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헌'의 삼계탕은 색을 맞추기 위한 파와 붉은 고추 이외에 어떠한 고명도 얹지 않아 고유의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1996년 여름,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어수선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자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독립을 선언하고 이제 막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 가던 때였다. 때마침 프라하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 '미션 임파서블'이 개봉되면서 프라하 시내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가난한 배낭여행객들은 프라하에 도착하면 두 가지 문제를 우선 해결했다. 첫째, 여행 기간 동안 필요한 담배를 사재기 했다. 당시 체코의 담배 가격은 서유럽 국가들의 절반 이하였다. 두번째로는 영양보충을 실시했다. 서유럽의 비싼 물가 때문에 엄두를 못내던 레스토랑에서 '칼질'도 하고,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에서 닭고기도 원없이 먹었다.

도기 그릇에 송편·절인 무화과·깍두기…
가짓수는 적어도 깔끔하고 담백한 밑반찬
파·붉은 고추 외에 일체의 고명 생략
국물 순하고 개운해 삼계탕 본연의 맛
인삼과 허브로 만든 시즈닝에 재워
스팀 오븐에 구워낸 닭한방구이 일품
 
당시 나는 프라하의 대학 기숙사에서 민박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중복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커다란 찜통을 발견하고는 한국인 여행객들을 꼬드겼다. "복날인데 삼계탕 어때!"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국 음식에 목말라 있던 여행객들은 낚였다.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식재료 구입에 나섰다. 우선 큼지막한 닭 세마리와 마늘을 샀다. 인삼·대추·밤 등은 구할 재간이 없었다. 구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아는 향신료라 해봐야 월계수잎과 통후추가 고작이다. 그렇게 어설픈 재료로 두어시간 닭을 삶았다. '삼계탕(蔘鷄湯)'이 아닌 그냥 '계탕'이었다. 하지만 수구초심 때문인지 그 맛은 각별했다. 누구는 캔에 든 김치를, 누구는 볶음 고추장을, 또 누구는 고이 간직하던 팩소주를 꺼냈다. 조촐하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복달임이었다.
 
초복(7월 14일)이 2주 정도 앞으로 다가 왔다. 삼계탕집을 소개하기에 적절한 시기다. 더위에 지친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전통 보양식으로는 개장국, 삼계탕, 팥죽 등이 있지만 대중적인 인기로는 삼계탕에 미치지 못한다. 닭고기는 쇠고기, 돼지고기에 비해 지방이 적고 소화흡수가 잘 되는 양질의 단백질이 많고, 인삼은 피로회복과 면역증강에 유효하며, 밤은 위를 보호하고, 대추는 보혈작용을 하며, 마늘은 속을 덥혀주는 효과가 있다. 더불어 크기는 좀 작아도 뚝배기 속에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 있으니 심리적인 포만감 또한 적지 않은 음식이다.
 
그럼 이 계절에 안성맞춤인 삼계탕집 소개에 앞서 삼계탕과 관련한 두 가지 쟁점을 살펴 보기로 하자. 우선 명칭의 문제다. 삼계탕의 본래 명칭은 '계삼탕'이다. 닭이 주연이니 당연한 순서다. 하지만 인삼이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 외식업자들이 이를 강조하느라 순서를 바꿔 놓았다. 계삼탕이면 어떻고, 삼계탕이면 어떠냐 싶지만 식문화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명칭은 적잖은 의미를 가진다. 주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음식이 진화하는 방향이 달라진다. 그간 인삼의 그늘에 가려 정작 중요한 닭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러다 보니 중장년층에서 삼계탕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인삼이 보편화되고 식문화의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는 지금, 인삼에게 주연을 뺏겼던 닭의 위상을 되살려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 인삼을 비롯해 대여섯 가지 허브로 만든 시즈닝에 재워 스팀오븐에 구워낸 닭한방구이.
그래서 두번째 쟁점은 바로 '닭'으로 이어진다. 닭은 크게 육계와 산란계로 구분된다. 육계는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되는 닭이고, 산란계는 계란 생산을 목적으로 사육되는 닭이다. 일반적으로 시중의 삼계탕집에는 30~35일 정도 사육해 무게가 400g 내외의 육계를 많이 사용한다. 최근에는 웅추(雄雛)라고 해서 산란계 수컷을 50일 가량 사육한 닭도 인기를 끌고 있다. 웅추가 육계보다 몸집이 크고 육질이 조금 더 단단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육계든 웅추든 시중에 유통되는 닭의 90% 정도가 외래종이라는 점이다. 이들 품종은 고기와 계란 등 제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계량된 탓에 국물을 내는 음식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에 반해 한국 토종닭은 육즙이 풍부하고 불포화지방산인 올레인산과 각종 아미노산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백숙, 삼계탕 등 국물요리에 잘 어울린다. 따라서 삼계탕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불만은 닭의 품종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송편과 절인 무화과 등 가짓수는 적어도 정갈하고 재료 본래의 질감이 살아 있다.
육계든 웅추든 시중에서 유통되는 닭으로는 소비자가 삼계탕에서 기대하는 진하고 구수한 맛을 낼 수 없다. 이러니 삼계탕집에서는 닭발을 대량으로 넣어 국물을 우리기도 하고, 사골육수나 곡물 가루를 섞는가 하면, 심지어는 닭국물 맛을 내는 조미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물 맛을 마치 특별한 비법인냥 그럴듯 하게 포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반드시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러는 사이 닭의 살코기·지방·뼈에서 우러난 진짜 국물 맛을 아는 이가 줄어든다. 원형을 모르니 변형이 원형인 줄 알고 살아간다. 변형이 판을 치니 닭 자체의 품질보다는 맛을 내는 요령에만 몰두한다. 삼계탕이 계삼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삼 대신 닭이 주연으로 나서야 이 음식의 구조가 바로 서고, 구조가 바로서야 음식의 본질이 복원되기 때문이다.
 
