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이자 놀이터였던 낙동강 풍경이…

이맘때면 아련한 그 시절 그 추억 또렷
여든 앞둔 나이에도 늘 그리운 모습들

1945년 봄, 아버지는 느닷없이 부산 동래에서 여섯 남매를 대리고 외갓집이 있는 김해군 명지면 순아도 3구로 이사를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낯선 시골 생활이 즐겁기만 했다. 광복이 되자, 나는 김해명지국민학교에 입학해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동네 형, 누나, 친구들이랑 함께 모여 긴 자갈밭 찻길을 따라 집에서 3㎞나 떨어진 학교까지 걸어서 갔다. 집에 올 때도 몇 명씩 모여 놀면서 걸어왔다.

▲ 강일웅 사진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옛 김해의 추석 풍경 사진. 그 시절 추석 때면 추석상 차리느라 고생했던 마을 아낙네들이 들판에 모여 북, 장구, 꽹과리로 신명나는 농악 한마당을 펼치며 시집살이의 노고를 풀고는 했다. 한켠에서 동생을 등에 업은 어린 여자아이도 신이 난 듯하다. 강일웅 (76·서울·사진작가)

길가에는 전봇대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전봇대마다 사기 단자가 20~30개 씩 있고, 전선이 연결돼 있었다. 철부지였던 우리는 돌로 사기 단자를 맞춰 깨뜨리는 놀이를 하곤 했다. 깨어진 사기 안에는 노란 유황이 녹아 붙어 있었다.

겨울에는 길 옆의 수로가 얼어붙어 있으면 얼음을 타며 학교로 갔다. 용의검사가 있는 날에는 얼음을 깨어 얼어터진 손을 돌로 문지른 뒤 교문 앞에서 트실트실한 붉은 손등을 선생님에게 보여드려 통과하기도 했다.

강물을 그냥 마셨던 낙동강에는 재첩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꼬시락(망둥어), 준치, 꽁치, 붕어, 잉어, 가물치, 찡기미(민물새우), 뱀장어, 참게 등 물고기도 한두 종류가 아니었다. 틈만 나면 낚시를 하고, 밤에는 누나들과 들살로 찡기미를 잡아 반찬을 했다. 뽀얀 재첩국은 떨어질 날이 없었다.

여름에 둑 너머 바다 모래밭에서 물이 빠지는 날에는 게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모래알을 물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게를 잡겠다며 눈 딱 감고 힘껏 달리기도 했지만, 언제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겨울에 강이 얼어붙으면 직접 만든 썰매를 타며 놀았다. 녹산 수문 뒷산으로 칡을 캐러 가던 기억도 새롭다. 낙동강과 바다를 넘나드는 고니, 오리를 사냥하던 미군들을 따라 다니며 탄피를 줍기도 했다. 탄피를 갖고 마치 구슬치기 하듯 놀았다. 고니가 총에 맞아 물에 빠지면, 상급생 형들이 찬 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건져온 뒤 미군들로부터 껌이나 과자를 받은 뒤 건네주던 일도 생각난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산 성남국민학교로 전학하면서 김해를 떠났다. 이제 나이 여든을 앞두고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아~ 영원한 나의 고향 김해. 올해 추석에는 다시 한 번 가볼 수 있으려나.

▲ 이명식 (65·구산동·김해오광대 단장)
돼지 잡던 날 오줌보 공으로 축구 즐겼죠

명절 쇠러 온 일가친척 죄다 모여 어울려
보름달 아래 숨바꼭질·동네씨름 등 새록

김해군 덕도면 상덕리 상덕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구산동에서 살고 있다. 어린 시절 추석을 떠올리면 돼지 오줌보를 얻어다 짚으로 감아 축구하던 기억부터 난다. 동네 사람들이 명절에 쓸 고기를 장만하느라 돼지를 잡으면 오줌보는 동네 개구쟁이들 차지였다.

