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축복 ‘은총’은 문학의 감화 해당
영혼의 거듭남 다룬 소설 <부활> 대표적

두 주인공 인간애 통해 진정한 천국 이해
톨스토이, 설교 없이 참회·용서 의미 설명

삶의 현장 곳곳에서 ‘부활’은 친숙한 얼굴
어둠의 단어를 빛의 단어로 바꾸는 게 필요


성경은 부활을 통해 영생을 가르쳐 왔다. 참회와 용서의 다리를 건너 누구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음을 약속했다. 이는 실재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천국과 부활이 허황하게 들릴 뿐이다. 그래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설교하고 또 설교한다. 그러나 인간을 육신과 영혼의 존재로 인식하는 이중적 인간학이 가슴에 와 닿으려면 깨달음의 순간이 있어야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에선 이를 은총이라 부른다.
 
문학에도 이와 유사한 축복의 순간이 있다. 감화가 곧 그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달리 문학에는 설교가 없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구성으로 보여주기만 할 뿐, 판단은 오직 독자에게 달렸다. 이 점에서 종교의 은총과 문학의 감화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한 인간의 영혼이 내면으로부터 거듭나는 이야기를 다룬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부활>은 좋은 교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탐욕에 빠진 육신의 허울을 벗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다시 피어난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 두 주인공의 인간애를 통해 독자들은 진정한 천국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많은 재산과 지위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귀족 청년 네흘류도프는 고모집에서 하녀 겸 양녀로 기거하는 마슬로바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의 사랑은 마슬로바의 순정과는 달리 유희에 불과했다. 그것은 네흘류도프가 살아왔던 상류사회에서의 보편화된 사교였다. 그러니 네흘류도프에게는 그 유희로 인해 상대방이 겪을 고통 같은 건 애초부터 심중에 없었던 것이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모두 세 번의 만남을 갖는다. 부활절의 첫 만남은 파멸의 서곡이요, 재판정에서의 두 번째 만남은 배신의 심판이요, 세 번째 만남은 참회와 용서 속에 피어난 환생의 꽃이다. 배심원단 속에 앉아 있는 네흘류도르프 앞에 피고가 되어 나타난 마슬로바. 그녀는 이미 부활절날 라일락꽃이 만발한 숲속에서 첫사랑을 나누던 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니었다. 파란만장한 삶의 가시밭길에서 무수히 상처 입은 매춘부이자 돈에 대한 욕심으로 사람을 죽인 흉악하고 추한 살인범에 불과했다.
 
네흘류도프는 충격을 받았다. 이런 기막힌 상황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양심의 천둥소리를 듣는다. 유죄 평결의 실수를 뒤집으려 재심을 요구하고, 부지사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고, 유력자인 친척을 만나 자신이 받아야하는 죗값을 눈물로 호소하고, 마지막으로 황제에게까지 탄원을 하는 등 네흘류도프는 양심이 내려치는 채찍을 무수히 맞아가며 마슬로바의 누명을 벗겨주려 발버둥친다. 그러나 기어이 떨어진 시베리아로의 4년 유배형. 결국 네흘류도프는 스스로에게 양심의 유배형을 내리고 마슬로바를 따라 기나긴 속죄의 여행길(?)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의 모순 앞에 비애를 느끼며 무엇을 통해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한다. 가엾은 아이를 제 자식처럼 돌봐주는 동료 죄수와, 아버지의 부정한 돈이 싫어 집을 뛰쳐나와 의롭게 살아가는 혁명가 시몬슨과,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남을 위한 희생을 행복으로 여기는 장군의 딸과, 유형길에 떨어졌어도 서로를 위로하고 아껴주며 고통을 함께하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네흘류도프는 두 가지 사실을 목도한다. 여기 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진정한 상류사회의 모습이 있고,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야할 가장 숭고한 가치는 인간애라는 점을 통감한다. 자신이 살아온 상류사회는 지위와 돈과 권력의 사회였다. 그네들의 정의는 욕망을 포장한 종이일 뿐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고, 인간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그곳은 희망의 사회가 아님을 통절하게 뉘우친다.
 
마침내 마슬로바의 유형지가 시베리아에서 다른 곳으로 바뀐다. 네흘류도프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흘류도프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빛을 만난 듯 날아갈 듯한 환희에 젖는다. 자신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마슬로바의 밝고 환한 미소를 마음속에 그려보며 황급히 마슬로바를 찾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마슬로바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리곤 뜻밖의 말을 한다.
 
"저 결혼해요, 상대는 시몬슨….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저로 인해 스스로 고통 받을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어떤 심정으로 어떤 일을 하고 다녔는지 다 알아요. 고마워요. 이제 당신은 저로 인한 짐을 벗고 스스로의 길을 가세요. 그래야 제 마음도 편해요. 당신에 대한 원망 같은 거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요. 오히려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라 걱정인 걸요."
 
고개를 떨구며 결혼을 말하는 마슬로바의 눈빛에 스쳐가는 아픔과 기쁨의 교차된 빛을 네흘류도프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 순간 네흘류도프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 마슬로바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녀는 나를 해방시키고자 시몬슨과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내가 그녀와 결혼해 그녀가 가는 그 어떤 곳에서든 함께 하려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거부한 것이구나. 진실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었구나.'
 
증오와 분노를 접고 마슬로바가 그의 과오를 용서했다는 사실은 네흘류도프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거듭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는 '생명력을 상실한 흙과 사랑을 잃은 인간을 보는 일은 다 같이 두렵고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마침내 네흘류도프는 참회를 통해 마슬로바는 용서를 통해 두 사람의 영혼이 함께 내면으로부터 화려하게 부활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해 감동을 줄 뿐 설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두 주인공의 영혼에 빙의되어 참회와 용서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종교와 문학에서의 부활은 고귀하고 엄숙하다. 그렇다고 해서 부활이 꼭 멀고 높은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삶의 현장 곳곳에서 아주 친숙한  얼굴로 가까이에도 있다. 패자 부활, 화려한 부활,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 이 얼마나 멋진 말들인가. 결국 인생은 증오·탐욕·슬픔 같은 어둠의 길과 사랑·용서·기쁨 같은 밝음의 길이 수시로 교차하는 곳이니, 우리는 이 두 갈림길에서 매 순간마다 어둠의 단어들을 빛의 단어로 바꾸어 가면서 이미 부활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현우/경북대 졸업. 시인.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문학> 통해 등단. 시집 <문 밖에서 부르는 노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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