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에서, 작은 인두로 나무의 표면을 지져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장면을 본 적이 있으신지. 쇠로 된 인두를 불에 달구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이 그림을 인두화, 낙화(烙畵)라고 한다. 나무를 태운다고 해서 영어로는 '우드버닝(Woodburning)'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은 인두를 불에 지져 대나무나 나무 등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넓은 의미로 '낙화'라고 부르고 있다. 낙화가 언제 생겨났는지 그 기원에 대한 기록은 없다. 우리나라에는 오세창(1864~1953)이 편찬한 우리나라 서화가 인명사전 <근역서화징>을 비롯해 조선시대 문헌 등에 낙화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조선중기에 낙화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선비들은 합죽선의 대나무를 낙화로 장식한 것을 '낙죽'이라고 불렀다. 문화재청은 1969년에 '낙죽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했다. 충청북도는 '낙화장'을 도무형문화재로 인정하고 낙화를 계승 보존한다. 김해에서 낙화를 그리고 있는 이대희(63) 씨를 만났다.

▲ 이대희 씨가 노송을 낙화로 그리고 직접 만든 좌탁 작품.

이런 걸 대물림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버지랑 맏형이 손재주가 좋았거든요
딸 결혼 부케도 직접 만들었고
조경사·요리사 등도 두루 해봤어요

관광지에서 '인두화'를 보고는
직접 그려보기로 작정했죠
처음엔 힘들었는데 결국 해냈어요
미대 출신 아내의 역할도 컸지요

친구들이 작품에 호를 새겨달라며
작당을 한 뒤 '초심'이라 불렀어요
진짜 큰 작품 만들어 전시회도 할겁니다

이대희의 작업실은 대동면 동남로 45번길 32 집의 한 켠에 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에 한창 건조 중인 송판 60여 장이 놓여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문 위에 그의 낙화작품이 현판처럼 걸려있었다. 용틀임하는 소나무를 그린 낙화였다. 가로 2m, 세로 55㎝의 큰 작품이었다. 마루 위에 놓인 좌탁 역시 낙화였다. 그가 한때 즐겨 했다는 박공예로 만든 스탠드도 여러 개 있었다. 작업실은 인두와 각종 도구, 낙화작품들로 빼곡해서 주인 말고 다른 사람은 들어설 자리조차 없어보였다.

이대희는 김해군 대저면 신작로부락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부산으로 편입된 지역인데, 지금의 강서구청 앞 큰 도로 옆이 신작로부락이 있던 곳이다.

"아버님이 농사를 지었는데, 집에서 쓰는 웬만한 물건들은 직접 만드셨습니다. 맏형은 부산상고를 다녔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렸지요. 미술부 활동도 했구요. 제가 국민학생이었을 때 그림 그리는 형의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그 덕분인지 저도 그림만 그렸다하면 교실 뒤 게시판에 제 그림이 붙곤 했어요." 그는 대상초등학교, 낙동중학교를 나온 뒤 덕원공고(현 부산디지털고등학교) 기계과에 진학해 1기생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 활동을 열심히 했다. 당시 미술교사였던 추경옥 선생은 현재 서울에서 화랑을 운영하며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운동도 좋아했지만, 미술시간이 더 재미있었죠. 친구들보다 내가 좀 더 잘 그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현대자동차에서 3년 여 근무했다. "제 성격이 남 밑에서 일하는 것과는 안 맞았어요. 그래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회사를 그만두고 부산 국제시장에서 꽃 도매 사업을 시작했어요. 꽃 배달하고, 아는 분이 전시회 하면 가보고 하다가 어느새 꽃꽂이를 배웠지요. 배달 갔다가 꽃꽂이를 해주기도 했어요. 수로꽃꽂이회, 화수꽃꽂이회 등에서 전문가로 같이 활동하자는 권유도 받았습니다. 큰딸이 결혼했을 때 부케도 내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강서구청에서 조경사로 일하기도 했어요."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꽃 도매 사업을 한 그는 꽃 농사도 직접 지었고, 중고차매장, 제과점, 식당도 운영했다. "생각해보니 제가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살았네요. 식당 운영할 때는 요리도 직접 했고, 부산 장전동에서 제과점 할 때는 5단 웨딩케익도 직접 만들었어요. 손재주가 좀 있었죠. 남들이 뭘 만들 때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 박공예로 만든 스탠드를 설명하는 이대희 씨.