추석에는 평소보다 재미난 놀이를 더 많이 했다. 동네 친구들, 객지에서 명절 지내러 고향에 돌아온 친구들, 집집마다 명절 쇠러 온 일가친척의 아이들까지 죄다 나와서 함께 어울려 놀았다.

자치기, 깡통차기, 제기차기를 하며 놀았다.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은 집안의 명절준비에 방해되지 않도록 밖에서 노는 게 일이었다. 

추석날 밤에 크고 환한 보름달이 떠오르면 숨바꼭질을 했다. 예전에는 숨을 곳이 많았다. 장독대 뒤, 헛간, 담벼락 그늘 밑, 다락, 짚가리, 집안과 온 동네 전체가 숨바꼭질 무대였다. 밤이라 숨기 좋고, 달빛이라 찾기 쉽고…. 그만 놀고 들어가라는 걱정을 들을 때까지 놀곤 했다.

한여름 내내 땀 흘려 일한 동네 머슴들은 풍물패와 함께 어울려 풍물을 치곤 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악기가 드물어서 깡통이나 냄비 뚜껑을 들고 나와 풍물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네 조무래기들도 깡통을 두드리며 풍물패를 따라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온 동네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놀았던 기억도 많다. 남자·여자별로 씨름도 했다. 샅바 같은 것이 없어도 재미 있었다. 씨름이 끝나면 동네 사람들끼리 빙 둘러앉아 수건놀이도 하고, 달이 뜨면 강강술래도 했다.

마을회관에서 동네 노래자랑대회를 여는 마을도 있었다. 그러면 집집마다 조금씩 음식을 내오곤 했다. 김해문화원에서 풍물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들은 자기 마을로 돌아가 풍물을 치고 여흥을 주도하며 인기스타가 되곤 했다.

▲ 허한주 (83·서상동·서예가)
추수한 곡식 공출당해 서러웠던 기억이

짚가리에 숨겨둔 나락으로 추석 지내
광복 되고나서야 명절답게 풍성해져

옛 김해읍 외동 701번지에서 태어나 지금도 외동에서 살고 있다. 외동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이 추수한 곡식을 모두 공출해가는 바람에 명절에도 힘들었다. 농사를 크게 지었던 우리 집은 나락을 짚가리 밑에 숨겨 뒀다가 추석 준비를 했다. 광복이 되고 나서야 추석이 조금 풍성해졌다.

어머니는 추석이 되기 보름 전쯤부터 명절 준비를 했다. 제주로 쓸 술부터 빚었다. 어머니가 술밥을 쪄서 맷방석 위에서 말리면 몰래 조금씩 집어먹었다. "제주로 쓸 건데 어디에 손을 대냐"는 야단도 많이 들었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추석 때 입을 한복을 모두 손수 지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누에를 먹여 평소에도 옷감을 직접 짰다. 누에에서 실 뽑는 날은 번데기 얻어먹을 생각에 가마솥 앞에 앉아 불도 땠다. 어머니가 실을 뽑아낸 번데기를 조리로 건져줬는데, 얼마나 고소하고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동네 아이들도 번데기를 먹겠다고 우리 집으로 모여들곤 했다.

추석 전날에는 집에서 일하던 머슴 둘이 큰 나무판을 놓고 떡을 쳤다. 떡이 완성되면 어머니가 칼로 적당한 크기로 끊었다. 나는 어머니 앞에 바싹 붙어 앉았다. 떡 끊을 때 나오는 '동가리'를 먹고 싶어서였다. 동가리 떡을 한주먹 손에 쥐고 대문 밖으로 나서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친구들한테 자랑하러 나섰다가 모두 뺏기고, 정작 나는 한 조각 정도밖에 못 먹곤 했다.

제물을 사러 장에 가는 것은 아버지 몫이었다. 그 당시는 시장에 가서 제물을 사오는 게 여자들이 아니라 집안의 가장들이 하는 일이었다.

추수를 할 때까지 힘들게 일했던 머슴들은 추석부터 일주일 가량은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 집집마다 쌀과 술을 조금씩 내주어 머슴들이 모여 음식도 해먹고 풍물도 치곤했다.

