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조각은 금속제 그릇이나 물건의 표면에 무늬를 새겨 장식하는 일이다. 금속조각 기능을 가진 사람을 조각장(彫刻匠) 또는 조이장(彫伊匠)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에서 금속조각이 처음 발견됐다. 금속조각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전통을 지닌 의장기술이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금속조각 기술자를 은장(銀匠)·조각장이라는 이름으로 관에 예속시켜 관수품을 제조하게 하는 한편 기술을 전수하게 했다. 조각장은 1970년 7월 22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봉황동에서 금속조각을 하고 있는 조각장 조문기(46) 씨의 '문지공방'을 찾아가 보았다.

고교 졸업 후 세공학원서 금속조각의 길
무형문화재 35호 김철주 조각장에 배워
부산 범천동 '문지공방' 열고 본격 시작

4년쯤 전에 봉황동으로 작업 공간 옮겨
작년 고배 중요무형문화재 재도전 열정

문지공방은 봉황동 백조아파트 상가에 있다. 공방에 들어서면 동판에 그림을 그리고 은선으로 상감을 한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불교적 세계관을 표현한 작품들, 매화와 달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문을 하나 더 들어서면 조문기의 작업실이다. 많은 도구가 걸린 작업대에는 조명등이 하나 더 설치돼 있다. 안쪽에는 은, 구리 등을 녹이는 작업을 하는 공간이 또 있다.

조문기는 1969년 함안군 대산면 대사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대산초등학교와 대산중학교룰 다녔다. "어릴 때부터 낫이나 톱으로 놀잇감을 만들며 자랐어요. 자치기를 할 때 옆 동네 아이들과 경기를 했는데, 우리 동네 자치기감은 제가 도맡아 만들다시피 했어요. 야구방망이도 직접 만들었죠. 소를 몰고 뒷산에 올라가면 소는 소들끼리 풀을 뜯어먹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솔방울로 야구를 했어요. 연을 처음 만들었을 때도 잘 뜨더라구요. 얼레도 만들고, 썰매도 만들고….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들기부터 해야 했어요."

만들기를 좋아했던 어릴 적 그의 손은 늘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 어린 소년이 낫을 들고 앉아 나무를 다듬는 장면이 떠올랐다. "외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이면, 짚 소쿠리를 몇 개씩 만들어놓고 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출가한 딸을 위해 집에서 소용되는 물건을 뚝딱 만들어주고 가신 외할아버지의 손재주가 혹시 손자에게 이어진 것은 아닐까. 

"초등학교 3학년 때 뇌막염에 걸려 죽을 뻔 했어요. 척추측만증도 앓았고요. 학교를 한 해 쉬고 다시 다녔어요. 집에서 학교까지 10리 거리였습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 길을 걸어다니면서 다리에 다시 힘이 생겼습니다." 어릴 적의 병으로 몸이 조금 불편하지만, 20대 후반에는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다.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자전거로 전국일주도 했다. "마라톤도 했어요. 제 발자국 소리, 옆이나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좋았어요. 탁, 탁, 탁, 그 규칙적인 소리가." 혼자서 마라톤 결승점까지 탁, 탁 발소리를 들으며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혼자서 작업을 해내는 그의 조각장 인생과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은상감기법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조문기 씨(위 사진)와 수많은 도구가 걸려 있는 작업대.
마산 용마고등학교를 졸업한 조문기는 교사의 소개로 경남장애인협회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게 좀 맞지 않았다. 친척 어르신 소개로 다시 고려세공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강사의 도움으로 링 반지를 처음으로 완성하던 날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한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지요. 그 후로는 그 때의 기분을 다시 맛보지 못했을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금속조각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던 운명 같은 일이었지요." 그는 학원에 1년 정도 다니면서 감정까지 모두 배웠다.

