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들고 나서면 가슴이 설레죠. 꼭 소풍을 가는 어린아이처럼 흥분됩니다. 사진은 나의 인생입니다." 사진작가 이성근(69)은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하나가 된다. 강원도 태백산 정상 장군봉의 높이는
1천567m. 그는 장군봉에서 마치 하나의 바위가 된 것처럼 원하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질 때까지 기다린다. 해가 질 때까지, 달이 떠오를 때까지, 별이 뜰 때까지, 달과 별이 스러질 때까지, 그리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그런 그의 옆으로 멧돼지가 무심히 지나간 적도 있다. 이성근은 자연의 일부가 된 듯 자연을 찍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서야 얼굴을 찍는다. 그의 작업 공간 '해동사진예술원'을 찾았다.

▲ 사진필름은 습기에 약해 잘 보관 관리해야 한다. 이성근 사진작가가 금고에 보관 중인 필름을 꺼내 살펴보고 있다.
비싼 장비로 마구 찍어대는 건
진정한 의미의 사진이랄 수 없어
진지하게 생각하고 구도 잡아야

30년 세월 수로왕릉 사진 기록
김해의 산 증인이라고도 불려
한국의 담장 담고 싶은 게 꿈

좋은 사진은 피사체와 대화해야

수로왕릉 담장을 따라 걸어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타난다. 공원슈퍼 위쪽으로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구지로 124번길 21-26에 해동사진예술원이 있다. 벽에 걸려 있거나, 몇 개씩 포개진 채 서 있는 그의 사진작품 40여 점이 먼저 눈에 뜨인다. 풍경 사진에서부터 인물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책상 위에는 사진과 카메라에 대한 책, 각종 공모전 자료집 등이 빼곡하게 채워진 책꽂이가 놓여있다. 필름의 상태를 살펴보는 확대기, 흑백필름 작업을 할 때 사용한 필름 거는 줄과 집게도 보였다. 무심코 취재수첩을 펼치고 앉은 테이블은 알고 보니 라이트박스였다.

이성근은 부산 사하구 신평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갔고, 그 후에는 전국 여러 지역으로 이사를 다녔다. 그가 사진을 처음 접한 건 20대 초반 대구에서 살 때였다.

"먼 친척 형님의 사진관에서 필름을 현상, 수세, 인화하는 일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재미로 일을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사진에 완전히 빠져들었지요. 그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카메라도 흑백필름도 비쌌어요. 또 귀하기도 했지요. 형님 카메라를 빌려서 사진을 찍었지요."

이성근은 20대 때부터 사진술과 사진역사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고,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그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 스승은 해강 김규진(1868~1933)이다. 해강은 한국의 근대 서화가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가였다. 1907년 서울 소공동에서 최초의 사진관 '천연당'을 열었으며, 고종의 어진을 찍었던 인물이다. "우리나라 사진역사의 초석을 놓았고 사진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해강 선생을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좀 특별한 사진을 찍은 경험이 있다. "30대 때 6년여 동안 중동, 동남아 등 해외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외국에 나가 있던 국내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죠. 공사의 처음부터 마지막 완공까지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현장의 일을 사진으로 찍어 정기적으로 본사에 보고하는 중요한 일이었지요."

이성근이 김해에 온 것은 30여 년 전이다. 카메라를 들고 김해읍내를 다니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해의 풍경과 자연, 그리고 사람들을 찍어왔다. 특히 수로왕릉 사진을 많이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로왕릉의 옛 모습, 숭선전 춘·추향대제 장면, 역대 숭선전 참봉들, 고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이 숭선전을 방문했을 때 모습, 인도 아유타에서 온 사람들이 숭선전 대제에 참가한 모습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었지요."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왕릉 30년 기록사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찍은 엄청난 분량의 사진들이고, 또 엄청나게 중요한 사진들이다. 그래서 그를 '김해의 산 증인'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중요한 사진필름들은 모두 금고에 보관 중입니다. 필름들은 저의 보물이지요."

그러고 보니 해동사진예술원 안에는 금고가 4개나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열어보였다. 금고는 필름을 넣은 봉투로 꽉 차 있었다. 얼마나 될까. "다 헤아려 보질 못했어요, 그저 엄청나게 많다고 할밖에…. 필름은 습기에 약해요.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일반 캐비닛에 넣어두면 안됩니다. 이렇게 튼튼한 금고에 넣어 보관해야 합니다."

말끝에 그는 "김해시가 김해의 옛 기록사진을 잘 보관해야 한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몇 년 전 김해시가 '김해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사진전을 열었을 때 제가 선정위원을 맡았어요. 그때 보니 시의 필름 보관 상태가 엉망이더군요. 관공서야말로 중요한 사진필름들을 잘 보관해야 합니다. 사진은 중요한 기록이거든요." 디지털로 사진을 찍는 요즘, 그는 촬영을 다녀오면 곧바로 주제별로 파일을 분류해 저장을 해둔다.