그랬던 그가 낙화를 만난 건 40대 초반이었다. (이대희는 '인두화'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문화재청에서 정한 '낙화'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양산에서 식당을 운영할 때였어요. 친구들과 함께 떠난 관광지의 상가에서 낙화 그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인두가 지나갈 때마다 나무 위에 그림이 그려지고, 글씨가 써지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더군요. 집에 돌아와서도 그 장면이 잊혀지질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낙화를 직접 그려보기로 했다. 덜컥 인두와 MDF(합판목재)를 사서 낙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만 겨우 그어지더군요. 인두를 두드려가며 굵기도 조절해보고, 혼자서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요. 인두에 전해지는 열전도율을 가늠하며 선을 엷고 두껍게 그어보고, 명암조절도 해보고…. 결국 혼자서 기법을 터득했습니다." 그는 식당 일을 하는 틈틈이 인두와 나무판을 붙잡았고, 식당 문을 닫고 나면 밤새도록 낙화를 그렸다. 나무도 직접 구하러 다녔다. 그는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처음에는 마음먹은 대로 명암조절을 하며 대상을 표현하기가 힘들었어요. 특히 소나무를 그리는 게 가장 힘들었죠. 솔잎 하나하나를 다 그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인두는 금방 뜨거워지는데,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지요. 하지만, 소나무는 힘든 만큼 재미있었습니다. 완성된 뒤에는 내가 생각해도 멋졌거든요." 그는 완성한 낙화그림들을 친구들과 가족, 친지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줬다. 그의 낙화는 그렇게 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알려졌고, 그 주변으로 점차 퍼져나갔다.

"낙화를 그린 나무판의 테두리가 없이 그림만 보면 진짜 소나무 같다는 말도 들었지요. 친구들은 재주 썩히지 말고 소품을 많이 만들어 돈을 벌라는 이야기들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저한테 가장 많은 도움이 된 사람은 아내입니다. 미대 출신인 아내는 옆에서 조언도 하고 평가도 해주었습니다. 내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반자이지요." 그가 슬쩍 아내에게 공을 넘기며 웃었다.

그의 낙화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전시회를 열자는 요청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강서구청에서 전시회를 두 번 열었다. 문화강좌 요청도 들어왔지만, 바빠서 틈을 내지 못했다.

10여 년 전에 그는 지인이 제공한 생림면의 작은 집에서 2년 정도 낙화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낙화작업을 눈여겨 본 사람이 바로 김해공예협회 장용호 회장이다. 장 회장은 "이 선생의 낙화작업이 인상적이었다. 관광지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대로 작품을 하는 분을 만난 기쁨이 컸다"고 당시의 만남을 떠올렸다. 장 회장은 "낙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법 전수를 하고, 공예협회에 가입해 활동도 하고, 전시회도 열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대희는 장 회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곧 김해공예협회에 가입할 예정이다.

"현재 마당에서 건조 중인 송판은 앞으로 한 달여를 더 말려야 합니다. 낙화는 최소한 2년여 자연 건조된 송판으로 작업을 해야 합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저 송판도 다 건조되겠지요. 지금 머릿속으로 한창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전시회도 대비해야지요."

▲ 낙화를 그리는 도구와 송판, 작품으로 가득한 작업실에서 이대희 씨가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낙화를 그리고 나면 자신의 호인 '초심(初心)'을 서각으로 새겨 넣는다. "생림에서 작업할 때 친구들이 낙화를 사러왔다가 '호를 새겨 달라'고 하더군요. 당시만 해도 저는 호가 없었어요. 친구들이 '이 좋은 작품에 호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자기들끼리 의논해 저를 '초심'이라 부르더군요. '흔한 이름이지만 처음의 그 마음가짐을 잃지 말라'며 친구들이 붙여준, 고마운 호입니다. 그래서 낙화를 그리고 나면 정성을 다해 '초심' 두 글자를 새기고, 붉은 물감을 입혀 작품을 완성합니다."

아직 작업실 이름이 없다 길래 기자가 '초심공방'이라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좋은 이름이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어디 좋은 나무 없나?"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대작을 그릴 꿈을 꾸고 있다. "대작을 꼭 하나 완성하고 싶습니다. 나무가 문제이지요. 큰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큰 나무판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 나무가 구해지면 커다란 소나무를 낙화로 그려 대작을 만들고 싶습니다."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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