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의 도예가들 중에서도 '강씨 집안'은 유명하다. 장남 강효진(두산도예), 차남 강호용(선아도예)를 비롯해 그들의 형제인 강유신(용원도예), 강임선(영시흥), 강석순(영선도예), 모두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그 자녀들인 강상석(예다움도예), 강수석(수민도예)도 도예공방을 냈고, 강찬석 씨는 부친의 두산도예에서 수업 중이다. 그야말로 도예가 집안이다. 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흙을 빗기 시작한 사람이 강호용(59) 씨다. 강호용의 선아도예를 방문해 도예가 집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매년 여섯 번 정도 작품을 잉태하는 선아도예 가마.
한학자 집안… 일제 때 가세 기울어
부친·배종태 선생 밑에서 도예 수업

형제·조카 모두 진례서 도예가 활동
공동묘지터에 자리 잡은 후 번성

봄·가을 세 차례 연 여섯 가마 작업
"김해 분청문화 후학에 전수 하고파"


선아도예는 진례면 평지길 38에 있다. 도로에서 전시판매장이 바로 보인다. 옆에는 장작가마가 있다. 전시장과 가마 사이로 들어가면 왼쪽에 전시장과 붙은 작업장이 나온다. 마당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집이다. 집의 큰 방 한 칸은 도자기로 가득한 전시실이다.

'공간&' 시리즈를 시작했던 초기에 강효진의 두산도예를 방문한 적이 있다. (<김해뉴스> 2012년 9월 26일자 10면 보도) 따라서 이번 취재는 강씨 집안의 도예가 중에서는 두 번째다.

강호용 형제와 조카들이 모두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강씨 집안은 사실 조부 때까지는 학자 집안이었다고 한다. "산청이 고향입니다. 조부 때까지 한학을 했던 학자 집안이었지요. 사방 백리를 다녀도 남의 땅을 밟지 않았던 부유한 집안이기도 했고요. 양조장이 두 개나 있었지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핍박을 많이 받았지요. 또 조부가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땅을 나눠주기도 해서 재산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의 부친(강병희)은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그런데 부친이 아홉 살 때 조부가 세상을 떠났다. 가세는 기울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부친은 대나무공예를 했다. 혼인을 한 뒤 옹기를 만들던 장인에게 옹기 일을 배우기도 했다. 부친은 일을 배운 지 3개월 만에 옹기를 만들어 냈다.

"옛날에는 흙을 만지는 것을 천한 직업으로 여겼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는 이 일을 안 시키려고 했어요. 그래서 둘째인 제가 먼저 일을 배웠습니다. 형제들 중에서는 손재주가 제일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2세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산청에서 부친을 도와 독을 만들던 시절, 부자는 서부경남의 양조장에 들어가는 독을 전부 만들다시피 했다. 일은 무척 힘들었다. 그는 흙일을 안 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 했다. 그러다 열여섯 즈음 김해 진례로 도망을 쳤다. 산청에서 부친과 친분을 쌓으며 도자기를 만들던 고 배종태 선생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에게서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가족 중 진례에 가장 먼저 들어간 이는 그였다. 이후 다른 가족들이 진례로 이사를 갔다.

▲ 도예가 강호용 씨가 작업장에서 접시를 만들고 있다.

어려서부터 옹기와 도자기를 시작한 강호용은 부친과 배종태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배종태의 도예 맥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건 이런 까닭이 있어서이다. "아버지는 장인에게서 배운 옹기와 분청을 고스란히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배종태 선생님은 최고의 도공이시고, 저에게는 최고의 스승이지요. 옹기와 도자기 모두 잘하셨고, 또 전통가마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지요."

강호용은 배종태 밑에서 3년 정도 일했다. 이후 울산, 경북, 경남의 각 요장을 찾아다니면서 10여 년간 일했다. "열일곱 살 때쯤 아버지와 배종태 선생에게서 기술이 좋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기본과 원칙을 두 분에게 배우고 난 뒤에는 다른 지역의 기술을 좀 더 다양하게 배우고 싶어서 외지로 나갔지요. 지역마다 기술이 조금씩 다르니까요. 잘난 척 하지 않고 배우는 데 열중했습니다."

그는 한 사람에게 배워서는 도자기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여러 선생에게 배우면서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이루어가야 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런 말을 남겼어요. 숨이 끊어져야 다 배운 것이다, 그 전에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라고요. 죽음이 다가오니 그런 생각이 들어 너에게 말해준다, 하지 못했던 작업도 떠오른다, 고 말씀하셨지요."

그도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도자기를 하고 싶다면 흙 속에서 더 구불고(뒹굴고) 와라." 그는 또 이런 말도 한다. "도예가가 되어 전시도 하고 상도 받으면 사람들이 선생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는 선생이 아니다. 그저 도공이다. 자세를 낮추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강호용은 1998년 오성도예를 설립했다. 2002년에는 이름을 선아도예로 바꾸고 지금 자리에 터를 잡았다. 그는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잠시 뜸을 들이더니 "원래 이 자리가 애기장터라고 하는 공동묘지 터였다"고 말했다. "공동묘지는 원래 좋은 터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이 곳에 못 왔어요. 그래서 다른 곳보다 땅이 싼값에 나왔고, 제가 터를 잡았지요. 죽은 사람은 말이 없어요. 허허. 이곳에 와서 모든 일이 잘 됐지요. 상이란 상은 다 받았고, 국가기능장인도 됐지요. 아이들도 대학공부를 다 하고 결혼해서 살림도 차려 나갔고요. 좋은 자리입니다."

▲ 하루 전 가마에서 꺼낸 작품들로 가득한 방.

강호용은 오전 2~9시에 작업을 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시간에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낮에는 도자기를 보러 오는 손님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차를 마신다.

큰 분청항아리부터 차 도구, 생활 도구까지 작업은 다양하다. 그는 매년 여섯 번 가마를 땐다. 여름과 겨울을 빼고 봄에 세 가마, 가을에 세 가마를 땐다. "불을 넣을 때에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 날씨까지 염두에 둡니다. 그렇게 신경을 써서 불을 넣을 때 느낌이 와요. 이번에는 몇 점을 살리겠구나, 이번에는 틀렸구나 하고요." 가마 속의 불길을 사람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에 그는 불길을 '신의 손길'이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어요. 사람이 황소 목을 꺾으면 꺾었지, 절대로 불은 마음대로 안 된다. 그 말은 생각할수록 명언이더군요."

강호용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분청도자기를 가르쳐 주고 싶다고 했다. "김해합성초등학교에서 7년 동안 도자기를 가르쳤어요. 분청은 김해의 자랑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김해는 물론이고 부산이나 서부경남의 아이들에게도 분청도자기 문화를 전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제 이야기를 자랑하려고 인터뷰를 한 게 아닙니다. 김해에서 도공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김해도공들의 공동체, 그 안에 있는 하나입니다. 김해의 분청, 진례의 도공,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문화,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어요."

≫ 강호용
김해도예협회 회원, 경남공예조합 이사. 1995년 전국 도자기 기증대회 동상. 2001년 경남 도자기 기능대회 심사위원. 2003년 경남공예품대전 은상. 2005년 경남공예품대전 동상. 2008년 김해시공예품대전 은상, 경남 공예품대전 은상,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지식경제부 장관상. 2009년 김해시 관광기념품경진대회 동상. 2011년 경남 관광기념품 장려, 국가기능장인 선정. 2012년 한국 현대미술전 대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그 외 각종 대전 다수 입상과 단체전 전시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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