의 규모를 설명하였는데, 기둥이 60개이며, 불전(佛殿)은 순금을 쓰고 주단(朱丹)을 섞었다고 하였으니, 그 규모와 화려함이 천옥의 말대로라면 당시 영남에서 최고였을 것이다.
절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둘러보았으니, 이제 그곳을 찾았던 시인의 감상을 보기로 하자. 그런데 장유사에서 읊은 시는 조선조 말 허훈(許薰·1836~1907)의 것밖에 없다. 이 점 아쉽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하여도 시간의 차이 등 다양한 상황에서 읊은 것이라 당시 장유사의 모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거센 바람 불어 일렁이더니 하늘엔 눈 개이고 나그네 외로운 암자에 닿으니 걸음이 가변구나 만겁의 바윗돌 부처 기운을 나누었고 육시라 소나무 꼭대기 종소리 떠돈다 동남의 모든 산굴 이리저리 높고 낮고 푸른 바다 모든 돛대 보내고 맞이한다 생학이 천년토록 돌아오고 돌아가니 이 몸이 낭풍성에 있는 줄 알겠네
필자가 갔을 때는 험한 날씨였는데 절 가까이 가자 바람도 그치고 눈발도 걷혔다. 절 주변 바윗돌은 부처의 기운이 서린 듯 엄숙하고, 우거진 소나무 위로 염불 시간이라 종소리가 울린다. 저 아래로 겹쳐진 산과 바다를 바라보는 시인은 스스로 곤륜산(崑崙山) 낭풍성(閬風城)의 신선이 되었다.
넉넉한 시상은 허공에 가득하고 평평한 푸른 바다 사찰과 하나로구나 난간에 기대니 모든 하늘의 별 딸 수 있을 듯 지게문 여니 항상 부는 만리의 바람이로다 일본의 외로운 연기 밝았다 사라졌다 하는 속 월지의 초상인가 믿거니 의심커니 가운데라네 동남의 아름다운 빛 이름난 절 많아도 뛰어난 풍경은 본디 이와 같은 것 없어라
금방이라도 시가 쏟아져 나올 듯한 시인의 눈에 하늘은 별을 쏟아 부을 듯, 흐릿한 바다 저편으로는 일본이 보일 듯, 푸른 바다와 하늘과 절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풍경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 풍경 속에서 시인은 장유 스님인 듯 아닌 듯 신비한 그림 속의 인물과 함께 하고 있다. 여섯 번째 구절의 월지(月支)는 중국 한(漢)나라 때 감숙성(甘肅省) 서북쪽에 있던 종족 이름이면서 나라 이름이다. 이후 중앙아시아로 옮긴 것은 대월지(大月支), 원래의 자리에 있던 것은 소월지(小月支)라고 한다. 이 절의 창건자인 장유 스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외로운 암자 고요하여라 천년을 지났고 한 고개 높디높아 두 주에 자리 잡았네 바위굴엔 늘어진 젖인양 나는 흰 박쥐 소나무 그루 옹이엔 검은 토끼 새끼 감추었네 이끼가 가늘게 스며 아른거리는 기운 탑을 두르고 구름 기운 텅 비고 밝아 해가 누각을 비추네 나막신 신고 남으로 와 즐거움이 고루 미치니 절묘한 이 놀음 앞의 어떤 놀음보다 우뚝하다네
천년 세월 창원과 김해 두 고을의 경계인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장유사. 오랜 세월과 깊은 골짜기에 기대어 인간인 양 자연인 양 오묘한 자취를 키웠다. 이때 나그네의 호기심인양 햇빛이 누각 사이를 비추어 시야에 새로운 세계를 펼쳐준다. 시인은 세 수의 시에서 그윽한 골짜기와 신비로운 절 분위기,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장유사가 보여주는 모든 것을 노래하였다.
붉은 깃발 사방으로 흩어져 검은 깃발 덮으니 불타는 물결 일렁일렁 안개도 막 걷히네 한 덩어리 달궈진 수은의 신선 솥이요 오색 무늬 비단은 직녀의 베틀로 짰구나 겹겹의 옥빛 쟁반으로 옮겨 잠깐 머물고자 막 나와 둥글게 높더니 진홍빛 바퀴 날아오르네 오래된 누에고치 부상에서 실을 뽑아내는데 우상이 떠나 도우니 임금의 은택 도움 받았지
제목에서 보듯 이 시는 새벽에 종각에 앉아 푸른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읊은 것이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이 시각에 장유사에 있었던 적이 없어 도무지 그 풍경이 상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가 뜨기 직전의 모습을 붉은 깃발이 검은 깃발을 덮는다고 하고, 햇빛이 비치는 맑은 바다를 수은과 무늬 비단으로, 떠오른 해를 진홍빛 바퀴로 그려낸 시인의 표현에서 필자는 장유사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맞이하는 일출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 구절의 우상(虞裳)은 조선조 후기 역관(譯官)이자 시인인 이언진(李彦瑱·1740~1766)이다. 그는 1763년 통신사 조엄(趙曮)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다. 27세로 요절하였는데,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초고(草稿)를 직접 불살라버려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으나, 그의 아내가 빼앗아 둔 일부의 유고(遺稿)가 문집인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에 전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소설 <우상전(虞裳傳)>을 통해 그를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절의 의미는 이언진이 통신사의 역관으로 부상, 즉 일본에 가서 활약한 것을 말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허훈이 장유사를 떠나면서 그 절의 승려에게 준 세 수의 시를 감상하며 우리도 장유사를 떠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