사설이 좀 길었졌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김해의 삼계탕집을 수소문하던 과정에 유독 눈에 띄는 집이 있었다. 김해시 삼방동에 있는 '사헌'은 2009년에 시작해 이제 겨우 3년째로 접어 들었음에도 소문이 꽤나 자자했다. 작년까지는 '생과방'이란 상호를 사용했지만 올 초에 '사헌'으로 바꾸었다. 사연인즉슨 경남 창원시에 '생과방'이란 삼계탕집이 있어 분점으로 오해하는 고객이 많아서라고 한다.
 
키 낮은 담 너머로 다소곳이 자리 잡은 단층 건물. 도심 속에 있는 음식점 치고는 마당이 제법 넓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게 정리된 정원은 주인장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한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종업원이 입구에서부터 밝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다. 식당 내부 역시 눈에 거슬리는 것 없이 잘 정돈되어 있다. 안팎으로 참 깔끔하다는 첫인상을 받는다. 그 느낌은 기본 찬으로까지 이어진다. 손님 수에 맞춰 나온 송편과 절인 무화과, 깍두기, 오이초무침, 숙주나물 등 가짓수는 적지만 하나같이 맛이 정갈하고 재료 본래의 질감이 살아 있다. 무엇보다 기분 좋은 것은 반찬 그릇은 물론이고 주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기를 도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뼈를 담는 것 정도는 멜라민 그릇을 사용할만도 한데 그마저도 구색을 맞추었다. 삼계탕 맛 이전에 일관성 하나만으로도 칭찬할 구석이 많은 집이다.
 
뚝배기에 담긴 삼계탕이 나왔다. 색을 맞추기 위해 파와 붉은 고추 정도만 올렸을 뿐 일체의 고명을 생략했다. 삼계탕 본연의 맛으로 승부하겠다는 고집이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국물 맛이 순하고 개운하다. '비법'을 절제하고 닭의 누린내를 잡기 위한 부재료 사용을 줄인 탓에 닭 국물 특유의 맛과 풍미가 살아 있다. 다른 곳에 비해 닭이 좀 작은 대신 육질이 부드럽고 누린내가 거의 없다. 국물이 개운하니 속을 채운 찹쌀을 풀어 먹는 죽 맛까지 일품이다.
 
삼계탕도 삼계탕이지만 사헌에서 특히 인상적인 음식은 닭한방구이다. 인삼을 비롯해 대여섯 가지 허브로 만든 시즈닝에 24시간 동안 재운 닭을 스팀오븐에 구워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데다 시즈닝의 조합이 절묘해 입맛을 사정없이 당긴다. 전기구이통닭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에게는 그리운 맛이기도 하면서 세련된 느낌까지 두루 갖추었다. 어지간한 전문점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맛이다.
 
분위기·서비스·음식의 3박자를 섬세하게 조율해 낸 주인장이 궁금해 뵙기를 청했다.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을 상상했건만, 뜻밖에도 조리복을 입은 30대 후반의 남성이 나타났다. 차욱(38) 대표는 삼계탕집 주방장으로 8년을 근무한 후에 '사헌'을 차렸다고 한다. 삼계탕집에서만 10년이 넘었으니 만만찮은 관록이다. 그런 그에게서 나오는 이야기 또한 뜻밖이다. "사실 저희집 음식은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기분좋고 편안하게 음식을 드실 수 있는 분위기와 서비스가 뒷받침된다면, 같은 음식이라도 조금 더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겸손하지만 자신에 찬 어조다. 경험에서 터득한 확신이기에 가능한 태도다. 대중음식점 경영자로서의 그의 지향점은 핵심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유명 건축가 미즈 반 데 로어는 "신(神)은 디테일 속에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디테일이라는 작은 차이가 모여 결국엔 완성도를 높인다. 한국 대중음식점의 고질적인 병폐가 바로 디테일 부족이다. 고객은 다양한 이유로 식당을 선택하지만 항상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모든 고객이 미식가가 아닌 이상, 식당에 대한 만족도는 분위기·서비스·음식이라는 3박자가 얼마나 섬세하게 어우러지느냐로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헌은 꽤 만족도가 높은 곳이다. '맛있는' 삼계탕집을 찾아 나섰다가 '좋은' 식당을 만난 셈이다. 어쨌거나 올 삼복 더위에는 아주 정갈한 분위기에서 복달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메뉴: 삼계탕(1만2천원), 산삼배양근산계탕(1만7천원), 닭한방구이(반마리 9천원)
▶주소: 김해시 삼방동 180-2번지
▶연락처: 055)324-6200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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