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경흠 신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김해는 부산, 창원 등과 연계된 산업화로 과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눈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펼쳐졌던 평야 사이로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사이로 섬처럼 둥둥 떠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들, 드문드문 보이던 농가. 사실 이것이 김해 시내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의 모두였다. 그러나 이 단순한 풍경 속에 치열한 삶이 있었으니, 그 농촌 삶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진 것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노동의 무게를 덜어내고, 흥겨움을 일에 얹으려 노래를 했다.
 
김해평야 전체를 지배한 농사는 벼농사였고, 김해 민요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도 논과 관련된 노래다. 그 옛날 논농사의 현장을 상상하면서 시와 민요를 한번 살펴보자.
 
민요를 보기 전에 김해의 지형이 현재처럼 변하기 전인 조선 말기, 김해에서 20여 년을 지냈던 낙하생 이학규(1770~1835)의 시를 통해 당시 김해 논농사 주변의 정서를 함께 해보자. '논물은 모두 남쪽 수문으로 흐르나니(灌稻盡從南閘去)/ 반 모낸 무논이 짝문에 비치네(一半秧畦暎對門)/ 갯가 농사꾼의 밭은 모두 무논이라 일 말로도 열 휘를 거두기 어렵지 않네(浦農田地盡龍湫 一斗無難十斛收)/ 옛 남성 밖의 옛 남문에는 논물 밟으며 곳곳에 떼지어 노래 부르네(古南城外古南門 답(足日羽)水群歌處處)' 이상 모든 시에서 묘사한 곳은 읍성 남문 밖, 즉 부원동 앞들이다. 지금은 이 부근에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고속도로를 비롯한 길들이 들을 막고 있어 시원하게 펼쳐진 들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옛날 조만강, 해반천, 신어천, 삼차강, 평강 등 물줄기가 형성한 부원동 앞들은 풍부한 물이 관건인 논농사에는 최고의 적지였을 것이다. 이 당시에는 대동 수문이나 녹산 수문이 건설되기 훨씬 이전이라 저 아래쪽 칠점산 주변은 물이 넘치고, 바닷물이 들어와 농사보다는 어업이 성행하던 곳이었다. 이학규가 묘사한 김해 논농사의 풍경이 남쪽 부원동 주변으로 집중된 것은 당연하다. 이학규의 시에서 부원동 앞들에 펼쳐진 풍요로운 논농사의 현장과 그 현장에서 흥겹게 노래하며 일하는 논농사의 주역 옛 김해 여성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제 민요 가운데 <모심기 노래>를 들어보자.
 
'봉당 앞에다 화초를 심어 화초밭이 묵어나네/ 우리야 오빠는 어데 가고 화초야 밭이 묵어나노// 아래 웃 논 모꾼들은 춘삼월이 언제던공/ 우리 님이 집 떠날 때 춘삼월에 온다더니// 물꼬랑 처정청 헐어놓고 주인네 양반 어디를 갔소/ 문어야 전복을 손에 들고 첩의야 방에 놀러갔소' 첫 번째 노래는 화초밭이 묵어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는 오빠, 두 번째 노래는 떠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님, 세 번째는 무논에 물을 대려고 물꼬를 헐어놓고 첩의 집에 놀러가서 오지 않는 주인 양반에 대한 원망이다. '모심기 노래'의 내용은 이 외에도 이별, 죽음 등 부정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여성으로서 의지해야 할 대상들이 모두 떠나가버린 상황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나 너무 슬퍼할 이유는 없다. 우리의 정신문화 전통에서 죽음은 삶을, 이별은 만남을 잉태한다는 믿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래들에 있어서의 슬픔은 다시 찾아올 기쁨과 이제 심는 모의 성장과 넉넉한 수확을 바라는 일종의 주술이랄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해의 문화를 이룬 바탕을 이야기하라면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김수로가 이루어냈던 해상 왕국 가락국의 자부심, 성재 허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선비 문화, 장군차로 불리는 차 문화, 도자기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도요지, 강을 중심으로 한 어업과 교통 등. 그런데 요사이 급격히 잊혀 가는 김해 전통 문화의 핵심이었던 논농사는 논의 감소와 기계화로 이제 김해 문화의 그 어느 것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민요는 민요의 현장 즉, 민중의 삶이 있어야 자연스럽게 존속하는 것이다. '모내기 노래'는 논농사가 있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김해의 여성들에게 '모내기 노래'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모내기 노래'는 김해 삶의 문화를 지탱하던 바탕이었으며, 이별과 죽음 앞에서도 새로운 만남과 생명을 갈구하던 희망의 외침이었다.
 
논에서 '모내기 노래'를 부르라거나 부르자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인들에게 이러한 삶의 노래가 있었음을 제대로 알리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덧붙여 조그맣게 필자가 바라는 것은 많은 김해의 행사에서 창자들에게 경기민요, 남도 민요와 함께 한 자락 정도 김해의 가락을 부탁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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