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은구곡 쪽에서 산막이옛길 쪽을 바라보면 산과 물이 보인다. 물은 '괴산호'다. 저 옛날에는 뗏목이 떠다니던 강이었는데, 1950년대에 댐을 조성하는 바람에 호수로 변했다.

“가난했던 시절 산산조각 흩어진 가족
고모집 어색한 인사 장면 아직 선해
배꽃 풍경 반해 언니와 장식 만들어”

외사리 강변서 들은 눈시울 붉힌 회상
지병 떨치고 아들과 함께 고향 찾았지만
추억만 남기고 떠난 모친의 긴 여운

 

강을 건너면 배꽃 피는 마을이다. '학동'에서 남으로 십여 리쯤 '군두골'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오 리 가서 만나는 곳, 거기 '외사리나루'가 있었다. 아는 이 하나 없고 자취마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잡목 수풀에 묻혔지만, 어머니의 추억을 따라가면 그리운 옛길이 선연(鮮然)하게 보인다. 일제와 해방정국의 와중에서, 남으로 북으로 중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 한 많은 일생을 살다 가신 어머니.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강 건너 저 마을에 있음이니, 비록 그 시절 그 풍경이 아닐지라도 나 혼자 배꽃 피는 마을을 그려보며 어머니의 옛 얘기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조선조 초기의 재상 노사신이 천하에 하나뿐인 절경이라 극찬한 '갈은구곡'과 마주하는 '산막이옛길'의 초입에서 사월이면 하얗게 배꽃을 피워내던 마을, '백운(白雲)'에는 어머니의 당고모님이 계셨다.

"……그러니까, 꼭 세 번 갔었지. 처음은 다섯 살 되던 해 초여름이었고, 두 번째는 배꽃이 한창일 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짼 이듬해 가을일 거야. …먹을 것이 없었어. 너무너무 가난했거든. 하기야, 그 시절에 배부른 사람 어디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우린 유독 더했지. 부모님은 간도로, 두 오빠는 매일 머릴 맞대더니 중국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남은 건 할머니와 나 단둘뿐, 이제나 그제나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우리 목줄은 군두골 비탈에 있는 손바닥만한 비알밭 하나였는데, 그마저도 거듭되는 흉년으로 빈타작인 해가 많았어.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자연히 산나물이나 뜯어 먹고 사는 노루마냥 산속에서 살았지. 한 철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봄·가을은 지낼만했어. 냉이며, 고사리며, 도토리, 머루, 다래… 바구니만 들고 가면 내 것이 아니라도 부지런한 만큼 채울 수 있었으니까. 제일 힘들 때가 오뉴월인가 …. 산에 가도 들에 가도 거개가 빈손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얼굴이 붓고 누렇게 떴지. 이제 보니 못 먹어서 생긴 부황(浮黃)이었던 게야. 겨울을 지나면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멀었고, 밭작물이며 과일은 이제 갓 생겨나니 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있어야지. 심지어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다가 죽을 끓여 먹었는데, 그걸 '송피죽'이라 그래. 이따금 팔십 년 세월을 돌아보면, 참 이상한 것이, 좋은 때 다 놔두고 하필이면 왜 맨 먼저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

…… 내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못 보았단다. 여기저기 뛰어올라 은빛을 다투는 물고기며, 맑디맑은 강바닥에서 피난민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자갈과 모래, 바람이 불 때마다 나비처럼 날아드는 하얀 배꽃들…. 그중 제일은, 뭐니 뭐니 해도 뗏목일 거야. 강을 건네주는 유일한 배였으니까. 강을 건널 사람이 큰 소리로 부르면 강 건너 산자락 어디선가 메아리가 들리지. 타야 할 사람도 태워줄 사람도 그걸로 그만,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어. 뗏사공의 남은 일과 마음에 달린 게지. 요즘 같으면 아마 난리가 날 걸?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턱을 괸 채 강 건너만 바라보고, 나는 그 풍경들을 놓칠세라 눈에 담기 바빴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릴 향해 사공이 오는 거야. 느릿느릿, 바쁠 것 하나 없이,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재촉 받을 이유도 없고, 우린 그때 그렇게 살았어. 나를 애태운 건, 엉뚱하게도 대나무 장대였는데, 아마 그게 뗏목의 노였나 봐. 사공이 뒤편에서 이리저리 강심(江心)을 짚어가면 조금씩 조금씩 마을이 가까워지고, 내 마음엔 배꽃이 만발하고, 아무튼 딴 세상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 고모네 집 대문에서 나는 자꾸 헛걸음질을 쳤어. 안으로 잡아끄는 할머니와 한동안 실랑이를 했지. 너무 놀랐거든. 그렇게 으리으리한 기와집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주위는 온통 문도 담도 변변찮은 초가뿐이니, 여기가 대궐인가 싶었겠지. 심심산골에만 처박혀 살던 어린애 눈이었으니, 말해 뭣하나. 식구는, 시부모님 내외와 당고모부 그리고 나보다 서너 살 위의 언니까지 다섯이었는데, 원래는 여섯이야. 일본에서 유학하는 오빠가 있었다니까. 하지만 난 본 적이 없어.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마도 그 오빤 북으로 갔나 봐. 모두들 쉬쉬하며 말 감추기 바빴으니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우리를 맞이하는 그 댁 식구들의 태도였어. 나는 주눅이 들어 애꿎은 옷고름만 씹어대고, 할머닌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눈길 둘 곳을 찾고, 그 댁 식구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생각할수록 어색한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한 걸. 왜 그랬을까? 그 까닭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