추석 명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묘와 벌초이다. 추석 전에 조상들의 묘를 벌초하고, 추석 당일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을 찾아뵙고, 행복한 추석을 보내기 바란다.

▲ 안복희 (52·율하1로·보험설계사)
소나무 사이로 뜨던 보름달은 여전하려나

경북 점촌 댓골 감싸던 밥짓는 저녁 연기
할매도 벌겋던 아궁이도 아련한 추억으로

내 고향은 경상북도 점촌 하고도 댓골이다. 시내에 있는 학교까지는 4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하루 수업을 다 마치고 집으로 갈 때면 어찌 그리 멀던지…. 이제 거의 다 왔다 싶으면 긴 다리가 나왔다. 마지막 관문처럼.

마을에 들어서면 무심히도 고즈넉했다. 소죽 끓이고 밥 짓는 저녁 연기는 평화롭게 마을 위를 떠다녔다. 매캐하면서도 구수한 그 냄새는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차창 사이로 스치듯 그 냄새가 들어오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핑 돈다.

"철아~, 밥 먹어라~." 쩌렁한 뒷집 할매의 외침은 메아리를 남겼다. 그러면 어김없이 초췌하게 긴 작대기 하나와 딱지뭉치를 부여잡은 '아재'(나이 상관 없는 촌수를 말한다)가 나타났다. 소박한 밥상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항상 뒷집보다 저녁이 늦었다. 엄마는 활활 타오르는 벌건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로 바쁘게 나무를 거둬 넣었다. 연탄불 위에서는 된장찌개가 보글거렸다. 엄마는 거들 손이 왔다며 속도를 내고, 이어지는 자그락 자그락 숟가락 놓는 소리.

밤이면 귀뚜라미 소리가 커지고, 논의 벼들은 서걱서걱 서로 잎사귀들을 부벼댔다. 앞산 소나무 사이에는 큰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이제는 메아리를 만들던 할매도 안계시고 벌건 아궁이도 없으며, 딱지뭉치 아재는 대머리 아저씨가 됐다. 그러나 벼들의 서걱임과 소나무 사이의 보름달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나는 매케한 연기를 고대하며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설 것이다.

▲ 손인애 (25·서울·은행원)
가족·친구·추억들 … 곧 만나러 갈게요

늘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고향 김해
오랜 타지 생활 속에서 소중함이 새삼

오전 5시 30분. 행여 깨지 못할까봐 몇 개나 맞춰놓은 알람을 겨우 끄며 잠에서 깼다. 이른 시간 힘겹게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은 채 컴퓨터부터 켰다. 오전 6시부터 시작될 추석 기차표 예매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느라니 6시를 향해 가는 시계바늘과 함께 심장도 두근거렸다. '이번엔 기필코 성공해 기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리라'라는 굳센 다짐과 함께….

하지만 6시를 넘기자마자 컴퓨터 화면에는 '매진'이라는 단어가 눈앞에 들어왔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풀 죽은 모습으로 이른 출근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7년 전 상경했을 당시에는 굳이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고향에 내려가지 않곤 했다. 돌이켜보면 고향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색할 정도로 김해를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가족, 친구, 추억들이 모두 넘실대는 그곳을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또 그렇게 이름 붙이기 낯설 만큼 여전히 고향에 익숙했다.

김해를 떠나 오로지 생업과 꿈을 위해 살고 있는 서울로 옮겨온 지 7년이 흘렀다. 앞만 보고 달리는 동안 서서히 김해는 내게 고향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을 품은 고향 김해. 늘 가까이 있기에 알지 못했던 소중함을 테두리 밖에서야 느낀다. 항상 그 속에 있었더라면 알 수 없었을 위로와 따뜻함이 참 좋다.

7년 간의 타지 생활 탓에 경쟁과 피로에 지쳐 있지만, 나에겐 이렇게 고향이라고 소리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곳이 있다. 가는 길은 비록 이토록 치열하지만…. 이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가려는 곳으로 나도 곧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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