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용 수필가·김해가야스토리텔링협회장
김해오광대가 그동안의 지속적 활동을 인정받아 경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예정이라고 한다.
 
소식을 접한 지역예술인들을 비롯한 김해시민들은 큰 경사로 여기고 반기면서 앞으로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야문화권 중심에 있는 김해이면서도 무형문화재 하나 없다가 이번에 처음 생기게 된 일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광대놀음은 낙동강 상류지역에서 발생하여 낙동강의 흐름과 함께 남하했고, 각 고을마다 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7년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공연을 중지당했다. 김해오광대는 1984년 고 류필현 전 김해문화원장의 주도로 복원되어 김해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고, 30여 년간 줄기차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김해오광대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고증 자료와 연구 성과가 풍부하다. 식민지 시기의 탈이 그대로 보존돼 있고, 과거 연희자들로부터 채록한 대본도 보존돼 있다. 더욱이 과거의 연희자들로부터 전수받은 연희자들이 30여 년 동안 계속 연희를 이어왔다. 이는 연희자로서뿐만 아니라 민속예술가로서의 뜨거운 열정이라 할 수 있다.

김해오광대의 형식미와 표현미는 민속예술의 우수성을 잘 나타낸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지역 전통문화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김해오광대는 단원들이 대규모 춤·음악 연희를 통해 탄탄한 극적 구성을 일궈내는 독보적 공연이다. 옛것을 익히고 그 토대에서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예술인 자세에 부합한다고 여겨진다.

김해오광대의 경남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부산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오광대 발상지는 가락이다. 발상지인 가락오광대가 지정을 받는 게 타당하다'는 게 주장의 요지라고 한다.

가락은 김해 중심지에서 4㎞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고 생활권도 김해이다. 가락 지역은 1989년 행정개편 때문에 부산 강서구로 편입됐다. 가락이 부산으로 편입되기 전에 김해문화원에서는 류 원장 주도로 오광대를 복원 재연했다. 이후 30여 년이란 세월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가락이란 용어는 가야가 가락국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김해에서 태어나 평생을 김해에서 살고 있는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주소도 '가락로'이다. 그야말로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가락은 가야국과 같은 명칭으로, 우리의 뿌리로 각인되어 있다.

김해오광대의 경남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가락오광대가 화기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지만, 공자의 <논어> '자로' 편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표현이 있다. 군자처럼, 생각은 각기 다르되 하나같이 어울리고 마치 서로 다른 악기라도 아름다운 화음으로 어우러지는 심포니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김해시민들은 물론이고 지금은 부산이 되어버린 가락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가락국의 후예들이다. '구지가'가 전해지는 한반도 최초의 예술 시원지 구지봉이 성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예술인의 자존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2천 년 전 가야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중국 상인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에 와서 보고 기록한 <동이전(東夷傳)>에는 '이 땅의 사람들이 좁은 길을 서로 비켜주는 관용과 배려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우리는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김해오광대와 가락오광대는 같은 뿌리라는 인식을 갖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으로 서로 돕고 상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상생과 배려는 가야인의 정신이며 오광대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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