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유공자 위제하 지사.

독립유공자 위제하 96세 생일
경남 동부지역 유일 생존 지사

김해 등 경남 동부지역의 유일한 생존 독립유공자이자 사회복지사업가인 위제하 지사가 96회 생일을 맞았다. 경남동부보훈지청(지청장 노원근)은 지난달 28일 김해 진영읍의 사회복지시설인 진우원을 방문해 위 지사에게 생일 축하 케이크와 건강식품을 전달했다.
 
위 지사는 1920년 평북 정주군 갈산면 애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마을에서 '큰집'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부유했다. 위 지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구장 일을 하던 할아버지는 애국의식이 굳건했어. 당시 열 살도 안 된 내게 '국모 명성황후의 목을 일본인이 베어버렸다'면서 일본의 만행을 설명해 줬어. 할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항일의식을 갖게 된 거야."
 
위 지사는 신명학원을 졸업한 뒤 1934년 '광조소년회'를 만들었다. 비슷한 뜻을 가진 소년 30여 명이 모여 자주독립, 금주, 단연(금연), 문맹퇴치 등의 운동을 진행했다. 그는 1940년 3월까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 및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등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위 지사는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940년 밀항해 도쿄사립예비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공부는 순탄치 않았다. 어느 날 경찰관이 와서 그를 데리고 가더니 '부다바코'(돼지우리)로 불리는 유치장에 수감했다. 한 달 뒤 경기도 파주경찰서로 끌려갔다. 고향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각된 것이었다. 위 지사는 6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다. 경찰관들은 그를 거꾸로 매달고는 코에 설렁탕 국물을 쏟아부었다. 손가락 사이에 굵은 펜을 끼워 돌리기도 했다. 
 
위 지사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941년 가을에 풀려났다. 이후에도 감시의 눈길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대화숙'에 강제로 들어갔다. 일본이 1941년 이른바 '사상범'을 모아놓고 '교양'하는 단체였다. 위 지사는 대화숙에 수용돼 있으면서 외국어학원에 다니며 영어 등을 배웠다. 그러다 해방을 맞이했다. "가슴이 뜨겁고 벅찼어. 친구들과 함께 20세가 되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도 들었지. 그때 남은 삶을 빈민운동에 쓰자고 마음먹었어."
 
위 지사는 해방 직후 서울 아현동 방공호에 자리를 잡고 빈민·고아 등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46년 방학기간에 고향인 정주로 넘어갔다가 한 선생과의 인연 때문에 평양고아원 원장을 맡았다. 그러다 2년 뒤 서울로 다시 넘어왔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위 지사는 이연호 목사와 함께 한강 옆에서 천막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산으로 내려가 빈민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1963년 김해로 넘어와 진우원을 맡게 됐다. 그가 진우원 원장이 된 지 53년이 흘렀다. 진우원은 2천 평이 넘는 공간을 확보해 경남에서도 손꼽히는 사회복지시설로 성장했다.
 
"광복 이후 이 한 몸이 닳아서 못 쓰게 될 때까지 빈민과 고아들을 위해 살려고 했어. 평생의 목표였고, 지금도 변함이 없어. 살아 있을 때 좀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싶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제일 큰 영광이야." 

김해뉴스 /어태희 기자 tt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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