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옥전고분군

삼국시대 당시 신라·백제 다투던 무대
해발 50~80m 낮은 야산 정상부 위치

높은 기술력 장신구·무기 출토 사실
고구려 남정 때 금관가야 이주 입증

 

김해의 금관가야를 시작으로 가야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걸쳐 약 500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가야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전해지는 가야의 역사는 고려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에 부분적으로 나온다. 이 책에서는 '금관가야와 5가야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가야 토기 출토 범위를 통해 가야연맹체를 이룬 소국이 10개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가야의 소국 중 하나는 경남 합천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다라국이다. 후기 가야의 맹주국이었던 경북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했던 나라다.

▲ 멸망한 금관가야의 지배층이 합천으로 넘어가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라국의 무덤인 합천 옥전고분군.

아직도 신비에 싸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다라국은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나온 화려한 장신구, 무기 등을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옥전고분군은 일본 학자들과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가야의 다른 고분군들과 달리 도굴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다. 다라국의 위상을 보여주면서 소국 형태로 발전한 가야의 찬란한 역사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합천 지역은 삼국시대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 양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합천 곳곳에는 백제, 신라가 아닌 독립적인 정치세력의 존재를 알려 주는 고분군이 크게 5개로 나뉘어 분포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고분군들을 통해 합천 지역에 2개 이상의 가야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심이 되는 곳은 옥전고분군이다.
 
사적 제326호인 옥전고분군은 합천 쌍책면에 있는 해발 50~80m 야산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둥근 모양으로 솟은 고분군이 펼쳐져 있다. 고분들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아 누구나 무리 없이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고분은 모두 1천 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름 20~30m인 고총만 28기에 이른다.
 
나지막한 야산에 올라가면 고분군의 모습과 함께 인근 논, 주거지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과거에도 고분군과 가까운 거리에 농경지와 주거지가 위치해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 준다.
 

옥 장식품 다수 발굴 '옥구슬 밭' 이름
철기·옥세공품 수출하고 쌀 수입한 듯

고분군 무덤 모양 대성동고분군 닮아
성산토성 연구 통해 역사 확인 기대



옥전고분군의 이름 '옥전(玉田)'은 글자 그대로 '옥구슬 밭'이라는 뜻이다. 다라국 유물에서 옥 장식품이 많이 발견됐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 밭일을 하다가 옥 구슬이 나오기도 하고 집 근처에서 유물이 발견되기도 할 정도로 옥전 일대에서 유물이 많이 발견됐다.
 
옥전고분군은 1985년 국립경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처음 발굴됐다. 최고 수장급의 고분에서만 발견됐던 유물들이 이곳에서 대거 쏟아져 나왔다.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목항아리는 물론 높은 기술력을 보여주는 화려한 장신구와 무기들이 많이 출토됐다. 옥전 M2호분에서만 2천 개가 넘는 구슬이 나왔다. 낙하산, 원추, 심장 모양 등의 호화로운 장식이 더해진 금 귀걸이 같은 지배자의 장식품도 많이 발견됐다.
 
옥전 M3호분에서는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용봉무늬, 봉황무늬, 용무늬가 새겨진 둥근 고리 큰칼이 4자루나 출토됐다. 이는 전투용 칼이 아닌 위세 과시용 칼로 추정된다. 칼에는 봉황머리, 용의 모습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유물로는 옥전 M1호분에서 나온 로만글라스다. 로만글라스는 로마제국 때 로마와 속주에서 제작된 유리그릇,  장식품이다. 이들 중 일부가 극동지역에까지 전파돼 한국, 중국, 일본 등의 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한다. 2013년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도 로만글라스가 나온 바 있다.

▲ 화려하고 섬세한 세공기술을 자랑하는 다라국의 장신구.

합천박물관 김종탁 문화관광해설사는 "옥전고분군에서 나온 장식품을 보면 다라국의 세공 기술이 얼마나 정밀했는지, 다라국이 얼마나 번성한 나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로만글라스는 물론 신라·백제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장식품을 통해 다라국이 다른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를 펼쳤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과거 합천 중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짓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분군에서 농기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다라국 사람들은 철기, 옥 세공품 등을 수출하고 쌀을 수입하는 상업을 통해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학자들은 옥전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5세기 초~6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 때 멸망한 금관가야의 세력이 합천 지역으로 넘어가 다라국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합천박물관 조원영 학예사는 "다라국 이전의 합천 지역에는 눈에 띄는 세력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갑자기 5세기 때부터 철기, 금 장신구, 큰 칼, 투구 등 뛰어난 기술력을 뒷받침하는 유물들이 만들어졌다. 금관가야의 지배계층이 합천으로 이동해 다라국을 형성했음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다라국이 금관가야의 후손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또 있다. 옥전고분군의 무덤 형태다. 옥전고분군은 대가야의 수혈식 석곽묘 형태가 아니라 금관가야의 덧널 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 합천박물관의 가야 소개판.

김종탁 해설사는 "다라국을 대가야의 속국으로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대가야와는 다른 묘장 방식 때문이다. 묘장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다라국 고분은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최근 쌍책면 성산토성 발굴 결과 다라국의 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가야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토성으로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다라국의 실체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조원영 학예사는 "마을 주민들은 이전부터 성산토성을 보며 성벽 같다고 생각해 왔다. 발굴을 계기로 이를 증명하게 됐다. 앞으로 추가 조사, 연구를 통해 다라국과 가야의 역사가 더 자세히 밝혀지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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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경남)=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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