▲ "고가의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찍어야 합니다." 이성근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는 마음 자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얼음이 종유석처럼 얼고 있는 동굴을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는 비밀이라고 했다. "어딘지 알려지면 훼손되는 건 순식간이죠. 저만이 알고 있는 장소가 전국적으로 몇 군데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예요."

길을 잘 알다보니 함께 촬영을 다니는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그는 '인간 네비게이션'으로 불린다. "촬영 다닐 때만 운전을 해요. 네비게이션은 필요없어요. 운전하고 가다가 도로가 넓어졌구나, 새 도로가 생겼구나 하는 걸 알 정도이지요."

전국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 그가 가장 즐겨 찾는 곳은 강원도이다. "강원도에 자주 가는 까닭은 우리나라에서 자연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기 때문이에요. 김해도 그렇고, 전국적으로 난개발 때문에 자연이 너무 많이 훼손되어 버렸어요. 이건 '개발'이 아니에요." 그는 자연 훼손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면서 안타까워했다. "김해의 평야, 내동의 논밭, 4대강 사업 때문에 옛 모습을 잃어버린 곳, 김해에서 사라져간 풍경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그 옛 모습들은 이젠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거지요. 그나마 아직 남아있는 곳들은 사진으로라도 남겨야겠지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쓸쓸해졌다.

이성근은 사진집 한 권을 펼쳐 보여주었다. 몇 년 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국의 사진작가 100명이 모여 '자연의 신비 100인 백 경(百景)' 전을 열었는데, 그걸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그도 사진가 100명 중 한 사람으로 전시회에 참여했다. 전국 곳곳의 자연비경을 찍은 사진을 전시했던 전시회는 당시에도 큰 화젯거리였다.

그는 꼭 찍고 싶은 사진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담장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찍고 싶어요. 그런데 주제가 방대하고, 촬영지역 또한 광대하지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 힘들지만, 언젠가는 꼭 완결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런 작업은 국가나 지자체에서 후원을 해야 하는데…."

대체 어떤 작업인지 궁금했다. "담장은 단순한 담이 아닙니다. 궁궐의 담, 사대부가의 담, 서민가옥의 담, 절과 서원들의 담은 그 형태가 모두 달라요. 지역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섬에 들어가 담장을 촬영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흔히 담이 집의 처마보다 조금 낮고, 그 담의 가운데에 대문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죠. 하지만 섬의 담장은 그렇지 않더군요. 집이 보이지 않도록 담을 높이 쌓고, 담의 한쪽 측면에 보일락말락 대문을 내더군요. 육지에서 살지 못하고 섬으로 도망쳐 간 사람들의 집이었어요. 멀리서 보면 집이 보이지 않도록, 그냥 돌담처럼 보이도록 그렇게 만든 거지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삶이 담긴 담장인 거지요. 자연을 담에 이용한 경우도 많아요. 싸리 담, 아카시아 담, 탱자나무 담도 있어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주제가 방대하고 촬영지역이 광대하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지역, 기후, 풍습 그리고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따라 한국의 담장이 얼마나 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을지 감히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작업이 완성된다면 굉장한 가치가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정말 어디서 후원자 한 명 안 나타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성근은 사진의 매력을 "순간을 포착해 영원히 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가는 사냥꾼과도 같고, 수 십 년 세월이 지나도 할수록 더 어려운 것이 사진이라고 했다. 그는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진이 너무 흔해졌고, 사진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사진을 찍으려 할 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장비에만 돈을 들이고 정작 사진은 가볍게 마구 찍는 거지요. 찍고 나면 불필요한 부분 잘라내고 보정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사진이 아니에요. 나중에 자르고 보정하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도를 잘 잡고 풀샷으로 찍어 그대로 현상하는 것이 사진입니다. 고가의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찍어야 합니다. 신중하게 잘 찍은 사진은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 신문도 그렇지 않나요? 1면 사진 하나가 신문 전체를 대변하잖아요!"

이성근은 "사진은 어떤 장면을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풍경사진을 찍고 싶다면 자연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풍경을 찍어야 합니다. 좋은 인물사진을 찍고 싶다면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지요. 시골장터에서 할머니를 찍고 싶다고요. 그럼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세요. 할머니가 좋은 표정을 지으시는 순간, 그때 셔터를 누르세요." 

≫ 이성근
해동사진예술원 대표. 한국사진작가협회 김해지부 부지부장. 김해해동사진동우회 고문, 1997년 김해전국사진공모전 은상, 2004년 남원전국사진공모전 금상 등 전국사진공모전 입상 100여 차례.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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