칠십오 년 전, 뗏목이 도착했을 때,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쏟아내던 당고모님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다 늙어 비틀어진 지금에사 겨우 알 것 같구나. 
     
…… 세상에!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글쎄, 언니를 보채서 혹말을 타고, 꽃을 마구 따냈으니…, 그해 농사가 어찌 됐겠냐? 아무리 둘러봐도 꽃향기만 가득하고, 먹고 싶은 배가 안 보이는 거야. 까닭을 물었더니, 꽃이 져야 열린다고 해서…. 언니는 그런 내가 귀여운지 계속 웃기만 하고, 결국 그걸로 장식을 만들었는데, 너무너무 예뻤어. 나중엔 꽃이 모자라서 언니도 함께 꽃잎을 땄지. 하나씩 하나씩 완성이 될 때마다 씌우고 걸어주며 언니와 난 시간 가는 줄 몰랐단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또 가을대로, 그 집엔 먹을 게 넘쳐났지. 무엇보다 그게 좋았어. 명절 때조차 귀했던 하얀 쌀밥을 실컷 먹어본 곳이 거기였으니까. 행복이란 어쩌면 밥 한 그릇만으로도 충분한 것인지 몰라.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마치 공주가 된 것처럼 한껏 들떠 집에 와 보니, 당고모님은 이것저것 짐 챙기느라 바쁘고, 할머니와 고모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먼 하늘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 당시엔 그게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지. 철부지 다섯 살이 천만가지 세상사를 어찌 알았겠냐. 우리를 맞이할 때나 보낼 때나 당고모는 습관처럼 앞치마로 얼굴을 가렸는데, 남몰래 눈물을 닦느라 그랬던 모양이야.

…… 돌아오는 뗏목 위엔 보따리가 여럿이었단다. 나는 궁금증을 못 참아 끌러보고 싶었지만, 할머니 때문에 꾹 참았어. 평소완 다른 표정이었거든. '에구, 저것만 아니면, 저 불쌍한 어린 것만 아니면….' 아무리 어렸어도 내가 왜 그 심정을 몰랐을까, 저절로 느껴지던 걸. 강을 다 건너와서도 우린 선뜻 그 자리를 뜨지 못했어. 할머니와 고모가 서로 어서 가라 다투고 있었으니까. 결국은 우리가 먼저 돌아섰지. 나는 신이 나서 토끼처럼 깡충거리고, 할머니는 양손과 머리 위의 짐이 힘겨운지 숨을 헐떡거렸는데, 그래도 표정은 갈 때보다 밝게 보였어. 그걸 보면 양반도 먹을 것이 있어야 양반인 게야. 학동고개를 넘을 때였나? 갑자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할머니가 내 팔을 붙잡더니, 멀쩡하게 잘 매어져 있는 옷고름을 풀어 다시 매주며 막 야단치시잖아, 누가 그랬냐고 하면서. 방향이 바뀌어져 있었나 봐. 어리둥절한 내가 언니 탓을 하니까,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씁쓰레하게 웃으셨어. 당시만 해도 반상을 따질 때였거든. 다 지난 일이지만, 그 댁 어른들은 우리 쪽에 할 말이 참 많았을 거구먼. 멀쩡하게 잘 키운 손자 하나를, 독립이다 뭐다 하며 우리 오빠가 바람 들였고, 아들은 처가 한번 가본 적 없고, 종당엔 그 많던 재산 다 날렸으니…, 모르긴 몰라도 한이 맺혔을 테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순 없지만, 6·25 때 후퇴하던 '갈은리'의 인민군들 틈에서 오빠를 닮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야. 소문을 들은 고모부가 부랴부랴 그리로 갔는데, 찾은 건 산과 계곡에 즐비한 시체뿐이었다나? 그 후론 늘 움츠려서 살았나 봐. 그래서 저렇게, 집도 사람도 간 곳 없이 폐허만 남은 걸까? 하지만 임종하기 전날, 큰할아버님께서 당고모 내외를 찾으셨다니, 어디선가 소식이라도 들었다면 응어리 하나쯤은 사그라들었을지 몰라. 그나저나, 이제 내가 가면 너도 때론 여기가 그리울지 모르겠다.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나마 다시 해 줄 사람도 없고……."

