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대당서역기> 언급 아유타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중부 국가

당시 김해 해상루트 교류 요충지
인도 여러 문화 가야국 흡수 계기
수로왕·허황옥 결합으로 이어져


대한불교조계종 김해 여여정사는 지난 16일 가야대학교에서 '가야문화 원형의 탐색과 콘텐츠화'를 주제로 가야문화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황정일 보조사상연구원 기획실장, 석길암·한지연 금강대 교수, 이근우 부경대 교수가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도명 스님은 "허황옥과 장유화상이 이 땅에 전파한 부처의 자비 사상과 근본 불교를 알리기 위해 학술대회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날 주제발표 내용을 요약해 정리한다.
 
■가야불교 전래지역 아유타에 대한 연구/황정일 교수
가야불교가 인도 아유타(阿踰陀) 지역에서 온 허황옥에 의해 전해졌다는 설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기'에 명시된 이래 현재까지 논란을 빚고 있다. 아유타는 산스크리트 'ayodhaya'의 음역어다. 대체로 '난승(難勝)', '무투(無鬪)', '미승(靡勝)', '불가전(不可戰)' 등의 뜻을 가진다. 대체로 고대 인도의 성이나 나라의 이름으로 쓰인다.

한역 불전에 나타난 아유타의 위치를 살펴보자.

먼저 인도 중부설이 있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아유타가 인도 중부지역에 있다고 밝혔다. 여러 한역 불전에서 아유타와 관련된 음역어 내용을 정리하면, 아유타는 인도 중부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국가이며, 부처가 자주 설법한 곳이라고 한다.

아유타와 관련된 다른 설은 야유타가 가상의 도시라는 주장이다. 인도의 대서사시인 '라마야나'에 아유타라는 지명이 언급된다. 여기서는 라마가 태어난 곳을 아유타라고 하면서 성스러운 장소로 보고 있다. 아유타는 '라마야나'가 사께다라는 실제 도시를 성도로 묘사하면서 만든 가상의 도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허황옥이 아유타에서 왔다는 내용은 허구라는 이야기다.

최근에는 아유타가 인도 남부지역이거나 스리랑카일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아유타는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주의 주도인 첸나이에서 동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인 아요디아 쿠빰이라는 것이다. 근거는 6가지다. 먼저 <삼국유사>에 보면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집채만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집채만한 파도는 갠지스강이 아니라 바다에서나 일어날 수가 있다. 허황옥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파사석탑을 만든 파사석은 인도 내륙이 아니라 동부 바닷가에서 발견된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결론적으로, 아유타는 초기 불전에 실재하는 도시로 나온다. 부처와 관련한 여러 일화를 갖고 있는 불교 신봉지역임에는 틀림없다. 가야불교가 인도 아유타로부터 전래됐다는 설과 관련해 과정의 맥락은 정확하게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허구적이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 지난 16일 가야대학교에서 열린 가야문화학술대회에서 황정일(가운데)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있다.

■기원 1~3세기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 전파 가능성/한지연 교수
북방루트를 통해 한반도에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 교류가 이뤄졌다는 게 현재 학계의 대다수 의견이다. 하지만 기원전부터 해상을 통한 교류가 존재했음은 이미 중국의 <한서>, <후한서> 외에 각종 지리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김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철은 한반도 내에서도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김해는 해상루트를 통해 교류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인도에서는 발빠르게 경남 해안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가야와의 교류를 시도했고, 이것이 바로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가야의 철기문화는 해상교역로를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인도 및 인도에 흡수돼 있던 여러 문화를 가야국으로 흡수시키는 계기가 됐다. 쌍어문양의 경우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에서 신과 왕에게 사용하던 문양이다. 인도 등에서 이를 받아들여 사용하다 허황옥과 함께 가야로 넘어온 것은 대표적 사례라고 들 수 있다. 해상교역로를 통해 인도 불교가 가야로 전래됐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보여진다. 인도에서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허황옥을 통한 불교 전래는 통치계급간의 혼인과 불탑을 통한 전래 방식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혼인을 통한 전래 방식은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또 불탑이 들어왔다는 전설은 불상보다는 불탑의 비중이 훨씬 높은 인도 중앙이나 남부에서 불교가 전래됐음을 알려준다.
 
■불교의 가야 전래에 대한 일연의 인식과 가야불교의 성격/석길암 교수
가락국 건국 당시에 불교가 수용됐을 것이라는 견해는 최근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왕후사 창건을 전후해서 불교가 수용됐다거나, 가락국 건국신화가 인도문화와 직접·간접적으로 접촉한 결과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가락국기>에는 왕후사 창건 연도를 명기하고 있다. 이는 신화적 요소라기보다는 역사적 요소에 가까운 기술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신라보다도 훨씬 더 대외교역 활동이 활발한 나라가 가야였음을 고려할 때 가야가 불교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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