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달인의 손맛
불암동 장어구이집 '향옥정'
2011-04-05 박상현 객원기자
회유성 어류인 뱀장어(민물장어)는 민물에서 5~12년간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먼 바다로 나가 태평양의 심해에서 알을 낳고 죽는다. 알에서 부화한 장어는 해류를 타고 1~3년에 걸쳐 제 어미가 살던 강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강 하류에는 어김 없이 '장어촌'이 형성되어 있다. 전북 고창, 전남 나주, 인천 강화도 등이 유명하다.
지형적으로나 규모로 봤을 때, 김해 불암동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마을 뒤편에 부처바위가 있었다 해서 불암(佛岩) 또는 선암(仙岩)마을로 불렸던 이곳은 과거 서낙동강의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다. 강에 그물을 던지면 자연산 장어가 한가득 달려 나왔다. 그래서 '동장군도 선암에는 못 들어간다'는 말이 생겼다. 장어는 피로 회복이나 원기 증진에도 좋지만 도라지, 생강 등을 넣고 달여 먹으면 겨울 추위에 끄떡없고, 감기도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196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장어집이 이제는 어느덧 30여 곳에 이른다. 1970년대부터는 장어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도매상들까지 가세해 명실상부한 '장어촌'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향옥정'이 차지하는 위상은 각별하다. 공순자(72) 여사로부터 시작된 '향옥정'은 대를 이어가며 40년간 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장남인 오창원 씨는 경영을, 차남인 창식 씨는 구이를 담당하며 가족경영을 고수한다. 김해와 부산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적으로도 그 위세가 대단하다. 정치인과 연예인 등 이곳을 다녀간 유명인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향옥정'을 설명함에 있어 전통과 명성은 한낱 수식어에 불과하다. '향옥정'의 진정한 가치는 재료와 정성, 즉 음식점이 가져야 될 본질에 숨어있다.
장어는 크기에 따라 맛도 다르고 가격 차이도 많이 난다. 너무 작으면 맛과 육질이 떨어지고, 너무 크면 기름이 많아 느끼하다. 장어의 크기는 몇 마리가 1㎏ 인지로 따진다. 즉 6마리가 1㎏이면 '6미', 2마리가 1㎏이면 '2미'라고 한다. 전국의 이름난 장어집에서는 대부분 3~4미를 사용한다. 구이용으로는 이 정도 크기가 최적이기 때문이다. '향옥정'의 경우 공개를 꺼려했지만 비슷한 수준이라 보시면 된다. 허나 장어의 크기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대단하다. 장어를 좀 잡숴본 분이라면 크기를 비교해 보시고, 미각이 탁월한 분이라면 맛과 질감을 비교해 보실 것을 당당히 권한다.
기름이 많은 뱀장어는 바로 구우면 연기가 과도하게 배고, 소금으로만 구우면 기름 맛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장어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애벌구이한 장어에 양념을 발라 굽는 것이 좋다. '향옥정'은 복사열이 강한 스토브에 애벌구이를 해 기름을 충분히 제거한다. 그런 다음 연탄불 위에서 양념을 서너 번 발라 구워낸다. 40년간 변함 없는 방식이고 경험을 통해 터득한 최적의 조리법이다.
이만하면 40년 전통의 장어구이 맛이 특별할 수 밖에 없구나, 생각하려는 찰나. 공순자 여사께서 "고추장 봐라, 고추장, 우리 집 왔으몬 고추장을 봐야지"라며 한마디 던지신다. 음식점 취재를 다니다 보면, 장독을 열어 줄 때가 제일 반갑다. 그 집 음식의 근원을 보여주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장독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고추장을 듬뿍 퍼 올린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붉은색이 인상적이다. 개운한 단맛과 카랑카랑한 매운맛에 콤콤한, 하지만 기분 좋은 발효향이 어우러졌다. 장어소스로 쓸 게 아니라 그냥 밥을 비벼 먹어도 꿀맛이겠다. 경남 함양에 있는 사돈댁에서 해마다 3백~5백 근씩 엄선해서 보내오는 태양초로 담근다고 한다. 자고로 '음식 맛은 장맛'이라 했거늘, 이 장독이 비지 않는 한, 향옥정의 맛은 변치 않을 듯 싶다.
방 두 칸에서 시작한 향옥정은 이제 100석 규모의 제법 큰 음식점으로 성장했다. 한번에 확장을 한 것이 아니고 형편이 될 때마다 집 한 칸씩 늘여 온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옛날 집 서너 채가 지붕을 맞대고 있는 구조는 마치 미로와도 같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모습이다. 그 흔적을 지우고 번듯한 건물을 올릴 수도 있었건만, 역사를 허물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더불어 장어에 대한 고집과 음식에 대한 원칙 또한 변함없다. '전통'이 살아있고 '맛'이 살아있으니 말 그대로 '전통의 맛'이다. 장어도 좋고, 장맛도 뛰어나고, 굽는 솜씨 또한 더할 나위 없지만 '향옥정'의 음식 맛이 각별한 것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는 바로 그 '전통의 맛' 때문이 아닐까?
Tip. 향옥정 장어맛 제대로 즐기기 ──────
장어구이정식 1인분이 3만5천원이고, 장어구이 추가 시 1인분에 2만원이다. 향옥정의 옛 분위기를 느끼려면 작은 방에 앉아 자개상에 차려진 상을 받는 것이 좋다. 하지만 자개상이 두 개 밖에 남지 않아 반드시 예약이 필요하다. 이마저도 주말이나 여름 성수기에는 장담할 수 없지만, 도전해 볼 가치는 있다. 물론! 어느 상에 차려졌건 장어구이 맛은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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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