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초등학생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50대 남성을 불과 4시간 전에 교육받은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는 흐뭇한 기사를 보았다. 따뜻한 봄날 모처럼 훈훈한 소식을 접하고 '50대 남성은 아마 평생 생명의 은인으로 그 초등학생을 기억할 것'이라 생각하다 필자가 오래전에 경험했던 한 교장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필자가 신경과 수련의 2년차일 때 봄 즈음의 일이다. 수련의 과정 때는 두 발 뻗고 편히 잠자는 것은 기대하기도 어렵다. 밀려오는 환자를 돌보고, 수련의를 담당했던 과장의 여러가지 지시를 해결하느라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4년이라는 수련의 생활을 어떻게 넘겼는지 쓴웃음만 나온다.

더군다나 필자를 지도하던 과장은 당시에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어서 정말 혹독한 수련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잘못을 지적하면서 환자와 보호자 앞에서 무안을 주는 바람에 초창기에는 환자·보호자들로부터 "저 의사(필자)에게 진료를 못 받겠으니 주치의를 바꿔달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환자들이 '수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례적인 일이구나'라고 이해를 하고는 오히려 필자가 안돼 보였는지 회진 시간 때 과장에게 여지없이 혼나던 필자를 위로해 주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때는 지적받는 일들이 환자의 치료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필자를 담당했던 과장은 환자와 연관된 그 어떤 허점도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환자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외우고 있기를 원했다. 어찌됐든 그 때는 수련의가 아무리 잘 해도 칭찬은 듣기가 어려웠고, 다행히 야단을 맞지 않고 지나가는 게 칭찬이나 마찬가지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초등학교 교장이 입원을 했다. 처음에는 고열이 나서 내과로 입원했다가, 고열의 원인이 파상풍으로 밝혀지면서 신경과로 옮겼던 환자였다. 파상풍은 세균 감염으로 발생했다가 진행 과정에 근육의 강직을 초래하고, 심한 경우 기관지 경련으로 호흡기능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질환이다.

당시 교장을 내과에서 넘겨받은 다음 날 과장과 오후 회진을 하러 병실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과장과 필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교장은 근육 경련과 함께 호흡 발작을 일으켰다. 급격한 호흡마비로 얼굴과 입술에 청색증이 심해져 응급처치 장비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급한 나머지 필자가 환자의 코를 막고 필자의 입을 통해 환자의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소위 응급처치 시간에 배웠던 구강 대 구강 호흡법이었다. 환자의 입과 코에서는 침과 가래가 섞여 올라왔지만 상황이 다급해 응급처치를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다행히 환자의 얼굴과 입술의 색깔은 조금씩 붉은 색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응급처치 장비가 도착해 환자의 기도로 안전한 호흡을 위한 기도삽관을 시행해 호흡마비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응급상황에 처한 환자를 상대로 약 하나 쓰지 않고 책에서만 배웠던 응급처치 방법을 활용해 위기의 상황을 넘긴 순간이었다. 당시 옆에서 지켜보던 환자 가족과 간호사들이 나에게 일제히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 후 교장은 안전한 기도 확보를 위해 기관지 절개를 시행했고, 약 한 달 후 정상으로 회복해 퇴원할 수가 있었다. 그가 퇴원하던 날에도 필자는 바쁜 일상 때문에 아침 회진시간에 잠깐 인사만 하고 응급실에서 다른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그 때 신경과 병동에서 필자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혹시 급한 환자가 생겼나 싶어 급히 병동으로 올라가니 평상복으로 차려 입은 교장이 제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교장이 퇴원하는 마당에 굳이 인사를 하고 가야 한다며 다른 환자를 보느라 바쁠 거라는 간호사의 설명에도 필자를 찾아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교장은 "평소 말이 없어 아직까지 정식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못했다"며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데 대해 감사의 뜻으로 노래를 한 곡 선사하고 싶다고 했다. 하도 그 뜻이 완강해서 병동에 선 채로 교장이 쉰 목소리로 부르는 '고향의 봄'을 끝까지 들었다.

그 날 오후 회진 시간에 과장은 "나는 평생 의사로 살면서 '한 번만이라도 내가 생명을 건져주는 환자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한다"면서 "자네는 벌써 그런 환자를 만났으니 앞으로 앞날에 행운이 있을 걸세"라고 말했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그 교장의 노래와 필자를 가르쳤던 과장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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