이후 취직을 해야 하는데, 소개받은 곳마다 단순한 업무를 하는 곳이었다. 기술을 더 배울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순금공장 등 몇 곳을 다니다가 고향집으로 돌아와 15일 정도 쉬었다. 그러다 순금공장 시절 만난 형의 소개로 부산 범천동의 범한골드에 입사했다. 범한골드는 부산을 대표하는 범천동 귀금속상가에서도 큰 규모로 알려진 회사였다. 직원 60여 명이 일하는 큰 회사였다. 직원 중에 안희봉이란 사람이 있었다. 장신구에 장식그림을 조각하는 이였다. 아이디어를 상품 개발로 연결시켜내는 디자인의 대가였고,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 분의 작업과정을 보면 '혼을 불어넣어 작업하고 있구나' 하는 게 느껴졌지요. '나도 조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해준 분입니다. 저는 조각부에서 근무했는데, 제 일이 끝나면 다른 부에 가서 어떤 작업을 하는지를 보고 배우며 일도 도와주었어요. 그렇게 전 과정을 익혔지요. 외환위기 이후 직원 감축이 이루어지면서 개인 업무량이 점점 늘어갔어요. 1년쯤 더 근무를 하다가 퇴사를 하고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조문기는 중국 배낭여행을 '그냥, 무조건' 떠난 것이라고 했다. "25일 일정으로 광둥, 시안, 구이린, 창샤, 베이징, 퉁다오, 백두산까지 다녔어요. 위험한 일도 몇 번 있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보고 나서인지, 다녀오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에서 돌아온 후 석 달이 지나서 그는 범한골드 시절의 동료가 서울에서 운영하는 공장으로 갔다. 조각도 해주고, 일도 돕던 어느 날 그는 신문을 통해 무형문화재 35호 조각장이어던 김철주 선생을 알게 됐다. 김철주는 조선 후기 최고의 조각장이었던 고 백하(白下) 김정섭 선생의 아들이다. 김정섭 선생은 이왕직 미술품제작소에서 금속조각을 배웠고 1970년 제35호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철주 조각장은 어려서부터 부친의 어깨 너머로 조각을 배우다가 부친에 이어 1989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서울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으로 찾아가 김철주 선생을 뵙고 금속조각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동판에 선 긋기 등 과제를 내주시면 열심히 해 가고, 다시 과제를 받고 그러면서 하나씩 배웠습니다. 금속조각의 이론과 다양한 기법을 알았고, 큰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도 보았지요. 나도 저런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조문기는 1999년 부산 범천동에서 문지공방을 열었다. '문지'는 그의 이름 '문기'의 중국식 발음이다. 문지공방을 열면서 그는 조각장으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전통 장신구 노리개들을 취급하는 매장을 운영하는 주정하라는 여자 분이 찾아왔어요. 그가 꾸준히 제품을 주문한 덕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됐고, 주문하는 물건들을 계속 만들면서 실력도 늘어났습니다. 고마운 분이었죠."

▲ "저는 기물에 조각하는 것보다 평면작품이 더 좋아요." 조문기 씨가 '문지공방'에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위 작품은 은상감기법으로 제작한 '만물지왕용'. 조선시대 왕의 용상에 그려진 용문양을 표현했다.
2001년 부산시청 전시실에서 '장도장전시회'가 열렸다. '장도장'은 장도를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그는 이 전시회에서 전남 광양에서 은장도 작업을 하는 박종군 선생을 만났다. "보름 후쯤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광양으로 찾아갔더니 장도를 5자루 주면서 조각을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완성해서 택배로 보내드렸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돼서 그 이후로도 같이 작업을 했어요."

2009년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금속 복원과정을 수료하면서 그는 다양한 전통분야 장인들을 만났다. 장도장, 입사장, 연죽장, 유기장, 금박장, 조각장 등 전통공예인들이었다. 그들 중 박종군 장도장, 한상봉 낙죽장도장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60호로 전통 장도장을 이어가고 있다.

조문기 역시 2013년 중요무형문화재 5차까지 심사를 받았으나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실기 심사를 받았어요. 문화재 지정은 못 받았지만 심사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작업은 단순히 다른 장인들과의 경쟁을 넘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지요. 그 이후로 다시 더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소품 위주의 작업에서 벗어나 큰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문지공방이 봉황동으로 옮겨 온 것은 4년 전 즈음이다. 그는 구산동의 집에서 오전 9시에 공방으로 출근해서 늦은 밤 10시까지 작업을 하고 있다. 많은 도구가 걸려있는 작업대 앞에서 그가 잠시 작업과정을 보여주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동판을 고정시킨 후 조각정을 그림 선 위에 놓고 망치로 두드려 가며 선을 밀고 당기거나 파내면서 조각했다. 그 선 위에 은선을 놓고 다질정으로 누르며 망치로 때려 박았다. 은상감이었다. "손 높이, 조각정의 각, 망치질의 강도가 중요합니다. 오랜 숙련과정을 통해 감각을 익혀야지요." 은상감이 끝나면 사포로 면을 매끈하게 고르고 수세미로 표면의 얼룩을 없앤다. 톱밥과 약품으로 처리하는 착색 과정은 물의 온도, 약품 농도, 처리 시간에 따라 다른 느낌의 색으로 착색된다.

"기물에 조각을 하면 입체감이 있어 좋지만, 저는 평면작품이 좋아요. 불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거나, 자연에서 소재를 가져온 작품을 만들고 있지요. 요즘은 올해 전승공예대전에 내야 할 작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잔잔하게 이어지던 그의 말이 뚝 끊어졌다. 사진촬영을 위해 작업 과정을 보여주던 그가 어느새 정말 작업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문지공방은 조각정을 때리는 망치 소리로 가득 찼다. 

≫조문기/전승공예대전 장려상·입선 3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지식경제부 장관상·장려상·특선·입선, 전주 전통공예대전 은상·동상·장려상, 성남모란민속공모전 동상, 경남공예품경진대회 금상·은상·동상·장려상·입선, 김해공예대전 은상, 김해관광기념품대전 은상 등 각 대회 수상 100여 회. 한국전통공예산업진흥협회 경남·부산지회 간사 역임. 청와대사랑채시연작가(전통공예금속공예/2010~2012). 새하얀미술대전 초대작가. 현대미술대전·성산미술대전·김해미술대전 추천작가.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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