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가 없었다면 <삼국유사>를 읽는 재미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삼국유사>에는 원효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가 많다. 문제는 <삼국유사>에 실린 원효 이야기를 사실로 보고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이론을 펼치기도 한다는 데 있다.
 
낙산이대성 관음조를 읽어보면 의상법사는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여 관음보살을 만나는 데 성공하여 낙산사를 짓게 되지만, 원효법사는 들에서 벼를 베는 여인에게 그 벼를 달라고 하는 성적인 농담을 한 탓인지 풍랑이 일어 관음보살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보면 원효는 참담한 실패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성공과 실패라는 현상적인 사실을 넘어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할 무언가가 들어 있다. 그것은 들 가운데의 소나무 위에 있던 파랑새가 원효법사에게 "스님은 쉬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숨어서 보이지 않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쉰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비워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관련된 말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들끓고 있는 욕망을 잠재우지 않으면 인간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원효법사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데는 원효스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원효불기(원효가 모든 일에 구속을 받지 않음)조에 나온다.
 
스님이 일찍이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는데 태종이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하고 원효를 요석공주의 궁에 데리고 가서 설총을 낳게 했다는 것이다.
 
원효가 파계를 하여 설총을 낳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효가 불렀다는 노래에는 과부를 자루 없는 도끼에 비유한다든지 성적인 행위를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이야기에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희극적인 노래를 원효스님이 지었다고 하여 한바탕 크게 웃어보자는 어떤 이야기꾼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 의도를 꿰뚫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원효의 참된 모습은 <삼국유사>가 아니라 <대승기신론소>나 <금강삼매경론> 등 원효가 쓴 책을 통해 찾아야 한다. 원효는 파계를 하면 새가 날개를 잃은 것과 같이 된다고 한 바 있고, 또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피땀을 흘리며 참회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죄는 영원히 씻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 학생들과 조지훈의 시를 읽으면서 놀란 사실이 있다. '풀밭에서'란 시를 보면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던져도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고 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 내 영혼이 바람 속에 간다"라는 구절이 있다. '죄'라는 말은 '절정'이란 시에도 나오고 있었다.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
 
지조의 시인이 '죄'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조지훈 시인이 왜 죄라는 말을 썼는지 알고 싶어서 여러 논문을 찾아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가 왜 죄라는 말을 썼는지를 말해주는 논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은 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에는 눈을 감는지도 모르겠다.
 
<삼국유사>는 재미있는 책이지만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역사와 신화와 시와 종교가 얽혀 있기 때문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앎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앎을 넘어선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정보를 전달하기 바쁜 오늘날의 대학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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