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곤쉴레문화센터 내부.
체스키크롬로프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인 체스키크롬로프. 저 아래 관광객들로 붐비는, 르네상스니 바로크니 하는 중세풍의 건물들과 그림 같이 높은 성과 푸른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과는 달리 언덕을 밀어 맨살이 채 딱지조차 앉지 않은 상처처럼 드러난 마을 외곽의 버스 정류장은 그야말로 딴 세상이다.

▲ 벨베데르 궁.
돌아가는 길. 석양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늦은 오후. 표 파는 사람도 없이 행선지만 손글씨로 흘려 적어놓은 정류장 팻말 아래 아까부터 일흔도 넘어 보이는 노인이 봉지로 둘둘 감싼 술을 연신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 이미 많이 취했다. 출발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다시 시간표를 확인하러 접근했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그이도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를 보고 있었으리라. 체스키부제요비치 행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이라고는 어차피 우리와 그뿐이었으니. 게다가 우리는 눈에 잘 띄는 아시아인 일가족. 마침내 눈인사를 했다. 뜻밖에 그의 입에서 유창한 독일어가 나왔다. 버스가 곧 올 거라며 걱정하지 마란다. 독일어 시간에 공부 좀 해둘 걸 후회하며 영어로 받았더니 영어는 모른다. 강술을 마시는 게 그래 보여, 가지고 있던 과자를 좀 나눠 주려니 안 받겠단다. 대신에 자기 술을 건네며 마셔 보란다. 결국 나는 그의 술을 마셨고 그제서야 그도 나의 과자를 받았다. 어이쿠. 술주정뱅이에게 잡혀버렸다. 차는 왔지만, 낮은 촉수의 어둑한 시외버스 속에서 주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싫다는 눈초릴 보내는데도 그는 쉬지 않고 나의 등을 두드려가며 자신의 조국 체코를 증오한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작고 부족하지만 모두가 공평하게 국가로부터 생필품을 배급받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에게 민주화란 이름으로 찾아온 개혁 개방 자본주의는 재앙일 뿐이었다. 이미 어두워져 캄캄해진 남부 체코의 시골길.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알 수 없는 어둠속. 한줄기 불을 밝히며 달리는 시외버스. 흔들거리며 술주정뱅이 노인에게 들은 푸념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흔해빠진 이야기였다. 옛 공산국가의 낙오되어 방치된 가난한 인민들의 모습. 불운 혹은 불행. 그것이었다.
 
▲ 크롬로프.
체스키크롬로프를 찾은 것은 에곤쉴레 때문만은 아니다. 프라하에서 비엔나로 가는 길에 1박을 하며 구경도 할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전날 국영여행사인 체독에 들러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어지는 열차편을 예약했다. 기차는 체스키부제요비치에서 갈아타야 했다. 체스키라는 말이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이다. 과거 보헤미아의 중심 도시였다는 체스키부제요비치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미국의 유명 맥주 버드와이저의 원래 이름이 이곳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을 듣고 맥주 맛도 좀 보자 싶은 마음도 생겼다. 호텔을 정해 놓고 시외버스를 타고 사오십분 거리의 체스키크롬로프 구경을 갔다.
 



강이 휘돌아가는 물돌이동을 의미한다는 크롬로프는 에곤 쉴레의 외가 마을이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썩 좋진 않았다고 알려진 에곤쉴레지만 도시 생활에 지친 그가 자주 찾았던 곳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여러 점의 마을 풍경화와 나중에 말썽이 되기도 했지만 그의 특기(?)인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누드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당시엔 크루마우란 독일식 이름을 썼다는데 지금도 마을은 여전히 아주 작다. 중심가에 선물가게와 식당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고 근처에 에곤쉴레문화센터가 있다.

▲ 포옹 <1917>
안내서에 따르면 1992년 재단을 만들고 16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양조장을 개조해 1993년 에곤 쉴레 문화센터로 개관하였다. 28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에곤 쉴레지만 살아서 이미 비엔나 최고의 화가 대접을 받았던 그였으니, 좋은 작품을 뒤늦게 갖추기엔 여러모로 힘겨웠을 것이다. 문화센터 내 전시된 작품들은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에곤 쉴레가 크롬로프를 그린 마을 풍경과 실제의 정경 사진을 비교해 전시해 놓는 등 체스키크롬로프를 방문한 에곤 쉴레의 애호가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문화센터의 전시 공간을 십분 활용해 동유럽과 서유럽의 젊고 새로운 신진 작가들을 위한 기획전시를 부지런히 열고 있었다.
 
