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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규모 순장묘 첫 발견세계유산을 향해 - 가야의 유적, 가야고분군을 가다
  • 수정 2017.11.02 14:32
  • 게재 2015.09.16 09:12
  • 호수 239
  • 11면
  • 조나리 기자(nari@gimhaenews.co.kr)

② 고령 지산동고분군

 

고총만 700여개 가야 고분군 중 최대
영·호남 주름잡은 대가야 위상 입증
조식 남명 "산위에 저게 뭐냐" 놀라기도

일제강점기 때 발굴 유물 대부분 일본행
44·45호분 순장묘 사후세계 신봉 증거

 

고대 가야에는 두 개의 건국신화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고려 후기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 김해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한 문인이 저술한 <가락국기>를 인용한 내용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6개가 깨져 동자 6명이 됐다.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왕 김수로왕이고 나머지 다섯 동자는 다섯 가야의 왕이 됐다.' 이 신화를 바탕으로 가야국은 여섯 가야로 이뤄졌다고 알려져 왔다.

   
▲ 4세기 무렵 경남·북과 전남·북 일대를 호령했던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인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다른 하나는 신라 말 유학자 최치원이 지은 <석이정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선시대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내용이다. '가야산의 신과 하늘의 신 사이에 두 형제가 태어났다. 형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됐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됐다.'
 
가야국의 시작인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나중에 생긴 대가야 이진아시왕의 동생이라는 점이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이 신화는 대가야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가야라고 하면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를 생각한다. 그러나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 몰락하고 5세기 이후에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가 발전하게 된다. 대가야는 1~3세기 무렵 삼한시대에 고령에 있던 반로국에서 시작한 나라다. 4세기 무렵 다라국으로 발전했고 이후 대가야로 불리게 됐다.

   
▲ 고분군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들.

금관가야가 몰락한 뒤 일부 세력은 일본으로, 다른 세력은 고령으로 유입됐다. 이후 금관가야의 교역과 철광 개발에 대한 지식이 전수돼 고령의 대가야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대가야는 5세기부터 지금의 경남 합천 북부 지역은 물론 경남 거창·함양, 전북 남원·순천과 전북 임실·장수에 이르기까지 영·호남을 아우르는 고대국가로 발전했다고 추정된다.
 
대가야의 세력을 잘 보여주는 유적은 고령 지산동고분군이다. 사적 제79호로 지정돼 있는 지산동고분군은 고령 대가야읍 지산리에 분포돼 있다. 이 고분군은 2013년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해발 310m인 주산 봉우리의 동남쪽 사면에 분포돼 있는 지산동고분군은 가야 고분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형 고분 5기를 포함해 모두 700여 개의 고총이 자리 잡고 있다.
 
지산동고분군은 봉분이 없는 대성동고분군과 달리 높고 봉긋한 봉분이 많다. 특히 주산 아래 능선을 따라 형성돼 있는 고분군은  높이와 규모가 웅장하다. 직경 40m 이상이 1기, 40∼30m 5기, 30∼25m 6기, 25∼20m 6기, 20∼15m 18기, 15∼10m 87기, 10m 미만 581기 등이다. 김해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조선시대 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1560년께 지산동고분군을 보고 "산 위에 저게 뭐냐"며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대가야박물관 이용호 문화관광해설사는 "산 위에 고분군을 만든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고분군을 작게 만들어도 커 보이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이 산 위에 있는 고분군을 우러러 보면서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고분군이 하늘에서 나라를 잘 지켜 보호해 준다는 신앙적인 성격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 대가야박물관에 있는 가야금의 시조 우륵 부조.

지산동고분군은 일제 강점기인 1906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가 처음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이후 1939년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안타깝게도 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유출됐다. 당시 조사는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학술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은 1977년 이후부터다. 그해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가 합동으로 대형 고분인 44·45호분을, 1978년 계명대가 중형 고분인 32~35호분을 발굴조사했다.
 
지산동고분군의 고분은 한 가운데에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이 하나 있고, 주위에 토기류·마구류·금동제 관장식·금은 장신구·옥류 등 부장품을 넣는 돌방 한두 개와 순장자들의 무덤 여러 개가 있는 형식으로 돼 있다. 돌방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무덤 둘레에도 둥글게 돌을 쌓아 올리고 사이사이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봉분을 높게 쌓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44호분과 45호분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순장묘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대가야인들이 사후 세계를 믿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44호분에서 발견된 순장자는 36명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순장자가 발견된 무덤이다.
 
44호분 바닥 지름은 27m다. 중앙에 왕이 묻히는 큰 돌방, 남쪽과 서쪽에 부장품을 넣는 돌방 2개, 그 주위로 작은 순장자의 무덤 33개가 있다. 순장자 무덤에서는 부부로 추정되는 30대 초반 남성과 30대 후반 여성이 포개져 묻혀 있는 무덤, 30대 남성과 8세 어린이가 포개져 묻혀 있는 무덤 등이 발견됐다. 비어 있는 순장자 무덤 3개도 발견됐다.
 
이용호 문화관광해설사는 "44호분의 주인은 479년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이라는 작호를 받은 대가야의 하지왕으로 추정된다. 순장자는 순장을 거룩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무덤 3개가 빈 것은 순장자로 지정된 사람이 도망을 갔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순장은 산 채로 땅에 묻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발굴조사에 따르면 순장자들은 모두 두개골이 깨진 상태로 발견됐다. 순장자들을 먼저 죽인 다음 무덤에 묻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 대가야박물관에 걸려 있는 각종 가야금

지산동고분군에서는 신라와는 다른 금관이 발견되기도 했다. 30호분과 32호분에서 나온 금관은 신라의 나뭇가지 모양, 새날개 모양 장식과 달리 풀잎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중 하나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나머지 하나는 삼성이 도굴꾼으로부터 사들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하고 있다.
 
또 지산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낙하산형, 원뿔형, 참외 모양 금귀걸이 등은 대가야의 화려한 문화를 설명한다. 대가야계 귀걸이는 일본에서도 다수 발견돼 두 나라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산동고분군에서 나온 토기 내부에서는 대구, 청어, 바닷게, 고둥 등 해산물이 발견됐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있었던 대가야가 해양으로 진출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금관가야와 마찬가지로 대가야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철기문화다. 지산동고분군에서는 철제 무기·무구·마구·농기구 등이 대거 발견됐다. 대가야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가야금은 가실왕 때 우륵이 중국의 쟁을 본 따 만든 것이다.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금관가야가 가야국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대가야는 가야의 끝이라 할 수 있다. 대가야의 경우 다른 가야국과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 멸망하는 바람에 찬란했던 모습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최근에 와서야 학술회의 등을 통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고령(경북)=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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