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여자아이가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장구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홀린 듯 그 소리를 따라 걸었다.
도착한 곳은 한 건물의 반 지하 방. 계단 위에서 유리창 너머로 안쪽이 보였다. 아이의 눈에 한국무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이는 춤을 추고 싶어서 매일 그곳에 찾아가 숨어서 지켜보았다. 한국창작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수연(42) 씨는 "춤을 추지 않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삶을 다시 산다고 해도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화무용단' 대표 최수연 씨를 만나본다.

최수연의 '화무용단'은 진영고등학교 앞의 건물 3층에 있다. 연습실은 넓고 깨끗하다. 연습실 한쪽에 북이 여러 대 있고, 무용복이 걸린 옷걸이도 있다. 화무용단을 방문했을 때 최수연은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길게 뒤로 땋아 내리고, 무용복을 입고 있었다. 흰 한삼을 손목에 끼고 살풀이춤을 추는 그의 동작은 아름다웠고 단아했다. 한삼의 끝동은 연두색. 그가 손을 뿌리는 동작을 펼쳤을 때, 연두색 끝동은 버드나무 어린 새순이 바람에 날리는 듯했다.
 
최수연은 197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 어느 날 미술과 무용을 가르치는 한 예능학원을 보았다. 학원 유리창 너머로 또래 아이들이 부채춤을 추는 걸 본 그는 그만 마음을 뺏겨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무조건 예능학원에 보내달라고 며칠을 졸랐어요. 학원에 간 첫날 한복 무용복을 입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었을 때, 마치 선녀가 된 듯한 기분이었죠. 이 옷이 내 것이면 좋겠다 싶었고, 그 옷을 벗고 싶지 않아서 옷을 꼭 움켜쥐고 있었어요." 그는 이렇게 해서 한국무용을 만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동래 금강원 근처를 지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장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이끌려 가보니 한 건물 반지하에 있는 한국무용학원이었다. "반지하여서 어린 저에게도 계단 뒤에서 작은 유리창 너머로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지요. 그 순간 그 방안의 장면 말고는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진 듯 오직 그것만 보였지요."
 

5세 무렵 꿈처럼 만난 한국춤
부모의 반대에도 "춤을 추고 싶어요"

12세 때 춤 명인 김진홍 문하 입단
"수연이는 춤을 춰야 하는 사람"
살풀이·승무·산조·북·장구 두루 섭렵

부산대 무용과 졸업 후 무용학원 열어
15년 전 김해로 와 한국춤 지도자의 길
항암치료 이겨내고 "내 삶은 춤 속에"

최수연은 계속 그곳을 찾아갔다. 한국무용가 김문경 선생이 숨어서 계속 안을 들여다보는 최수연을 발견하고는 "무용을 배우려면 부모의 허락을 받고 오라"고 말했다. 그때 최수연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한 대 사 선생을 집으로 오게 해서 형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몸을 움직이며 춤을 주고 싶었다. 어린 최수연은 꾀를 냈다. 신발을 피아노 밑에 숨겨 두었다가 창문 밖으로 던져두고, 창문으로 빠져나가 무용학원엘 다녔다. 최수연이 도망을 치면서까지 무용학원에 다니고 싶어 하자 어머니는 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서예학원에 보낸다는 핑계를 대고 아버지 몰래 무용학원에 보내주었다. 
 
그렇게 3학년이 됐는데 아버지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길을 가면서도 무용 동작을 했거든요. 발동작, 손동작, 뛰고, 휙 돌고…. 온 동네에 402호 막내딸은 춤추면서 다닌다고 소문이 났어요."
 
화가 난 아버지는 최수연의 무용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저는 대성통곡을 하며 주저앉았지요. 아버지에게 다시는 무용학원에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하 쓰레기장으로 혼자 몰래 가서 무용복을 찾아 들고 왔습니다."
 
최수연은 무용복을 아파트 비상계단에 숨겨놓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게도 비밀로 하고 무용학원엘 다녔다. "부모님 몰래 다녀야 했으니 학원비를 낼 수가 없었죠. 그래서 선생님께 학원비 대신 청소도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 학원만 다니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어요. 하지만 얼마 후 아버지가 다시 알게 됐어요. 전 학교와 집 외에는 어디도 못 가게 됐어요. 감금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집에서 몸동작이 조금만 커도 야단을 들었고요. 동작 자체를 못하게 했어요."
 
그러나 춤을 추고 싶다는 최수연의 마음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서 혼자 춤동작을 연습했다. 원기둥 형태의 빈 사탕 통을 두 발 사이에 끼워 나무젓가락으로 장구 장단을 외면서 쳤다. 그렇게 초등학교 3학년 최수연은 춤이 추고 싶어서 병이 들었다. 
 