▲ 크루마우
다음날. 비엔나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플랫폼 표시판에 버스가 그려져 있다. 어제 한번 당황하고 경험해본 터라 여유가 좀 생겼다. 그렇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라는 뜻이다. 과연 광장에 버스가 몇 대 줄지어 서 있다. 기차 대신이다. 가방이랑 짐은 제일 뒤쪽의 트럭에 싣는다. 그렇게 기차표를 가진 승객을 태운 버스가 앞장을 서고 짐을 실은 트럭이 맨 뒤에. 줄을 지어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갔다. 그리고 국경 역에서 기차로 바꿔 타고 린츠를 거쳐 비엔나로 향했다.
 
이제 비엔나의 벨베데르 궁 미술관이다. 17세기 후반. 도시 남쪽에 아름다운 여름별궁으로 지어진 벨베데르 궁전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재산이 되면서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 언덕위의 상궁과 아래쪽 하궁으로 나뉘어져, 상궁은 오스트리아 회화관으로, 하궁은 중세·바로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에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은 상궁이다. 클림트의 '키스'가 있어 유명하다. 벨베데르 궁전 상궁 2층. 그곳에 에곤쉴레도 함께 있다.
 




'소녀와 죽음'(유채 150x180)을 보고 있다. 1915년 결혼을 앞둔 에곤쉴레가 오랜 기간 모델이자 내연 관계였던 발리와 헤어지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나로선 그림의 내력과 관계없이 우선 낯익고 반갑다. 예전에 들고 다니던 어떤 책의 표지 그림이여서 통성명도 없이 낯이 익어버린 탓이다.

▲ 죽음과 소녀 <1915>
그림 속 두 사람은 바닥 위에 누워 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각도다. 죽음은 수도복 차림의 남자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안겨 있는 여인을 다독이며 안심 시키고 있다. 죽음이 여인을 안심시키고 있다. 죽음이 오히려 살아 있는 여인을 안심시키고 있다. 여인은 등나무처럼 거칠고 억센 팔을 뻗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듯 엉겨 죽음의 남자를 끌어안고 있다. 삶이란 이런 것인가. 책을 들고 다니며 표지 그림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죽음이 위로가 되는가. 때로는 죽음이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인가, 하고. 아무튼. 성과 죽음에 천착했던 천재 에곤쉴레가 25살 때 그린 그림이다. 생각해 보니 그 책을 들고 다니던 시절 아마 나도 그만한 나이였을 것이다.


■ 에곤 쉴레(1890∼1918) ─────

오스트리아 표현주의화가. 비엔나 근교의 툴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곳의 기차역 역장이었다. 어려서부터 연필로 그리는 소묘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인체의 육감성을 강렬한 필선으로 표현한 매우 독특한 작품 세계가 특징이다. 클림트를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되기도 한 그는 비정상적으로 비틀린 인체와 적나라하게 성적인 부분을 드러내 강조한 누드 작품이 많으며, 그런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클림트, 코코슈카와 더불어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다. 대표작으로 '포옹' '죽음과 소녀' '자화상' 등이 있다.


■ 체스키크롬로프(Cesky Krumlov) ─────

인구 만오천의 작고 아담한 도시. 마을 전체를 블타바 강이 S자로 휘감으며 흐르고 있어 아름다운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프라하에서 버스로 2시간 40분 가량 걸리는데 기차를 타고 가면 체스키부제요비치에서 갈아타야 하므로 버스가 편하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1박을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을이 작으므로 당일치기를 하는 게 편하다. 1박을 한다면 아름다운 건물이 즐비한 체스키부제요비치와 묶어서 구경하면 좋다.

● 체스키크롬로프 관광청
http://www.ckrumlov.info/docs/en/kaktualita.xml

● 에곤쉴레문화센
http://www.schieleartcentrum.cz/new/index.phpartid=1&lang=en&menutype=1&mode=normal


■ 벨베데레궁전 미술관(Museo Marino Marini) ─────

·주소:3 Prinz Eugen Strasse 27 (상궁)
·전화:43 1 795 57-0
·입장시간:매일 10:00~18:00
·특징:상궁과 하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궁(Obere Belvedere)은 19-20세기 회하와 조각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하궁(Unteres Belvedere)에는 중세 미술과 바로크 미술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상궁에는 특히 클림트의 '키스'와 '유디트 I' 등이 소장되어있으며 코코슈카와 에곤쉴레의 대표작품들이 소장돼 있다.

● 벨베데르궁미술관
http://www.belvedere.at/jart/prj3/belvedere/main.jart?rel=en






윤봉한 김해 윤봉한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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