어쩌면 햇살 같고 어쩌면 이슬 같은 배꽃 마을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어릴 적 외사리 강변에서였다. 수줍은 소녀처럼 홍조를 띤 채, 아픔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따금 눈시울을 붉히시던 어머니. 삶이 너무 고달파서 내가 나를 주체 못할 그런 날이면 어머니와 외증조모님이 타고 건넌 뗏목을 찾아 나는 회상의 강 언덕에 오르곤 한다. 고난의 밤길이 끝나는 거기 어디쯤 새벽 같은 미소를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 어느 해 겨울,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잠시 떨치고 일어난 날, 무언가에 이끌리듯 우리가 찾아 간 곳은 그 시절의 배꽃 피는 마을이었다. 경상남도, 경상북도, 충청북도…괴산군에 들어서자, 어린애처럼 들떠 있던 어머니는 소리 없이 창을 열었다. 산천은 눈이 내려 차기만 한데 당신은 계절조차 잊으셨던 것이다. 그날따라 새삼 그리웠던 탓일까. 어머니와 나는 옛 풍경의 잔상(殘像)들을 하나하나 새 풍경 위에 그리면서 오래도록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마지막 말씀 그대로, 추억만 남겨둔 채 어머니는 홀연히 떠나가셨다. "난 네 차를 타고 고향 갈 때가 제일 행복하단다." 사람은 없고 말씀만 들리는 오늘, 차창을 열고 지금은 다리가 된 뱃길을 건너 어머니가 가리키던 마을로 간다. 거기가 바로 옛 얘기 속 여운이 깃든 '백운동'이다.
 세월은 빨리 흘러, 어느새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내 인생의 정원에도 가을이 왔다. 수년 전, 느닷없이 직장을 그만 두었을 때, 모두들 의아해 했다. '아직 그럴 형편이 아닐 텐데…'라는 주위의 염려가 사실임을 감안하면 겉으론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속은 아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곁에 사람이 없어도, 견디며 사는 법을 어머니의 삶이 가르쳐 준 덕분이다. 퇴직한 후 거의 일 년여를 나는 부동산 투기꾼처럼 돌아다녔다. 안 가본 데가 없다. 어머니의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잘 보이는 곳, 저 멀리 달천강이 휘돌아오는 풍경 속에 아담한 집을 지어, 어머니께 배꽃 피는 사월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환상이었나 보다. 소망이 거의 이루어져 갈 무렵,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런 것이 운명일지니 사람들은 후회로서 남은 흔적을 덮는다. 나는 그저 평범한 시인이다. 이 세상에 와서 이룬 것 하나 없다. 돈과 명예와 지위에 매달려 구걸해 본 적도 없다. 세파와 싸우며 때로는 둔피(遁避)하듯 그렇게 살아온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글 속에 있음을 내 소중한 벗님들은 이해하리라. 땅도 집도 의미가 없어진 지 어느덧 7년, 갈수록 멀어지는 추억의 마을에서 주인 잃은 시 한 편 띄워 보낸다.

'봄날의 매화꽃 하염없이 지더니/ 겨울 와서 임 생각 더욱 아파라./ 비원悲願인 양 / 높이 솟아 홀로 눈뜬 하늘엔/ 반만 남은 달/ 바라보면 율원리 행行 아득히 멀어/ 가슴에 미리 새긴/ 하얀 발자국.(설야雪夜)' 김해뉴스

 


>> 이현우/경북대 졸업. 시인.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문학> 통해 등단. 시집 <문 밖에서 부르는 노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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