"춤을 추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시장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엿을 파는 각설이패를 따라가서 북 치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요. 김문경 선생님께 매일 편지도 썼어요. 무용학원에 살면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할테니 춤만 추게 해달라고요. 6개월 정도 편지를 보냈어요."
 
그렇게 아픈 몇 달이 흘렀다.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최수연에게 카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예쁜 크리스마스카드와 편지였다. 김문경 선생이 보낸 것이었다. "이게 그 편지예요." 그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편지에는 '한국무용을 하고 싶다는 한결같은 마음에 놀랐다, 그러나 부모의 뜻을 따라라, 그러면서 무용할 방법을 찾아라, 훌륭하게 자라라'는 따뜻한 말이 담겨 있었다.
 
편지를 먼저 읽어 본 아버지는 "그렇게 춤이 추고 싶다면 해라. 너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하며 마침내 딸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최수연은 그 뒤 김문경 선생이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이사했다는 걸 알아냈다. "선생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선생님 집의 가정부로 써 달라. 시키는 대로 할테니 춤만 가르쳐달라'고 편지도 써놓고, 서울 가는 기차편도 알아보았고요. 그런데 몇 동 몇 호인지를 몰라 결국 못 갔죠. 아버지는 지금도 '하마터면 딸을 잃을 뻔했다'고 이야기해요." 최수연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무용가로서의 김문경 선생을 마음 깊이 간직한 최수연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의 춤 명인 김진홍 문하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당시 부산에서 춤을 잘 춘다는 학생들, 어린이들, 어른들까지 전부 김진홍 선생의 무용학원에 다 모였을 겁니다. 살풀이, 승무, 산조, 북, 장구 등 한국춤을 모두 배웠지요. 김진홍 선생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언제나 춤 연습에 빠져 있었어요.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지요. 스승 복이 많았어요, 제가."
 

▲ 한국무용 하나에만 평생 매달려온 최수연 씨가 살풀이를 연습하고 있다.

마음껏 춤을 추고 있던 최수연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온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졌어요. 학원비는커녕 작품비를 내기도 힘들었지요. 그때 어머니가 학원에 찾아왔어요. 김진홍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은 어머니는 '자식 뒷바라지를 하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힘들다, 우리 수연이 좀 거둬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엄마를 보는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저는 춤을 추고 싶어서 그저 어머니 옆에 앉아 울기만 했어요."
 
김진홍 선생은 '수연이는 춤을 춰야 하는 사람'이라며 가르치겠다고 했다. 최수연은 울면서도 마음속으로 '계속 춤을 출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때 어머니는 최수연에게 "선생님이 이렇게 배려해주셨다. 그 마음의 절반은 엄마가 돈을 벌어 꼭 갚겠다. 나머지 절반은 수연이 네 몫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마음, 김진홍 선생의 배려를 마음에 새기면서 다시 춤을 추었다.
 
최수연은 부산대학교 무용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김현자 교수님을 만났지요.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수님 밑에서 작품 활동과 공연을 많이 했지요.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춤은 정말 원 없이 배우고 추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최수연은 경북에서 2년여 무용학원을 운영하다가 2000년 김해로 내려와 내동에 무용학원을 열었다. 그리고 2005년 진영의 현재 자리로 옮겼다. "당시에는 진영에 무용학원이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여기에도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의 저처럼요. 그런 아이들과 어머니들과 함께 춤을 추었어요. 행복한 시간을 함께 만들어갔지요."
 
최수연은 그러던 중 2010년 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는 2년 동안은 춤을 못 추었다. 그런데 그가 없는 동안에도 오정숙, 이미자, 송복선 씨 등 그와 함께 춤을 추었던 어머니들이 회비를 내 건물주인에게 월세를 내면서 그를 기다려주었다. 그는 2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최수연은 아이들이 계단 올라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누군지를 안다. 그 아이들의 마음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춤이 추고 싶었던 꼬맹이 수연이가 지금의 최수연이 된 것은 제 손을 잡아주신 스승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분들처럼 살고, 춤을 출 겁니다. 이제는 제가 저처럼 간절하게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추면서 살려고 합니다." 최수연은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항암 치료를 했던 2년 동안 춤을 못 추었던 게 너무 분하고 억울해요. 치료를 받으면서도 춤을 추면 되는 건데…. 똑같은 일이 다시 생긴다면, 전 춤을 출 거예요. 제 삶은 춤을 출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어요."

≫최수연
화무용단 대표, ㈔한국무용협회 김해시지부 부지부장, ㈔한국무용협회 경남지회 감사. 2009년 경상남도 교육감 화무용학원모범학원 지정. 전국무용경연대회 대상, 특상, 금상 외 지도사장 다수 수상. 대표작/연꽃바다, 나비되어 날다, 궁, 금빛바다, 회화도, 락락락, 다무 외 다수.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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