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식 인제대 교수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통속적인 말이 있다. 아주 통속적이긴 하나 전문가의 필요성을 이처럼 친근하고 정확하게 표현해 준 말이 그리 많지도 않다.  무슨 일을 당하면 해당 전문가를 찾아 의견을 듣고 도움을 청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애를 낳으러 정형외과에 가지도 않고, 컴퓨터가 고장 났는데 무당집에 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달 중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선언이 폭탄처럼 떨어진 이래 온통 시끄럽게 들끓는 우리 사회가 극단적 분열의 길로 치닫고 있다. 국사교과서 국정화 선언의 폭탄은 해당 전문가인 역사학자들의 구체적 검토나 의견청취도 없이 전혀 비전문가인 정치인의 정치적 결단으로 제조되었다. 연평도 포격사건 현장을 둘러 보다 검게 그을린 보온병을 들고 전문가인 군인에게 묻지도 않고 "이게 그 탄피다"라고 소란을 떨었던 것도 정치인이었고, 이 해프닝이 믿을 수 없는 직종 대표로 우선 정치인을 꼽는 우리 사회인식의 현주소로 패러디화 되었던 것도 아직 기억에 새롭다.
 
어제 오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떠도는 영상을 보니 국정화의 강력 추진자인 박근혜 대통령도 꼭 10년 전 당시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역사와 역사 교육을 정치가 재단해서는 안 되며, 역사에 관한 문제는 역사학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 적이 있다. 국정화 선언 이후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심지어 교육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10명 중 8명)의 역사학 교수들의 집필거부 선언이 있었고, 외국의 한국학연구자 154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수많은 교수 대학원생 학생 등의 역사학도들이 반대시위로 거리에 나섰다. 특히 전국역사학대회에 참가한 28개의 역사 관련학회가 천명했던 반대성명은 우리 역사학계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에게 맡겨야 한다던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심어주는" 국정교과서의 강행을 선언하고, 여당 대표는 역사학계 전체를 좌편향으로 몰면서 역사학자들에게 '역사전쟁'을 선포했다. 전문가의 의견을 구해야 할 비전문가들이 스스로 처방도 하고 조제도 한 셈이다.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느낄 일들만 있지 않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원래 역사란 그런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직시해야 할 대목도 적지 않고, 그래서 반성의 자료로 삼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태반이다. 이런 역사를 보고 '자학사관' 운운 하는 것은 일본의 우익 같은 소리다. 정치인이 역사학자에게 묻지도 않고 역사교육의 방향을 재단하는 것은 '탄피 오판 소동'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제발 대통령 자신의 말대로 "역사학자들의 몫이 되도록" 하길 바란다.
 
물론 모든 역사학자가 제시하는 역사가 다 같은 것도 아니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더구나 역사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어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과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는 군대의 명령이나 파쇼주의처럼 무 자르듯 간단명료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시되어야 할 것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의 보장 없이 올바른 역사해석과 역사교육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아예 정해진 국사교과서가 없거나 다양한 검인정교과서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검인정 자체가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작성되는 것이고 교육부의 통제 하에 통과된 것인데 국정화로 무얼 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로 만들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별 문제 삼고 있지 않지만 검인정교과서의 채택 방식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다. 다양한 국사교과서의 허락은 필수지만 다양한 국사교과서 중 어떤 것을 채택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다. 검인정 제도를 견지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학교장 주제로 교사와 학부모의 회의체인 PTA가 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 아이에게 이런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부모들의 의지가 선생님들의 의견처럼 중시되고 있다. 극우의 일본사교과서 채택율이 0.1%에 머물렀던 것도 깨어 있는 부모와 교사들의 판단이었다. 국정교과서뿐인 북한처럼 다양한 생각을 통제하는 나라에 희망의 미래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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