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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묻힌 가야 왕국 ‘비사벌’ 숨쉬는 듯…⑥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 수정 2017.11.02 14:40
  • 게재 2015.11.18 11:09
  • 호수 248
  • 12면
  • 박현주 기자(phj@gimhaenews.co.kr)

 

   
▲ 창녕박물관을 사이에 두고 교리와 송현리 일대에 넓게 분포한 교동·송현동 고분군 전경.

 


日 학자 정치적 활용 목적 첫 발굴 시작
중심연대 5~6세기 전반으로 추정
금동관·금·은장신구 등 다량 출토

송현동서 발견된 ‘가야 소녀의 흔적’
슬픈 ‘순장의 역사’ 앞에 선 듯 먹먹

 

경남 창녕은 영남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창녕 지역에 있던 가야국을 일러 비화가야(非火伽耶), 비사벌이라고 부른다. 비화가야는 가야연맹체(변한)의 하나로 6세기에 접어들어서 신라의 영토가 됐다.
 
햇살 좋은 가을날, 비화가야를 찾아 창녕으로 떠났다. 비화가야의 역사를 담은 이미희의 소설 <가야에서 온 소녀-잃어버린 왕국>은 이번 여행의 소중한 동반자였다. 2006~2008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송현동고분군 발굴 조사 과정에서 순장되었던 16세 소녀가 발견됐다. 그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비화가야의 역사를 다룬 소설은 애잔하면서도 아름답다. 가야의 역사를 담은 글을 읽기가 좀 부담스럽다면, 비화가야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는 이 책을 품고 가도 좋을 것이다.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은 창녕 교리와 송현리 일대에 분포한 지역의 대표적인 수장급 대형고분군이다. 교동고분군은 창녕박물관 옆에 있다. 송현동고분군은 화왕산 아래에 있다.

   
▲ 송현동고분군 내 한 고분의 내부.

창녕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봉분들이 눈앞으로 달려든다. 교동고분군이다. 주차장 옆에도, 도로 건너 산으로 이어지는 언덕에도 봉분이다. 예고도 없이 불쑥 가야로 들어간 기분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 고분군이 있으니, 1천500여 년 전 비화가야와 현재의 창녕이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화왕산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 송현동고분군을 찾아갔다. 고분군 옆을 따라 화왕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면서 고분군을 바라보면, 그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무덤이 아니라 세상이 생길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둥글고 높은, 혹은 낮은 그 봉분들. 이 송현동고분군에서 가야의 소녀가 발견된 것이다.
 
교동·송현동고분군은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우리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더 컸던 일본에 의해 시작된 교동·송현동고분군 발굴조사는 어쩌면 그 자체가 수난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1917년 분포조사가 실시되고, 1918~1919년 11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됐다. 안타깝게도 제21호, 31호분을 제외하고는 발굴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조사자마다 고분 번호를 달리하는 등 조사된 고분이 어느 고분인지 정확하게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고분군 앞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이때의 발굴조사를 일러 "이 시기 조사를 통해 마차 20대와 화차 2량 분의 토기와 금공품들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는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 고분 발굴 장면.

1992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창녕의 고분 문화 및 편년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학술정보를 제공했다. 2004년에는 처음으로 정밀 지표조사가 이뤄져 이미 복원된 36기 외에 65기의 고분을 추가로 확인했다. 현재까지 고분군에서는 금동관, 금·은장신구, 은관장식, 금동관모, 금귀고리 등의 장신구와 각종 마구류, 장식무기류, 비늘갑옷 등 철제무기류, U자형 삽날 등 농공구류, 금속용기류, 토기류, 목기류가 출토됐다. 출토 유물의 양상과 고분 구조를 볼 때 5~6세기 전반이 중심연대가 되는 고분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음에 이 고분군은 행정구역에 따라 사적 제80호 교동고분군과 사적 제81호 송현동고분군으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두 고분군이 동일 성격의 유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져 2011년 7월 28일 사적 제514호 교동·송현동고분군으로 통합됐다.
 
교동·송현동고분군의 유적은 김해를 찾아온 적이 있다. 2010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기획특별전 '비사벌' 전이 열렸다. 2014년에는 '비사벌의 지배자' 전이 열렸다. 두 전시회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비사벌' 전은 가야 소녀의 복원으로 화제를 모았던 전시였다. 2004~2008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송현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창녕의 고분 문화를 소개하는 기획 전시였다.
 
송현이는 송현동고분군 15호분에서 발굴됐다. 지역의 이름을 따서 송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사벌' 전이 열릴 때 발간된 도록에 논고 '창녕 송현동고분군의 순장자와 순장문화'를 게재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성준 연구원은 송현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무덤 입구 쪽에 매장된 순장여성은 왼쪽 귀에만 금동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뒷머리뼈에서 다공성 뼈과다증이 확인돼 빈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정강이뼈와 좌우 종아리뼈에서는 생전에 일시적인 종아리의 반복적이고 급격한 운동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반응뼈도 확인되었다. 치아의 엑스-레이 검사와 뼈대의 분석을 통해 여성의 나이를 16세로 판단했다. 순장여성이 금동귀고리를 하고 있었고 영양상태도 양호했다는 것은 순장자가 최하계층의 신분만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 재현한 송현이 모습.

인골을 토대로 복원한 송현이는 키 153.5㎝, 허리 21.5인치에 '팔이 짧고 허리가 가늘며, 턱뼈가 짧고 얼굴이 넓고 목이 긴 미인형의 소녀'였다. KBS라디오 이미희 PD가 송현이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 <가야에서 온 소녀-잃어버린 왕국>이다. 기록을 남기지 못해 역사에서 사라진 가야,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대변하는 존재로 송현이를 다시 살려낸 것이다. 작가는 "열여섯 살 순장 소녀는 비사벌 땅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 어떤 인연으로 순장이 되어야만 했을까. 실체는 있으나 기록은 없는, 역사를 남기지 못한 나라에서 살아가다가 오랜 세월 뒤에야 자신의 뼛조각으로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존재. 그 소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휘말려들었을까"라고 의문을 나타냈다.
 
등산로를 따라 화왕산으로 오르던 일행들 중 한 명이 발길을 멈추고 서서 고분군 안내문을 유심히 읽는다. 김정철(35·부산) 씨는 "화왕산 억새를 보러 왔다, 창녕 방문은 처음이다. 고분군을 이렇게 가까이에 본 것도 처음이다. 여기서 보니 창녕읍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며 "이렇게 위치가 좋은 것을 보니 고분군에는 창녕 비화가야의 권력집단들이 묻혀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야 역사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겠다"며 고분군 일대를 유심히 바라보다 산으로 올라갔다.
 
송현이가 마지막 눈을 감기 전 바라본 가야의 하늘, 가야의 땅은 어땠을까. 고분군 아래를 바라다본다. 가을햇살이 고분군과 창녕읍내로 환하게 쏟아졌다. 소설 <가야에서 온 소녀-잃어버린 왕국>의 첫 대목이 떠올랐다.
 
"하늘로부터 한 줄기 빛이 화왕산 정상에 내려오니 그 빛줄기 따라 세상이 열렸도다. 억새에 뒤덮여 순하게 누워있던 땅의 기운이 이에 감응하니 하늘과 땅, 빛과 물이 한데 뒤엉켜 산이 열리고 불이 뿜어 나왔다.(중략) 이날로 비사벌의 하늘이 열리고 생령이 생동하기 시작했도다."-끝-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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